미켈란젤로의 왕성한 창작
1500년부터 1508년까지 8년 동안은 미켈란젤로의 창작이 왕성했던 시기이며, 이때를 ‘성기 르네상스 High Renaissance’라 합니다. 그는 피렌체에서 열여덟 차례에 걸쳐 작품 의뢰를 받았는데, 청동으로 제작하는 것에서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웅장한 무덤을 장식하는 일, 피콜로미니의 의뢰로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을 장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 시기에 대리석 조각 아홉 점을 제작했는데, <다윗> 외에도 <브뤼허 성모>, <성 마태오>, 두 점의 톤도, 피콜로미니 제단을 위한 네 점의 작은 인물상을 제작했고, 청동으로 단도를 든 사람과 프랑스와의 외교 수단으로 기증한 <다윗>(두 작품 모두 현존하지 않음), 그리고 볼로냐 시의회를 위해 앉아 있는 교황 율리우스를 제작했습니다. 그가 제작한 율리우스는 1511년 교황에 항거하는 폭동 때 사라졌습니다. 당시 그는 <도니 톤도>와 프레스코 <카시나 전투>를 위한 드로잉을 그렸습니다.
라파엘로의 <율리우스 2세의 초상>, 1511-12년경, 패널에 유채, 108-80.7cm.
율리우스 2세Julius II(1443-1513)는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조카로 27살에 추기경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 손으로 교회의 세속 권력 신장을 추구하여 교회의 위용을 과시하려고 했으며, 예술가들을 보호 육성했습니다. 율리우스 재위 중의 로마는 조형미술 분야에서 피렌체를 능가하는 예술가들의 메카가 되었습니다.
율리우스 2세가 즉위했을 때 교황령 체사레 베르지아가 찬탈되었습니다. 그는 이를 정복하기 위한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성직과 면죄부를 팔았고, 프랑스를 끌어들여 교황-프랑스 동맹군을 편성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영적 지도자라기보다는 무인으로서 스스로 종군하여 병사들과 더불어 고생하면서 작전을 지휘했으며, 축성을 감독하며 자신의 명령을 어기는 자를 강력히 처벌했습니다. 그는 항복권고에 반대하는 도시의 지배자들을 피문하고 시민들에게는 반란을 일으키도록 호소하면서 승리를 거듭하여 볼로냐에 입성했습니다. 그는 승리를 자축하기 위해 미켈란젤로에게 명하여 자기 동상을 성 베드로 대성당 앞에 세우게 하고 로마로 개선했습니다. 강적이었던 베네치아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동맹군이 절실했고, 1508년 12월 10일 독일 황제 막스밀리안, 프랑스 왕 루이 12세, 스페인 왕 페르난도, 교황 율리우스의 동맹이 결성되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 원로들은 교황의 동맹 결성을 보고받고 파엔트라, 리미니 두 도시를 반환하겠다고 통고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이를 거절하고 출병했으며, 전선은 이탈리아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베네치아 군대는 각지에서 동맹군을 요격했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베네토 주에 결집하여 강력하게 저항했고, 이에 동맹군은 무산되었습니다.
이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에 프랑스 세력이 강화된 건 명백했습니다. 교황은 프랑스가 자신의 영토를 침공해올 것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반프랑스 동맹을 획책했습니다. 율리우스는 프랑스와의 맹약을 지킨 페라라 공화국을 침공하여 두 주 후 함락시켰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군대가 공격해왔고, 프랑스군의 보호를 받던 페라라 시민들은 그들의 진입을 환영했습니다.
교황은 1511년 10월 스페인, 베네치아 두 나라를 끌어들여 반프랑스 신성동맹을 정식으로 발족시켰습니다. 영국도 교황의 신성동맹에 가입했습니다. 프랑스 왕은 피사에서 공의회를 열고 계속해서 밀라노에서도 열었으며, 분리파 추기경단은 교황의 폐위를 선언했고, 프랑스군은 로마냐로 진격했습니다. 율리우스는 이에 대항하여 1512년 5월 2일 라테라노 궁정에서 공의회를 개최했으며, 보름 후 독일, 스위스도 교황편이 되어 신성동맹에 가담했습니다. 연속 공세에 몰린 프랑스군은 밀라노, 볼로냐, 라벤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이 승리를 감수할 겨를도 없이 병으로 스러졌습니다. 1513년 2월 4일 아침 교황은 의전관을 불러 장례에 대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2월 20일 그는 죽음에 임박했음을 알고 임종의 준비를 하고 침대 머리맡에 추기경들을 불러 모아 자신의 죄와 교회 운영에 대한 과오를 참회했습니다. 이것이 율리우스 2세의 최후이자 생애에 걸쳐 단 한 번의 겸손한 태도였습니다.
미켈란젤로 후원자들의 신분은 다양했는데, 두 명의 교황, 피렌체 지도자 곤팔로니에레 디 지우스티지아와 피에트로 소데리니, 피렌체의 저명한 네 가문 스트로치 가, 도니 가, 피티 가, 타데이 가, 피렌체 대성당, 플랑드르의 거상, 프랑스 추기경, 재무장관 등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작품 의뢰를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미완성으로 남긴 것들도 있고,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한 것들도 있습니다. 작품을 모두 제작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뢰를 수용한 것은 책임감이 없었기 때문이기보다는 의뢰 작품마다 새로운 도전으로 생각하여 모든 도전을 받아들이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일대기를 전해준 콘디비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터키의 술탄 왕가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의 보스포로스 교량을 놓는 일을 의뢰받고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 고심했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명성이 터키에까지 자자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사진: 19세기 대리석 채석장과 운반 장면
미켈란젤로의 <성 마태오>, 1505-06년경, 대리석, 높이 271cm.
몸통은 정면, 얼굴은 옆을 향하고 있고, 왼쪽 다리가 굽은 채 얼굴과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머리와 오른팔, 그리고 오른쪽 다리가 스케치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라오콘>의 격정적인 정서를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표현방식은 미켈란젤로가 고유의 ‘격렬하게 뒤틀린 육체로 감정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전환해감을 보여줍니다.
미켈란젤로의 <성 마태오>의 부분
돌을 매우 거칠게 스케치했지만, 머리 부분(좌)에서도 미켈란젤로의 몸짓에 대한 표현을 읽을 수 있습니다. 회화에서 마태오는 일반적으로 복음서를 쓰고 있는 모습이지만, 미켈란젤로는 왼손에 성서 혹은 석판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성 마태오>의 부분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오른손은 미완성이며, 깃펜을 들고 있어 그가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신성에 힘입어 복음서를 썼음을 시사합니다.
1503년 피렌체 대성당의 아르테 델라 라나는 열두 사도들의 모습을 실제 사람보다 크게 새겨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이는 미켈란젤로의 창의력과 신앙의 깊이를 테스트하는 도전과 다름없었습니다. 열두 사도들을 각기 개성 있게 묘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으므로 이런 중요한 일을 그에게 맡긴다는 것은 피렌체 대성당이 그를 신뢰했다는 것을 시사합니다. 그는 1년에 한 점씩 제작하기로 약속하고 카라라 채석장으로 가서 직접 대리석을 골랐으며, 적어도 다섯 차례에 걸쳐 피렌체로 운반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카시나 전투>의 제작 때문에 이 작업이 지연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상하지만 계약이 파기된 이후인 1506년경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성 마태오>를 먼저 제작하기로 했지만, 그것마저 미완성으로 남겼습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무덤을 건립하는 일을 위임받아 로마로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라자로와 두 인물에 대한 습작>, 1516-17년경, 25.1-18.3cm.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의 <라자로를 살림>, 1517-19, 패널에서 캔버스에 유채로 옮김, 381-289.6cm.
성서에서 라자로가 자신을 감싼 천을 풀고 부활했듯이 마태오도 자신을 죄고 묶어둔 돌의 억압에서 벗어나 벌떡 일어나기 직전의 모습입니다. 미켈란젤로의 돌조각은 억제된 동작의 표현으로 돌 속에 내재되어 있는 형상을 자유롭게 만드는 작업의 결과로 보입니다. 억제된 동작을 인물의 의지 탓으로 돌립니다. 창조주가 인간을 흙으로 빚어 정신을 불어넣어 생기를 돌게 만들었듯이 미켈란젤로도 돌에 정신을 불어넣어 생기 있고 자유로운 형상을 만들었습니다. 비록 미완성이지만 <성 마태오>를 통해 그의 신앙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