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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암면 갈마리

작성자김일호(원동)|작성시간14.08.28|조회수163 목록 댓글 0

 

갈마리(渴馬里)
갈마리는 갈마(渴馬), 감성(甘星), 동촌(東村)을 1914년에 통합하여 갈마라 통칭하였다 1912년에 갈촌(葛)村)이라썼고1914년에 갈마리(渴馬里)로기록해 오늘에 이른다.

 

갈마(渴馬)
마을 사람들은 마을의 형국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이라 갈촌(渴村)라불렀다고 하나 葛(갈)을 漫(갈)로 생각하고 풍수설을 접합한 풀이일 뿐이다. 순천시에도 갈마골’이 있다. 여기도 갈마음수(渴馬飮水)의 형국이라고부른다. 지명을풍수설에 유추하여 풀이하는것은 신라 이래의 일이니 그 보다지명이 먼저 생겼을 것이므로꼭 믿을 것이 못 된다. 갈촌(葛村), 갈마(渴馬)도 한자의 뜻에 매이어 풀이해서는 안된다.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차용하여 표기하였기 때문이다.
우리 민요에 “저 건너 갈미봉에 비오나마나 어린 가장 품안에 잠자나마나”
이런 가사가 있다. 갈미봉을 갈미봉(渴尾峯)으로 적었다고 여기도 풍수설을 들먹일 수 있을까? ‘갈미’는 갓 위에 우산처럼 덮어쓰는 우산의 일종이다.그생김이 원뿔 같다.그러므로 갈미봉은 원뿔처럼 솟은산봉우리에 불은지명이다.그래서 갈미봉은지방마다 있다. 갈마골은 갈미봉 아래 골짜기에 있는 마을 또는 골짜기란 뜻이다. 이 마을도 갈마골’ 이 본 이름인지 모른다.물이 적은마을이다.우물이 셋이나 있지만조금만 가물어도 바닥이 난다.
태뫼’란동산이 있다.조선 시대에 노(盧) 장군이 태뫼를 지나다가말을 매어 둘 곳을 찾았으나마땅한곳이 없어 우물가에 있는 바위를 일으겨 세웠는데 그 아래서 백마가나와승천하였다. 이를 기념하려 마주석(馬柱石)을세웠다 높이가15m쯤 된다 마주석에 ‘임진 시월(王辰十月)’이라새겨 있다. 어느 시대인지는모른다.그 때부터 마주석 옆에 무당이 집을집을짓고살았다.이런 전설 때문에 갈촌(葛村)이 갈마(渴馬)가되었을것 같다.
사흘집’이 있다. 조선말에 마을에 이렇다 할 양반이없어 신진사란양반을모셔왔는데 그분이 기거할집을 사흘만에 지었다고 그렇게 부른다. 신 진사의 세도가 어떠했음 을 말해 주는 집이다. 그리고 마을과 마을 사이에 힘의 대결도 있었음을 말해 준다. 세도가큰다른 마을의 힘을배격하러 세도 가있는 양반을모셔 와살게 하여 제 마을 을지키려는의지가보인다 1969년에 갑부가 진골’에 관봉사(觀鳳寺)를 세워 불탄일과 칠석날에 불교인들이 많이 찾아 든다. 1300년경에 엄(嚴), 박(朴),김(金) 삼성이 설촌하였다고전해 오는마을이다.
그런데 보조 국사께서 송광사에 주석하실 때에 나라에서 토지를 하사하였는데 ‘위장이촌(薰長伊村)에 수십결의 논을하사하였다는기록이 있다. 이 마을 이 순천의 임내(任內)에 있다고하였다.거기가어딘지를알수없다.
위장이촌(薰長伊村)은 마을 이름이다.촌(村)은 마을이란뜻이니 진정 마을 이름은 위장이(薰長伊)뿐이다.위(薰)는 ‘갈대’이고장(長)은 !길다,멀다, 맏이,어른’이며 이(伊)는접미사노,-이’고 촌(村)은 마을, 모실,몰, 말’이므로위장이촌(薰長伊村)은 ‘갈머리,갈모리,갈몰이’의 이두표현으로 볼수도 있다. 이러한풀이가맞다면 위장이촌(薰長伊村)은갈마(葛 馬,渴馬)의 고지명(古地名)이 된다.

 

감성(甘星)
1500년경에 인동장씨와하동정씨가 정착하였다고미을사림들은말하나이는현재 살고있는 입촌선조에 대한 이야기일 뿐그보다 앞선 시대에도사람이 살았음을간과(看過)해서는안된다.감성 마을 뒤에 ‘골안이라부르는골짜기에 마을터가 있다.그곳은현재 논밭이다. 그러나 깨진 기와조각과사기 조각이 흩어져 있으며 ‘참샘’이 있다. 참샘은 찬샘 ’곧 찬물이 나는샘이란뜻이다.
마을사람들은그샘을 ‘참새미’ 또는 ‘약새미’이라한다 이 샘물로농사를짓는다.물맛이 좋다.논 가운데 이 샘이 있다. 이로보아마을 안에 있던 샘임을 짐작할수 있는데 언제설촌되었고 언제 폐촌되었는지 아무도모른다순천시(구승주군지역)는산악지대이다.그래서 그런지 마을이 대체로 산속에 있고산골 깊숙이 높은곳에 마을 터가흔히 있다 이는삶의 변천을볼수 있는자료이다. 이는산이 삶의 무대라,생산수단이 사냥, 약초채취,산나물의 채취,임산물의 가공등이므로마을이 산속에 있고,임진왜란같은난을피하여 산속깊숙히 숨거나죄인들이 또는죄인으로몰린사림들이 도망하여 산속에서 숨어살거나,귀양살이를하면서 세속과인연을끊으려 산속으로숨어 든것 때문에 마을이 산속에 있지 않을까?
농경 문화가발달되고사회 여건이 변함에 따라들로 마을이 내려오기 시작하였는데 일제가늑약(勒約)을맺고 이 땅을강점하여 신작로를개설하면서 교통체계가 새롭게 형성되어 산골보다들판이 더 편리해지므로 마을이 이동됨을볼수 있다. 이 마을도 이런 이유로산골에서 내려와들쪽으로옮겼을가능성을배제할수없다
우리 지방에 마을이 없어지고새로생기는까닭은주로재해에 있다재해는화재,수재,전쟁, 전염병 들이다. 이런 재난을 당하면 사림들은 마을 터를옮긴다.특히 돌림병이 퍼져 마을사람들이 전염돼 거의 죽어 나가면산사람들은마을에 불을지르고도망쳐 새터를잡는다. 그래서 마을의 샘에 대한애착이 대단하다병신이 안태어나고돌림병이 생기지 않은것은샘 곧 먹는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 한일합방직전에 의병들이 항일 투쟁을전개하였다.송광면 대곡리에서도조규화가의병을 일으켜 항일 구국투쟁을 벌렸는데 그가살던 웃한실에 일본토벌군이 불을 질러 폐촌시켰다.그래도주암 댐에 물을 담기 전까지는감나무가 서 있어 폐촌의 사연을말없이 말해 주고 있었다이처럼 마을이 생기고없어짐은 생활수단,사회 역사적 여건, 재해 등으로 말미암았다. 감성도 이상에서 말한 어떤요인에 의하여 ‘골안에서 현재의 위치로 이동되었을것인데 주민들은 모두 잊고 그원인을 말하지 못한다. 양성 이씨의 꿈에 하늘에서 길성이 뻗친 것을보았다. 이 꿈때문에 마을 이름을 감숭골’ 이라고하였다고전한다.이 꿈이 마을형성의 비밀을말해주는것 같다 ‘골안에서 재해가 마을을 휩쓸자행복하게 살려는 사림들의 소망이 꿈으로표현되고 그꿈으로 인심을끌어 옛터(골안)를 버리고 새터(감성)로마을을옮겼음을말해 주고 있다고상상할수 있다. 혹시 ‘감, 은신(神)’을뜻하고 숭’은산등성이처럼 산자락의 이름에 붙는 접미사 곧지명 소인지도모른다 이 추정이 맞다면 신이 계시는산등성에 있는골(마을)이란뜻이 있을 것 l이다.감성 마을사람들은산신제를지낸다 정월 초하루에 ‘약새미’의 물을 떠다 떡굴몰랑 (德鳳山) 중턱에 있는산제단에서 제를지낸다 언제부터 이 제를지냈는지 모른다 마을에서 호랑이의 해를 입어 그해를 막으려 제를지냈는데,그 뒤로부터 호랑이의 해를 입지 않았고 국가에 변란이 생겨도사람이 다친 일이 없다고한다. !그러므로 산신제는 마을수호를위한 제사이며 마을 을하나로 묶는 종교적 의식이라 할수있다

 

동촌(東村)
1600년경에 광산김영하(金永河),영수(永秀),영태(永泰)삼형제가천평에서수재를만나 이주하여마을이형성되었다고한다.김씨세형제가부자이기때문에주암면에서가장많은 세금을낸다는소문이 순천까지퍼져여러차례 희사를하였다고한다. 그러다보니 가세 가기울어폐촌위기에이르자마을일을 돌아가며 보고이정세(里懶兌)를거두어공동재산을만들어서1000여평의논을사거기서나오는임대료로지금까지도마을경비를쓰고있다 감성마을 동쪽에있어서 동촌이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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