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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암면 구산리

작성자김일호(원동)|작성시간14.08.28|조회수156 목록 댓글 0

 

 

구산리(九山里)


선산(蒜山),구산(九山),금곡리(金谷里)를1914년에 구산리로 통칭하였다.

그런데 1914년의기록에는 선산(蒜山)이 보이지 않고 혁산(爀山)이 보인다. 이는 선산 (蒜山)의 오기(誤記)가 분명하며 선산(蒜山)은 한자 그대로 원는다면 ‘산산이 되는데 마을 사람들은 ‘선산?으로 마을이름을부른다.

같은발음을거듭하기 싫어서 마늘산(蒜)’ 자를 ‘선’으로원는다고할수도있지만우리말지명을한자로옷을 입힌 데서 오는현상이다.

선산 ( 蒜山) 선산(蒜山)은 마늘산, 뫼산이므로 ‘산산으로 읽어야히는데 ‘선산으로 읽고부른다. 신계우군수는 같은 소리가겹치기 때문에 ‘산산이라고 하지 않고 ‘선산이라고 한 것 같다고지적하였다 그건 그렇다.우리말이름이 말메’, 마늘메’이다. 이를한자로뜻옮김하여 표기하고 보니 ‘산산’이 되었다.그래서 같은소리를거듭해 부르기가어색하기 때문에 ‘선산?으로바꾸어 불렀다고할수 있다.이는지명을한자를차용해서 표기한이두식 표기이므로 우리말 발음이 한자의 음에 합치하지 않을수도 있고 이두로 한자를 읽을때에는그음(音)이 다르다는것을 말해 주고 있다 마을 뒤에 마늘조각 형상을 한산이 있다. 이 산을 마늘봉’이라부른다 그것이 그대로 마을 이름이 되었다.곧 마늘봉’을 마늘’로 생각 하고돗옮김하였으며 메’는그대로뜻옮김해 산산(蒜山)으로 한자의 옷을 입히고 같은소리가 겹치므로이를 피하려 ‘선산으로 읽은 것이다.1450년경에 도강김씨가설촌하고 경주 정씨가들어 왔다고전한다 마을에 세 갈래의 개울이 흐른다
개울위 부분에 폭포가있었다.그폭포에서 앉은뱅이가목욕을 하고걸어 나왔다고하는 이야기가전해 온다.지금은형상만 남아있을뿐폭포가없다.물이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마을 앞에 동산이 있다 어떤 사람이 그동산을 파헤쳐 농사를짓다가재앙이 생겨 다시 동산을 만들었다고 한다.마을 앞에 ‘선바구’가 둘이 있다사람들이 ‘숫선바구’, ‘암선바구’라구별하여 부른다. 높이가2.5m와1.8m쯤 된다. 선바위 곧 입석이 있는 마을은 역사가갚다 지석과적석(積石)은시대를같이 한청동기 시대의 유물이므로마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수 있다.주암댐 건설로수몰지대에 87년에서 89년에 박물관에 관계한고고학 교수들이 빌굴한 결과보성강 연안에 지석묘군이 많이 분포되어 있고유물 및 주거지로 보아 원삼국(原三國) 시대에 사람이 살았음을밝혀 냈다 선산마을도보성강연변 마을이다.그러므로 입석을세워 마을의 존재를표시한 사람들은 원삼국 시대 사람일 가능성도 높다 더구나 백제가멸망하기까지는 둔지현이 창촌리를중심으로1km의 범위 안에 치소가 있었을것이니 백제 때에도선산에 사람이 살았지만마을사람들은그 역사를모른다.

 

구산(九山, 龜山)
1447년쯤에 조지곤(趙智昆)이 설촌하고 밀양 박씨가 들어 왔다고 전한다. 우리말 이름이 거그메’이다.마을의 형상이 거북같아 구산(龜山)이라한자의 옷을 입혔다.그런데 일본의구산천황(龜山天皇)과 같은 글지를 쓸 수 없다고 1914년에 구산(九山)으로 바꾸었다. 나라를 강제로 합방시킨 왜의 힘이 지명마저 임으로 빼앗고 개칭하였으니 구산(九山)도 왜식지명이다.꼭 일본지명의 모습이 없더라도 일제가고치고 새로 이름지은 이름은모두왜색지명이다.좋게 생각하여 어려운한자를쉬운한자로 바꾸어,쓰기에 편하게 하였다고 할지모르나 우리의 전통를 말살하려는그들의 악랄한 저의 가 숨어 있다.
‘거그메’가 어찌 구산(龜山)이 되었을까? ‘거그’를 거북’으로 메’를 산으로뜻옮김한것이다. 거북’의 옛 이름은 거붑’인데 거그’는꼭 거북을뜻한다고볼수 없다. 풍수지리설의 영향으로산세를 거북 형상으로 인지하였고 또 거북은자생 불사의 신성이 있는동물이며 남성을상징하기도 한다. 그래서 거그메’를구산(龜山)으로 뜻 옮김하였으리라.
마을에 담락재(港樂廳)가 있고 구두정(龜頭亨)과 경운각(慶運開)이 있다. 지석묘가 마을뒤에 있다 마을에서 화재가자주 발생하였다 조씨(趙 氏)는음양오행설에 의하변 화(火)에 해당되는데 마을에 조씨가많이 사는 것은불에 탈 나무가많은것과겉아불이 자주 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신제(火神祭)를 지낸다 이 화신제(火神祭 )를 ‘물보기’라부른다
마을 어귀에 짐대를세우고 그 끝에 나무로오리 형상을 만들어 달아놓고 여기는 오리 가 사는물이 있으니 화마는근접치 말라’ 고 기원을 한다. 정월 보름날제를지낸다. 이 물보기 놀이가1995년 민속놀이에 참여하여 입상하였다.

 

황산(黃山)
구산에 딸린 마을이다.주암초등학교 가 있다 학교앞에 밀양박씨가황토를파낸 자리에터를잡고주막을개설하였다 1836년경이라고 한다 이 곳의 흙이 좋아 기와를 만들었다 그때 사람들이, ‘흙을 파낸 구덕 또는 ‘구덩’이가생겼는데 거기를 ‘흙구덩’이라불렀다. 마을의 형태가 누런닭이 알을 품고(黃鷄卵形)있는 황계등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는 풍수설이 접합된 풀이다. 황토를 파낸 곳이다. 게다가 산기슭이 뻗쳐 있기 때문에 황산이라고 고쳤다고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아무튼 황토를 파낸 지리에 생긴 마을에서 생긴이름이다. 1966년에 건립한 신도비가 있다 함길도 병마절도사 조숭문(趙崇文)과 그 아들 철산(哲山)이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어 사육신과 함께 죽음을 당한 충정를 기린 비이다.

 

금곡(金谷)
우리말 이름이 ‘쇠골’이다. ‘쇠’를 金(금)으로 ‘골’을 谷(곡)으로 뜻옮김하여 금곡(金 谷)이 되었다. 지금도 느랭이골 , 비사리골, ‘쇠골 , ‘아래쇠골 들의 지명이 있다. 한 때는 금곡(錦 谷 )이라 쓴 적도 있다.마을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베틀처럼 보인다고 금곡(錦 谷 )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베틀에서 비단을 짠다는 뜻이니 마을 이름을 아름답게 나타내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쇠’는 金(금)이다. 또한 소 (牛)일 수도 있다. 谷(곡)은 골짜기의 뜻도 있고 실’의 뜻도 있다. 실’은실내’, 시내’처럼 좁고 작은 물줄기를 뜻하기도 하고 대곡을 한실’, 후곡을 ‘모실’, 석곡은 도실’처럼 마을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각도에서 생각하면 금곡은 ‘쇠가 나는 골’의 뜻이있지만 소의 마-실 ‘쇠실’이란 뜻도 있다.
마을 뒤에 황새 봉이 있다 그 형상이 마치 황새가 날개를 펴고 날0}가·는 듯하고 안산에 우렁이바구’가 있어 사람들은 황새가 날아 우렁을 조으려는 것 같다고 말한다 일제 때 신작로를 내면서 우렁이 바위를 깨 버려 황새가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렸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웃마을인 요곡에 백로 왜가리들이 도래한 곳이 있다 1636년경에 조형하가 설촌하였다고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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