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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행 안내

상해 항주 소주 기행

작성자lordinc|작성시간07.02.24|조회수223 목록 댓글 0
상해 항주 소주 기행

 
“ 상하이 南京路 ” ( 蘇州. 抗州. 상하이) 1840년 동서문명의 충돌로 남경조약이 이루어졌고 유럽의 열강들이 중국을 개방하여 상권을 확보하려던 문화 충돌의 시발지, 그 역사의 현장에서. 올 여름 피서를 보내기로 하였다. 계획한 열도여행은 아내의 휴가일 에 맞추었다. 여행코스는 중부 중국, 상하이에서 소주, 항주로 이어지는 나에겐 테마 투어였다. 팬더투어와 리치웨이 클럽이 공동 합작한 15명의 대원에 소속되었다. 마침내 짐을 부치고 출국 수속을 밟고 12시 55분 MU 5042 중국 동방항공기에 탑승하여 자리를 잡았다. 인천에서 상하이 까진 1080킬로미터, 비행기 탑승시간은 1시간 40분 소요, 인천 공항에서 30여분 대기 항로를 찾던 비행기는 마침내 이륙하여 푸른 하늘로 날아올랐다. 마침 걱정했던 비는 멎고 날씨는 쾌청, 역시 인천공항은 동북아 허부 공항답게 거대했다. 탑승구 50개. 아시아에선 일본의 하네다, 싱가포르 창희 , 상하이 포동이 경쟁력을 갖고 있지만 그 중에서 한국의 인천공항이 가장 크고 시설이 잘된 공항이었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기내식은 옛 구미를 되살려 돋구었다. 식사를끝내고 커피한잔을 마시니 상하이 포동 공항에 도착하였다. 상해 포동공항: 입국 수속을 마치고 출구로 나오자 우릴 반갑게 맞는 안내원이 있었다. 조선족 연변 청년이었다. (이름을 잊었음) 우린 그의 안내를 받고 움직여야 했다. 그런데 기다리기로 했던 김영민씨 아들 하진현 군이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30여분을 기다리다가 나타나지 않자 애를 태우던 어머닌 상하이 시내 홍구 비행장에서 만나기로 하고 우리끼리 출발을 하였다. 포동 공항 청사는 루프 기둥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었다. 시내에서 60 킬로미터 떨어진 거리였다. 비를 걱정했던 날씨는 폭염 (39.5 도 C )으로 숨이 턱턱 막혔다. 대기한 버스에 올라 시내로 향하는 차안에서 가이드는 상해의 역사에 관한 장황한 설명이 있었다. 포동 공항은 상해시를 흐르는 황포강의 동쪽에 바다를 매립하여 만든 땅에 세워진 공항인데 황포강의 동쪽이라고 해서 포동이라고 불렀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버스안에서 땀을 식히며 시내로 향했다. 상해는 대륙(남경)에서 바다로 나간다는 뜻이며 바다로 오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양자강 (장강)의 하구 주마르 평야에 위치한 인구 2,000만 명의 대 도시다. 일년 3모작을 하고 기후가 년평균 25시로 여름은 40도로 무덥고 습기가 많은 도시. 이 도시는 장강(양자강)을 끼고 강남, 강북으로 나누는데 강남 땅이다. 1840년 영국과 남경 조약으로 문을 열어 만국실크회의가 열려대륙으로 가는 실크로드를 만들었던 시발지. 실크를 독점하기 위해 중국인을 아편중독 환자로 만들려던 아큐전쟁 (아편전쟁)이 천진에서 일어나 이곳에서 마무리 지운 악몽의 역사를 치른 도시로 항상 중국문화와 유럽문화가 충돌한 신세계였던 것이다. 인구 2,000만 명 중 도시 중앙(상류층)에 사는 300만의 화교가 경제권을 장악하고 그 다음 블록에 외국자본가와 중산층이 살고 시가지밖에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산다. 1980년대에 등소평이 개방시켜 강택민과 주용기가 경제 개혁을 완성했는데 황포강의 동쪽에 경제 특구를 만들어 홍콩, 대만, 일본자본을 끓여들여 수정 자본 공산주의 정책을 성공시킨 드림의 땅이다. 등소평의 지휘로 강택민과 주용기시장이 완전 개방하여 공산주의 식 자본주의를 성공시킨 도시다. 개발 15년만에 남북 20킬로미터 동서 40킬로미터의 거대한 시장자유 상해시를 만들었고 시 전체가 고층 빌딩과 아파트 상가로 들어차 있었다. 지금도 한해에 300억불이란 외국 자본이 상해로 들어와서 개발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10명중 한 명이 13억 인구 중에 1억 인구가 중국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것인데 바로 이곳 상해가 중국 자본융통의 핵인 것이다. 중국은 남한의 99배의 영토를 가졌지만 40%가 사막이고 30%가 대고원 산악이며 30%가 대평원인데 이 평원에 북경, 상해, 홍콩(광주), 남경, 천진, 5대 도시가 전체 중국인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19세기 중국으로 밀려오는 서양의 문화는 바로 상해에서 엄청난 충돌을 일으켜 중화사상의 자만에 엄청난 대미지를 입혔던 것이다. 1911년 손문에 의한 신해혁명은 중국의 서구 문명유입이란 거사를 치렀고 서태후는 마침내 그 문화의 충돌에 희생당했고 이로 인해 중국의 자존심이 서양문화에 짓밟힌 치욕을 맛보았고 그 비극의 현장에 서태후는 살해되고 말았다. 시내로 접어들면서 모두 감탄사를 연발했다. 북경에 가서도 그랬지만 상해는 서울보다 더 활기 차다는 것을 느꼈다. 고속도로변에 자기부상열차 레일을 깔고 있음에 더 놀랐다. 가로수는 서울처럼 플라타너스, 사통팔달의 넓은 도로, 국토가 넓은 만큼 도로가 잘 되어 있었다. 상해에서 북경 까진 1880킬로미터로 인천 가는 거리보다 멀다. 고속열차로 2일 소요, 북경이 권력의 도시라며 상해는 황금(돈)의 도시였다. 중국은 전 인구 13억 중 52% 인 7억이 한족이고 48%는 55개 다민족 국가로 5개의 자치구를 둘 정도로 이민족이 많았다. 연변의 고려인은 중국에서 가장 잘사는 이민족이란다. 자식은 꼭 한 명만 낳게 하고 한 명만 국가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그 외 자식들은 호적에조차 올릴 수 없다. 이들 무 호적인 을 흑인 ( 무식인)이라고 부른다. 중국에 흑인이 1억이 훨씬 넘는다니 이 나라 통치의 어려움이 보인다. 그런데 돈 많은 자들은 다처를 거느리고 많은 아들을 두지만 돈으로 매수하여 호적을 갖는다니 그 부패상이 얼마나 가상한가. 장쩌민이 시장 때 이 도시를 개발하면서 거주자 가족 1인당 아파트 한 채를 주고 벌어먹게 했다는 것, 공산주의식 자본주의가 이채롭다. 그들은 개발 모델을 한국에서 찾았고 그래서 중국인이 가장 가보고 싶은 나라가 한국이란다. 상해는 여존남비 사상이 철저한 나라, 남자가 벌어 먹이며 직장에서 돌아와서도 아내를 모셔놓고 남자가 밥을 짖고 가정 일을 맡아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능력이 없으며 장가를 못 들기 때문에 아내를 여왕처럼 모셔야 도망을 안 간다는 것이다. 한번 도망가면 평생을 결혼생활을 못한다니.........남자가 바람 피며 직각 처벌, 여자는 관용이라니 여인천국이 아닌가. 한국남자들 행복한 줄 알라. 버스는 포동을 지나 절강성의 소주, 長江 (양자강) 로포 대교를 넘어 도심의 빌딩 숲으로 들어섰다. 장강의 하구엔 수많은 제철공장과 조선소가 줄비 했다. 로포대교에서 보는 장강공업단지의 모습은 미래의 중국을 보는 것 같아 겁이 났다. 대한민국상해임시 정부: 이곳이 내 테마여행의 본산이다. 첫 관광지인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1926-1931) 한말로 실망, 상해시 녹안구, 일본의 식민정책에 항거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청사가 있었던 곳은 상해에서 가장 빈곤한 거리였다. 버스에서 내려 거지 촌의 임시정부청사 간판을 보고 그만 눈물을 왈칵 쏟았다. 청사는 빈민가의 쓰러지는 판잣집 속에 있었다. 걸인들이 사는 곳이었다. 거리는 지저분하고 자동차 자전거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통행하는 무법천지였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인지 빈민가의 사람들은 윗통을 훨훨 벗고 있었다. 이 거리는 60년 전 상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는데 지금 이렇게 변한 것은 한국임시 정부청사 문화유물이 있기 때문에 개발이 제한되어 빈민가로 추락한 것은 바로 우리 임시정부 청사 때문이라고 주민들의 원성이 높다는 것이다. 빈민가의 무너지는 가옥이 즐비한 입구엔 여인들의 속옷 빨래가 얼기설기 걸려있었고 그 속옷을 밀치고 들어서는 우리들, 난 그만 화가 나서 속옷 걸린 풍물을 사진에 담았다. 그 걸보고 민망했던지 중국 아가씨가 픽 웃고 있었다. 이 청사는 1916년에 프랑스 주둔지를 빌어 세웠다는 것, 당시 임시정부는 3개였다. 한성 임시정부. 상해 임시정부, 나성 임시정부인데 1919년 에 통합하여 이곳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 2대 박은식, 3대 이상룡, 4대 홍진, 5대 김구, 6대 이동녕이 (1940) 역임했고 한인을 위한 인성학교를 주변에 두고 운영하였다는 것이다. 바로 이 인성학교 역사의 중국 통역 선생님 손숙과 우리정부대표 신규식과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길 쓰려고 왔던 것이다. 손숙은 광동에서 신해혁명으로 중국을 개화하려던 초대 중화민국 대통령인데 (결국은 원세계에게 정권을 찬탕당하고 일본으로 도망하여 최후를 맞음.) 신규식 열사가 그분과 신해혁명을 성공시켰고 그 사촌 누이동생이 임시정부 통역관이며 한국인 2세교육을 담당한 인성학교 선생님이셨다. 신규식과 손숙이 사랑에 빠져 낳은 딸이 상해의 어느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난 그분을 찾으려 왔던 것이다. (대강 거처만 알고 왔음 다음 기회에 루뽀 할 계획) 그러나 일본의 압살에 못 이겨 9번의 이주를 하였다. 상해(1919년). 항주(1932), 진강(1935), 장사(1937), 광동(1938), 유주, 호주, 치장(1939), 중경(1940)에서 해방을 맞은 것이다. 청사엔 역사 대통령의 유품과 유물이 초라하게 진열되어 있었고 중국인 안내원은 무성의하게 듣거나 말거나 혼자 지껄이고 다녔다. 아주 아주 무성의하게 녹음기처럼.......물론 일정 급의 봉급 조금 받고 수없이 밀려오는 한국 관광객을 맞기가 짜증스러웠던 것이다. 김구 선생님 데드마스크 앞에서 숙연해진 작가는 良心建國 이란 필사를 바라보며 잠시 사색에 잠긴다. 민족의 맥을 이어온 현장, 그러나 해방후 임시 정부는 귀국했으나 국민들은 이들을 외면했고 결국은 공산무력 전쟁에 휘말리고 말았던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거리엔 자전거 행렬이 이어졌다. 가이드는 중국의 교통수단은 자전거인데 한집에 자전거 2대 이상이 있다는 것, 그런데 대부분 낡은 자전거, 자전거 도둑이 많아서란다. 그렇지만 아들의 자전거만은 새것으로 사준다는 것 자본주의 물결이다. 거리에서 만나는 중국인들의 복장은 모두 걸인 꼴이다. 중국인들은 입는 것 (옷사치)엔 돈을 안 쓰지만 (문화가 그렇다) 먹는데는 많은 돈을 쓴다는 것. 한말로 주식비가 많은 건 엥겔계수 상 가난하고 무식한 국민의 표상이 아닌가. 그러나 입은 몰골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거지꼴을 한 사람들이라도 집에 가면 알부자란 것이다. 먹는 문화가 발달된 나라, 느릿느릿 하지만 생각은 깊은 사람들이다. 겉으로 보면 중국인들은 화를 안 낸다. 만만디란 말이 새삼스럽다. 자동차가 오면 그 자리에 서있으면 된다. 뛰다간 사고가 난다. 아무튼 뛰는 쪽이 사고를 내서 손해를 본다. 느린 것이 미덕이다. 군자 도에서 배인 몸짓인가. 어쩐지 마음이 시커멓게 보인다. 중국의 공무원은 모두 두둑이란다. 잘사는 사람은 모두 당원( 공무원)이다. 직위가 높을수록 부정부패를 당연시하고 규모도 크다. 그래서 모든 젊은이들은 공무원이 되려고 하지만 당원이 아니면 불가능하며 특히 한족 아닌 변방인 은 꿈같은 환상이다. 부패부정 정도가 당 권력의 순위라니 얼마나 공무원이 부패했나를 알 수 있다. 중국사회는 모두 돈이며 해결된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다. 중국인들은 돈을 버는데 수단을 안 가리며 오로지 돈을 벌려고 태어났다. 그들에게 다른 문화는 없다. 공무원 말기엔 엄청난 부정을 저질러 해외로 도망가도 국가는 허락한다. 그 돈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 자식들에게 축재의 돈을 양도하며 그 자식이 다시 본국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돈만 가지고 오면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정하여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지만 그 돈이 다시 화교 자본으로 들어오는 것을 우리 나라 졸부들은 배워야 한다. 묘한 논리다. 그래서 부정부패를 못하는 것이 병신이고 그것을 꼬집는 사람이나 문제삼는 공무원은 없다는 것이다. 능력이 있으면 해먹으란 말이다. 그래서 가장 잘 사는 층은 공무원이다. 중국엔 최고와 최하만 존재한다. 중산층이 없다. 강남 사람은 유하고 강북사람은 급하다. 싸움질을 하되 폭력이 없고 삿대질로 몇 날 며칠을 두고두고 싸운단다. 그래도 폭력은 없다. 남쪽 사람들은 싸움을 피하고 북쪽 사람은 싸움을 건다. 결국은 급한 북경 사람이 느린 상해 사람에게 지고 만다는 것이다. 상해는 해발 4미터의 낮은 대지의 평원이다. 동쪽은 대 평원이지만 서쪽은 계단식 산악으로 구성되고 북쪽은 사막이다. 등소평은 일 만년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되는 것은 오지의 땅에 거미줄 같은 길을 내서 중국을 하나되게 했다는 것이다. 고속도로, 10년 만에 전 중국이 도로 망으로 연결되는 기적을 만들었다. 임시정부 청사를 나와 소주로 행했다. 지상의 낙원 소주 : 소주는 상해에서 150킬로미터 떨어진 위치에 있는 고도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보이는 끝없이 펼쳐진 들판이 수로를 끼고 이어진다. 물과 육지가 반반으로 구성된 평야, 농촌이라지만 집들이 도시처럼 연결되어 있었다. 이곳의 집들은 성냥갑 같이 모두 판박이 틀로 지어져 있었다. 이층집들인데 낡고 초라했다. 그리고 거의 빈집들이었다. 도로와 수로는 같이 연결되어 사통팔달로 통한 것은 물의 낙원 도시였다. 강과 수로, 철탑, 농토, 담수, 농촌 들녘에 일하는 농부들은 옷을 벗고 햇볕에 서 있었다. 마침 짐승처럼......... 산이란 찾아볼 수 없는 끝없는 벌판, 해발 5미터 미만의 벌판이란다. 중국의 대평원은 우리 나라 5배 정도가 산이 없는 벌판이라니...... 마침내 소주에 도착하였다. 천하의 소주, 영웅 호걸이 웅비한 그 역사적인 고도에 서있는 느낌,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로다. 산이 없어 인공으로 지형을 만든 정원이 발달한 도시다. 오 나라 수도였고 ( 월나라 수도는 항주) 물의 도시였다. 吳越同舟 ( 원수인 오나라 인과 월나라 인이 한배에 탔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서로 반대쪽으로 가겠다고 싸우지 않겠는가 ) 그러나 그 뜻이 아닌 것이다. 오 나라와 월나라는 같은 평원의 물의 나라여서 어차피 한배를 탈 수 밖에 없다는 것 ( 배를 이용한 교통수단이기에) 그래서 어딜 가나 이 두나라 사람은 같은 배를 타고 다니기에 원수가 아니고 동족이라는 것, 정치가만 적일 뿐. ). 소주의 도시는 전형적인 고도 농촌형의 도시로 도시계획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도로가 없는 곳엔 수로가 발달하여 배가 오가면 교통을 분담하고 있었다. 무질서한 차와 사람과 자전거 통행은 이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먼저 가는 자가 임자이고 먼저가면 모두 양보를 한다. 서둘며 손해다. 퇴근 시간이라 거리엔 수많은 자전거 행렬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거리의 행인 옷차림과 몰골은 너무나 초라하고 궁색했다. 그러나 유유한 풍경엔 낭만이 서려 있었다. 거의 남자들은 윗통을 벗고 다닌다. 40도 온도에 견디는 피서법이리라. 도착 즉시 항홍 호텔에 짐을 풀었다. 7월 28일 7시기상 (한국시간 8시) 소주(蘇州) 관광 : 소주시는 실크의 도시다. 비단 장사 왕서방이란 말이 있다. 능글맞고 돈 많은 왕씨 성을 가진 비단장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비단을 살려고 서주를 왕복하는 행상이 많다는 말이다. 그만큼 비단은 돈이 되기에 불티나게 상인들이 서주로 왕래한다는 말. 소주는 산이 없는 도시어서 정원을 만들어 산수를 즐긴다. 고속도로 변엔 거의 뽕나무밭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실크의 고장임을 느끼게 한다. 남경수로, 경상대운하 (京上大運河)의 시발지다. 수나라 수양제는 소주에서 태어나 전국을 통일하고 북경을 장악하여 황제가 된 후 고구려를 넘본다. 그는 남쪽에서 북경으로 농산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교통수로를 만드는데 국력을 집중한다. 그 당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운하의 역사였다. 이 수로가 만들어짐으로 해서 남방의 농산물과 비단이 북경으로 유통되었고 남북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중화사상을 전 국토에 넓혔던 대동맥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소주발 북경 ' 경상대 운하' 이다. 길이가 장장 1793미터. 그러나 지금은 북경 쪽에 물이 없어 이용이 불가능 하지만 수나라 땐 수로교통의 요람이었다. 황제 수양제는 그 대역사를 성공하여 한족이 북쪽의 동의족을 공략하고 고구려 함락까지 침략했던 것이다. 그렇게 소주는 산이 없고 물이 많은 도시라서 정원문화가 발달되었다. 졸정원 에서 그 정취를 느껴볼 수 있다. 졸정원(拙庭園) : 이 정원은 송나라 때 왕거신이란 정치가가 파당싸움에서 숙청 당해 벼슬을 잃고 고향에 내려와서 18년 간 지은 정자다. 중국의 정원문화의 정수를 느끼게 한다. 졸정원이란 뜻은 다시는 졸장부가 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앓겠다는 뜻이다. 그는 평생 이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며 나라를 다스릴 후세 교육을 담담했다. 그런데 그가 이곳 명당에 정자를 세운 것은 후세 자손 중에서 황제가 출현한다는 점성술을 믿고서였다. 그래서 이곳에 자를 짖고 기원했는데, 그 정자가 황제의 왕궁과 버금가는 것이어서 그 자신이 황제 였다는 신의 노함으로 황제는커녕 그 자식이 망나니로 태어나서 그가 죽은 후 그 자식이 아비의 재산을 지키지 못하고 놀음으로 정원을 팔아버리는 졸 정객이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 졸자가 문제였다. 정치에 안나간다고 '졸' 자를 썼는데 정치 야망을 키웠으니........아들은 노름빚으로 정원을 4사람의 노름꾼에게 팔았고 4 주인들은 한 정원을 4등분하여 담을 쌓고 서로 좋은 정기를 받으려고 더좋은 정원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정원에 들어서자 풍광이 너무 아름다웠다. 사람과 자연 이 잘 어울러진 친화적인 풍수지리설에 의거하여 지은 것인데 이곳에 산의 솟음과 강의 흐름이 사람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게 꾸몄다. 정원엔 한참 연꽃이 만발하여 있었는데 회전하는 호수 물에 천년 자양분이 흐름 탓인가. 정자의 배치와 모양은 배, 용, 사람, 하늘, 강. 땅의 운기를 상징하며 호수의 흐름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조화를 이루어 지은 천외의 명당이었다. 정원석은 대호석이란 대리석으로 잘 짜 맞추어 자연석같이 형상을 꾸몄고 정자를 만든 건축술은 현대적 감각으로도 탄복할 정도로 우아한 그림 문향으로 창틀하나까지 섬세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정자는 동서남북으로 크게 4개가 우뚝했는데 그곳에서 보는 느낌이 정자마다 4계의 변화를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멀리 도시 중앙의 목조탑이 마치 정자 위에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중국의 4대 정원은 창랑정(滄浪停), 졸정원(拙政園), 쓰잔림(獅子林) 위쉬안림(留園) 으로 원앙재의 풍수지리를 조화시킨 인간과 자연의 친화적 조화를 강조한 세계적인 정원이란다. 소주의 명물은 다리, 물, 정원, 실크, 미인 (서씨 : 중국의 제일 가는 미인으로 소주에서 태어남) 인데 이 지방 사람들의 자존심이다. 다음 발길은 한산사로 옮기다. 寒山寺 : 1,500년전 한산( 습득)스님이 중국에 불교를 들어와 창건한 절이다. 해괴한 괴암들이 들어찬 절로 오나라 첫 도읍지. 중국공산당은 종교는 불허했으나 이곳의 불교 의식은 허락했음, 오나라 황제 합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절 입구 수로엔 무지개 다리로 연결되어 풍치가 너무 아름답다. 대웅전 지붕엔 서유기에 나오는 삼장법사가 원숭이와 저팔개와 동행한 석상이 이채롭다. 합려의 명을 기리는 4개의 종이 보명보탑과 더불어 웅장한 자태로 버티고 있었다. 보명보탑은 호구탑이라 부르는데 호구산에 (해발36미터) 세워진 탑이다. 이 호구탑 ( 보탑)은 동양의 피사의 사탑이라고 부르는데 이유는 피사의 사탑처럼 처음부터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것이다. 13층 8각형 47미터의 웅장한 탑으로 내부로는 상층까지 올라갈 수 있다. 이 탑엔 비밀 문이 있는데 그 문을 열며 탑이 무너진다는 것이다, 호구산은 서주에서 가장 높은 인공 산이며 오나라 합려 황제의 무덤이 있는 곳이다. 한산사에 들어서며 감감천 (호구산에 물을 공급한 개구리 우물) 시금석이란 잘라진 돌은 합려가 명검 ( 맥아검과 관장검) 을 시험한곳. (바위를 자른 흔적) 그 옆에 도진양의 무덤.( 왕이 총애를 거부한 미인으로 자기를 사랑하다 죽은 한 초동의 영혼을 그리며 수절했다 함). 곧 호구검지 (칼을 묻은 못)에 이룬다. 이곳은 바로 오나라 합려 왕의 무덤이 있다는 곳 (대명당), 무덤은 연못 밑에 도검과 같이 묻혔는데 이 명당의 힘이 오나라를 지킴. 월나라에서 이 무덤을 찾으려고 했으나 결국 못 찾고 월나라가 망함, 호구검지는 미인 서씨가 합려왕의 총애를 받으며 정사를 벌인쌍성교가 있고 그 다리 밑이 무덤이 됨, 이 무덤에서 나오는 힘이 오나라가 월나라에 망하게 한다는 것, 오나라는 바로 미인 서씨의 농염으로 지킨나라. 호구 산을 내려와 곧장 실크(잠방)공장으로 갔다. 잠방 (蠶房): 누에의 집에서 비단실을 뽑아내는 풍경은 소년시절 할머니가 실 뽑던 이래 처음이다. 비단실은 8개의 고추에서 나온 줄이 모여 한 개의 실로 합해 만들어지는 것이 재미있었다. 비단실 뽑는 아가씨들의 수줍은 웃음이 사랑스럽다. 한국말을 잘하는 공장장은 쌍둥이 누에 집은 실이 얽혀서 실로 뽑지 못해 이불솜으로 이용한다고 설명했다. 누에집 하나에서 방석크기의 실 솜이 나온다는 것이다. 비단의 견인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서양의 상인들은 중국(소주)의 비단을 구하려고 수주로 오려고 했지만 오지 못해 아편을 주사로 만들어 중국인을 중독자로 만들려다 천진에서전쟁이 발발했는데 이것이 아편전쟁이다. 잠방을 나와 날이 어둡기 전에 항주로 발길을 돌렸다. 상해에서 소주는 150 킬로미터 항주는 200킬로미터라 한다. 이곳은 중국에서 광동성 (홍콩) 다음으로 잘사는 절강성이다. 소주 항주는 실업자가 없는 도시란다. 절강성의 크기는 남한 면적크기다. 이곳에 100 여개의 도시가 있는데 상해, 항주, 소주가 가장 큰 도시다. 소주에서 끝없는 벌판을 달리는 버스 안에서 보는 농촌의 풍경은 산이 없는 대평원이라는 것이다. 특징은 고속도로는 역시 수많은 수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수로엔 짐을 실은 배가 줄을 지어 오르고 끝없이 이어지는 도로엔 화물차가 줄을 잇고 도로변엔 낡은 빈집 (이농하여 도시로 감)이 많았다. 낡은 집 옆에 새로 지은 집들은 보통 4층인데 한가족이 할아버지, 아버지, 자식, 손자. 4대가 같이 살게 지어져 있고 대가족이 사는 4층집 옥상엔 옥탑방 같은 유리 방이 있었다. 그곳이 조상의 묘소란 것이다. 그곳에 화장한 조상의 혼을 모신다. 즉 한집에 조상과 같이 사는 것이다, 소주 항주엔 산이 없기에 시신을 묻지 당이 없어 집안에 무덤을 만들어 모신다는 것이다, 먼길을 가는 이층 고속버스엔 지쳐 누운 사람의 모습이 짐짝 같다. 때론 이 버스는 짐승과 같이 탄다고 한다. 항주로 가는 길목의 도시 온주는 월나라 수도인데 구천이 세운 곳, 역사적인 도시일 뿐 아니라 중국에서 가장 부자가 사는 곳이란다.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인재가 많이 난 곳이 항주이고 중국을 지배한 황제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소주는 미인이 많은 도시 서씨, 소선, 양귀비가 여기서 났음, 항주는 춘추전국 시대의 많은 왕들이 난 곳이며 운하를 타고 배에서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300킬로 미터를 달려와 밤늦게 철도 호텔에 짐을 풀었다. 저녁을 마치고 항주의 야시장 구경을 나섬, 한산한 야경 걸인들만 외국인을 향해 덤비고 있었다. 7월 29일 항주(抗州) 관광 : 관광지는 영은사, 곡원풍하 (호수), 호포, 서호십경, 화홍관어, 미래세계공원, 고산, 유물원, 항주공원, 인데 우리 대원은 영은사. 서호. 정도로 구경을 압축했다. 서호 관광 길에 온도는 40도, 차에서 내리기가 힘들다. 에어컨의 위력을 실감하는 온도였다. 서호로 유람선을 타려 갔으나 손님이 적어서 배를 띄우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만디, 무책임한 중국인, 무식한 놈들, 예약을 했건 말건 내 이익이 없으며 투자를 안 한다는 원리다. 할 수 없이 오후에 다시 예약을 하고 영은사 관광에 나섰다. 영은사 (靈恩寺): 인도의 혜리 스님이 영취산 비류봉에서 득도하고 이곳에 와서 세운 절. 절 현판이 재미있다. 청나라 황제(광무제)가 이곳에서 불공을 두리다가 현판을 썼는데 무식한 황제가 영은사라고 쓴 글이 雲林情寺 로 표기한 것임, 이색적인 것은 사천왕상이 모두 불구라는 것, 이유는 왕을 저해한다고 사천왕까지 음모할지 모르니 모두 칼이나 무기를 들지 않게 만들어 세웠다. 영은사는 명나라 시조 주원장이 이곳에서 마당 중으로 청소년기 7년이란 세월을 보냈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가난한 고아의 한을 달래며 먹고살기 위해선 주인을 잘 모셔야 한다는 철리를 배워 황제가 되는 기반을 닦았던 것이다. 그는 영은사 불상의 위력으로 황제가 되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는 충직한 부하였다. 그는 전쟁에 나가서 한 장수를 끝까지 보필하여 따른 결과 배신하지 않는 부하라는 믿음으로 후계자가 되어 마침내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중국사에서 가장 무식한 마당중 출신 황제였다. 영은사는 엄청나게 큰절인데 사찰 내부는 중국의 절이 그렇듯이 불경이 기둥과 내벽에 필서 되어 있는데 이 절은 유난히 필서가 많았다. 이 절엔 가는 곳마다 불경 필서가 부착되어 있었다. 중국의 불교는 남방이 인도정통 불교이고 북방은 라마교 풍 불교다. 그런데 이곳은 정통 남방계로 이곳을 통하여 우리 나라 불교가 들어온 것이다. 사찰 내벽에 붙은 四字成語 불경구절을 새겨보며 천애애국, 대천세계, 성정유각, 상숙저보, 원등해직, 신통광파, 양지미교, 강복사마,사장엄성, 중난해적, 중선봉황, 사수성황, 보제위성, 법윤상전, 사수성행, 화엄세계 ,사중관정, 자반선도.........(한자표기 생략). 영은사는 불상의 사찰이었다. 웅장한 황금불상이 나그네의 감회를 탄복케 한다. 대웅보전의 불상 옆에 서있는 낯익은 불상이 있었다. 한국인의 표정을 한 승려, 그는 신라 선덕여왕의 아들 김교각의 스님의 불상이었다. 영원한 생을 염원한 선사는 등신불로 육체와 영혼의 하나임을 증명하였다. 이 고승의 흔적을 영은사에서 찾을 수가 있었으니 나의 테마여행은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오백나한상에서 더 깜짝 놀난 것은 세계적인 고승들이 (불교 최고의 고승) 오백 나한상으로 모여 있다는 것이다. 이 불가의 석학들 중에서 가장 덧보인 큰 불상의 고승은 바로 신라의 선사 김교각의 전각불상이었다. 오백나한상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감회가 무량했다. 한국이 낳은 불교계의 거인이었다. 그는 등신불이란 불가의 윤회설을 증명한 거인이었다. 영은사를 나와 우린 항주 식물원이 있는 산외산 채관(식당)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서호 용강 정강성의 유명한 용정차 밭으로 가다. 매산의 용정차 : 매산에 위치한 매가촌 용정차는 중국의 황제들이 즐기는 차인데 세계적인 상품이었다. 대련 터널을 지나 명전차와 장설차를 만드는 매산에 도착하였다. 매산의 차를 용정차라고 한다. 아쉬운 것은 차밭에 찻잎 따는 풍경은 보지 못했으나 차는 여인들이 따는데 절대 화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용정차 소개를 들으며 잠깐 다도를 배운다. 차는 세 번 읍하며 따른다. 그것은 마치 학이 긴 고개를 세 번 읊조린 모양인데 상대방에게 절로 친절을 느끼게 하는 예란다. 차는 80도시 물에 녹여 마신다. 매가촌 용정차 맛을 보고 다시 민물 진주가공공장으로 가다. 민물 진주는 한 몸에 암수를 이식시켜 유전자 변이로 암수한몸에서 내뿜는 이 물질이 굳어 진주가 된다는 것이다. 서호 (西湖):서호는 5개의 호수로 구분되어 있는데 내호 만 관광이 개방되었다. 이 호수는 남송때 소동파가 이곳 수령으로 와서 20년 동안 20만을 동원하여 만든 인공호수다. 전설엔 뱀이 용으로 승천하는 낙원이란다. 영파교를 지나 서호에 들어서니 우릴 맞는 반가운 시비가 있다. 소제(蘇提)....소동파 가 거닐며 시상을 떠올린 제방이란 곳에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호수제를 따라 들어서며 금난교, 망산교, 만제교, 동포교에서 고산이란 섬에 이룬다. 고산은 시인 백거의가 거닐던 시상의 거리인 백제(白提)가 있는 곳이다. 중국의 고대 시성들은 이곳에 한번은 와서 시작을 해야 그 명성을 날려진다는 거이다. 도관,(도교의 본산) 단설교(눈오는 다리) 항주사, 이곳은 청나라 마지막황제를 수렴청정한 서태후도 이곳에 와서 머물며 탄사를 보내며 지냈고 아들이 어머닐 위해 북경에 인공 서호를 만들었다는 효심이 이곳에서 우러난 곳이다. 그 후 서태후는 장개석군에 총살당해 이곳의 어느 호수변에 묻혔다는 것이다. 서호는 8개의 얼굴(달)을 볼 수 있는 천외의 명소였다. 애인의 눈에, 호수에, 호수에 비친 하늘에, 호수 밑에, 술잔에, 서산에, 등등....... 고산에서 바라보는 서호의 작은 섬중에서 삼담의 인월이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마침내 예약한 배로 서호를 유람하게 되었다. 밧데리 충전기로 가는 관광선 안엔 한국인과 중국인이 반반씩 탑승하고 있었다. 서호의 명소엔 장개석, 모택동, 별장이 들어서 있었고 고산의 백제로엔 류에류 란 채관(고대 식당, 한끼 식사가 몇백만원 짜리 ) 항주시 박물관, 서예관(고서예품 전시고관) 중산공원, 멀리 운봉석조의 경관이 좋은 운봉탑이 장엄한 자태로 버티고 서 있으며 호수동편엔 항주 번화가가 연결되어 있었다. 서호를 나와 상해로 향하는 길에 전단강의 6화탑으로 행로를 옮겼다. 6화탑: 8각13층 목각 탑이다. 탑 앞에 어린이가 강에 돌을 던지는 상이 있는데 전단 강이 범람하자 홍수를 막으려 갔다가 어부인 부모님이 죽자 어린이가 날이며 날마다 전단 강에 돌을 던져 홍수를 일으키는 용을 괴롭혔는데 화가난 용이 제발 아프니 돌을 던지지 말라며 강을 범람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자 아이는 돌던지는 것을 중단했다는 것 그 후 전단 강은 범람하지 않았다는 전설의 동자상 이 귀엽다., 전단 강을 두고 항주시(300만)와 소산시(200만)가 양편으로 갈라졌는데 이 두시가를합하여 항주시라고 한다. 항주관광을 마치고 차는 상해로 향하다. 다시 상해: 상해명물은 상해화차점(기차역), 인민광장, 포동대교, 서가정 상업성, 황포강의6개다리. 홍구국제공항, 포동공항, 남경로, 예원, 양자강 (장강)하구, 황포강 포동야경. 동방빌딩(466미터) 이 있다. 상해는 빌딩, 상가, 물, 사람의 도시다. 이 도시는 30년 만에 만들어진 것이다. 상해의 교통망은 사통팔달로 이어져 온 도시가 고속고가 도로이다. 전철과 택시버스 자전거가 같이 통행한다. 차선은 중앙차선이 좌회전 차선이다. 중국의 정치가들은 상해시를 지배하며 중국을 지배한다고 믿는다. 장개석, 등소평, 화국봉, 장쩌민. 주용기. 임표가 그렇다. 모두 이곳에서 정치기반을 닦은 자들이다. 택시 기본 요금은 10원, 3공리(3킬로미터) 2공리마다 2원씩 부가된다. 참고로 임표가 상해에 수도를 두고 양자강을 기점으로 중국을 이등분하려고 했다는 데 ( 상해를 수도로한 남중국) 그 음모가 사전에 모택동에게 발각되어 티벳으로 도망가는 비행기를 추격하여 죽였다는 것이다. 현재 강남에선 임표를 중화사상의 발상인 항주의 인물로 존경한다는 것이다. 원래중국은 강남사람들의 통치국가였다. 오직 원나라와 청나라만 북방 민족이 지배한 국가였다. 황포강의 야경 : 동방빌딩의 우렁찬 도약. 김정일이 3일간 이곳 상해에 머물며 천지 개벽이 일어난 땅이라고 찬사 했던 명소가 포동의 동방 빌딩 숲이다. 그는 이곳을 전세를 내어 3일을 묵으며 상해의 발전상에 귀기울였다. 동방빌딩을 주축으로 많은 초고층 빌딩들이 밀집해 있는 황포강의 야경은 명물이었다. 고수부지에 관망대를 마련한 강변에 수많은 내외국 관광객들이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어디를 가나 젊은이들은 이런 경치에 민감하다. 이야기만 하는 데이트 족들에게 한마디하고 싶다. 밤무드에 맞게 포옹하거나 키스를 하라고.........역시 도덕군자 다운 데이트였다. 남경대로 : 1840년부터 난징 조약으로 중국을 지배 할 외국자본들이 몰려 온 곳이다. 이곳을 통하여 남경로로 이어진 상권의 시작인데 아무튼 남경로는 서양의 중국공략의 전진 기지였다. 남경은 상해를 통하여 바다에 오른다. 상해는 남경의 배후도시였는데 남경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다. 오, 송, 양, 진, 명 의 도읍지였고 춘추전국 시대 땐 손권의 무대였으며 처음 동진의 원제가 도읍한 곳이다. 일본의 남경대학살로 (300만이 죽음) 중화사상의 발로인 곳이며 중국의 3대고도 (북경, 중경, 남경) 중 하나다. 아무튼 남경으로 가는 상해의 남경로는 비단의 집산지이며 아편의 밀반입 거래시장이었다. 오래된 상거리인 만큼 19세기 은행. 백화점, 상가들이 즐비했다.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듯 거리는 활기에 차있었다. 감히 중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자본주의 남새가 물씬 나는 환상적인 거리였다. 이곳의 젊은이들은 고급스럽고 깨끗한 옷을 입고 거릴 누비고 다녔다. 상해의 여자들은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예뻤다. 이유는 화장을 하지 않는다는 것( 중국 여인들의 피부는 화장이 안 받는다.) 그러나 자연의 윤기 나는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미인들이 거릴 활보하고 있었다. 상하이 여인들은 남방 중국 특유한 미색으로 얼굴이 작고 눈코 입이 한데 가깝게 모여 있는 마력이 덧보인다. 이들에 비하며 한국인들인 얼굴이 길다. 이 거리는 서양의 식민지 지배정책자금이 판을 치던 돈이 많은 은행가였다. 거리엔 세계의 상품이 모여 있었고 옷잘 입는 상해인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미녀가 많은 상해인, 이들이 중국을 먹여 살리는 부류의 도시다. 아무튼 젊은이들이 서울보다 옷을 더 잘입고 다녔다. 역시 돈이 많기 때문이다. 노신 공원 (홍구공원) : 일본의 대동아 공영의 정당성을 주장한 국민 궐기 대회가 열렸던 그 날 우리 나라 윤봉길 (매헌) 의사가 일본 장군들에게 포탄을 투철한 역사적인 공원에 발을 들어놓았다. 이 공원은 윤봉길 의사의 거사의 장소이지만 중국근대화의 기수인 노신 이 개혁개방을 촉구하며 신국가론을 역설하던 곳이기도 하다. 노신 공원에서 윤봉길 열사의 거룩한 나라사랑의 죽음에 애도를 고하고 마지막 관광지인 예원으로 행했다. 예원 : 원래 상해이원 (上海梨圓) 중국 전통 상가를 구경할 수 있는 곳이다. 절 같은 불은 목조 건물이 질서 있게 지어진 예원 거리는 중국의 옛 시장을 재연한 풍물거리로 전통 관광상품을 팔고 있었다. 보통 3층의 목조 건물로 이루어진 상가엔 환상적인 상품을 팔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의 모든 물건들이 가짜라는 것에 불쾌감을 자아낸다. 사기를 당하는 기분이 들어 구매할 생각을 잃게 했다. 예원을 끝으로 상하이 관광을 마치고 우린 귀국을 서둘러야 했다. 우린 포동공항으로 행로를 재촉했다. 상하이 관광을 종합하며 남경로의 환상, 황포강의 야경, 물의 도시 소주, 지상의 서호, 김교각의 등신불, 오월동주 소주, 영웅호걸과 지상의 낙원 항주, 경상대운하. 미인의 고장과 시성의 고장 소주.......... 고락을 같이한 동지들의 건강을 빌며 75세의 연만한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 않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동행한  할머님께 찬사를 보냅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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