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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하기

칸트 윤리학의 세 얼굴

작성자lordinc|작성시간07.08.29|조회수1,218 목록 댓글 0
 

칸트 윤리학의 세 얼굴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전체주의


김양현

전남대 철학과 교수



1. 머리말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칸트 윤리학은 지금까지 그 이해와 해석의 역사에서, 그리고 그 수용과 비판의 역사에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특징 지워져 왔다. ‘규범 윤리학’, ‘형식적 윤리학’, ‘형식주의 윤리학’, ‘당위 윤리학’, ‘의무 윤리학’, ‘의무론적 윤리학’, ‘심정 윤리학’, ‘동기주의 윤리학’, ‘엄숙주의 윤리학’ 혹은 ‘준칙 윤리학’ 등이 그것이다1). 최근에는 여기에다 ‘인간중심주의적 윤리학’(anthropozentrische Ethik)이라는 낯설은 명칭이 하나 더 덧붙여졌다. 곧, 윤리학의 현재적 담론에서 칸트 윤리학은 인간중심주의적 윤리학의 대표적인 패러다임[사고 틀]이라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중심주의적’이라는 말이나 ‘인간중심주의’라는 개념은 오늘날 일상적인 비판의 수준을 넘어 지극히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인간중심주의가 생태계 위기의 원인이라든가, 혹은 전통 윤리학의 인간중심주의적 토대로 말미암아 인간의 자의적인 자연이용이 무차별적으로 정당화된다는 등의 비난이 그 일례가 될 것이다. 물론 필자는 인간중심주의가 몰고 온 현실적인 부정성과 배타성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을 한 묶음으로 싸잡아 ‘인간중심주의가 환경파괴의 원인이다’라는 식의 비난도 올바른 태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비난은 경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에 강한 호소력을 갖는다. 그렇지만 인간중심주의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현실적인 부정성과 이론적인 긍정성, 곧 그것의 문제 해결능력을 동시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바꾸어 말해서 인간중심주의의 어떤 부분이 수정되고 포기되어야 하는가, 그것의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지점은 어디인가 등등 그에 대한 차분한 문제의식과 분석적인 접근이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자는 인간중심주의나 인간중심주의적 윤리학을 무조건 딛고 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현재 직면한 문제상황에서 새롭게 음미해야 할 개념으로 이해한다2).

이와 같은 입장을 견지해 온 필자는 이 글에서 오늘날 환경윤리학이 ‘인간중심주의적 윤리학’이라는 비난의 수사학 속에 갇아 둔 칸트의 윤리학을 밖으로 끌어내 올바로 이해해 보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글의 목적은 칸트 윤리학의 인간중심주의에 씌워진 일련의 비난과 오해3)를 계몽해 보려는 데에 있다고 하겠다. 이를 위해 필자는 칸트 윤리학에 대한 기존의 명칭이나 고정된 이해방식으로부터 가능한 자유로운 입장에서 칸트 윤리학의 용모와 성격을 규명해 볼 것이다. 우선은 낯설고 부분적으로 대립된 개념들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으나,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전체주의(Holismus)라는 통로를 통해 칸트 윤리학의 성격을 어림잡아 보려는 것이다. 칸트 윤리학의 성격 규명이라는 주된 목적과 아울러 이 글은 그것의 환경윤리학에로의 응용 가능성을, 달리 말해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윤리의 정초 가능성을 탐색해 보는 데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두고 있음을 밝힌다.4)

이 글의 내용적인 구도를 정리하면 이렇다. 칸트 윤리학의 도덕성의 정초 프래그램(이성), 도덕의 주체(인간), 그리고 도덕의 객체(자연)라는 분석적인 틀에 따라 논의가 전개될 것이다. 달리 말해서 칸트 윤리학에서의 이성‧인간‧자연의 역할 혹은 그 위상 등에 논의의 초점을 둔다. 도덕성의 정초 프로그램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칸트 윤리학은 이성중심주의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인 의무와 책임의 실제적인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내용적인 질문방향에서 보면, 그것은 강한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격체중심주의로 각인 되어 있다. 이와는 달리 인간 이외의 자연 존재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염두에 두면, 칸트의 윤리학은 이제까지의 이해와 달리 약한(계몽된) 인간중심주의거나 아니면 전체주의적인 색채를 갖는 것으로 해석된다. 칸트에게 도덕은 그 본질상 이성 능력을 소유한 ‘인간의 일’로서 도덕의 주체인 인간에게 한정되어 있지만, 도덕적인 의무와 책임의 범위는 인간 상호간의 행위의 영역인 인간 종(homo sapiens)에 한정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이외의 자연 대상까지를 폭넓게 포괄하고 있는 것이다.


2. 도덕성의 근거로서 이성과 이성중심주의


칸트 이전의 철학자들은 도덕성의 원천을 외적인 자연이나 공동체의 질서, 행복에의 희구, 신의 의지, 혹은 인간의 도덕감 등 여러 가지 심급(Instanz)에서 찾으려고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칸트의 입장은 이러한 심급들에 기대어서는 도덕의 객관적 타당성을 근거 지울 수 없다는 입장이다. 학문방법론이나 인식의 문제에서도 그렇지만, 도덕원리의 안전한 토대 닦기를 위해서도 칸트는 자기 이전의 철학자들과는 전적으로 다른,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으로 이해된다.5) 이러한 맥락에서 투겐트하트는 “도덕을 정초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핵심을 최초로 통찰한 철학자는 바로 칸트였다고 평가한다.6)

칸트 윤리학의 새로운 길에 대한 성격은 상이한 관점에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성을 근거 지우는 프로그램의 형식적인 관점에 주목해 보면, 칸트의 윤리학은 한마디로 이성중심주의(Ratiozentrik)를 표방한 것으로 해석된다. 형식적인 도덕 개념, 도덕적 행위의 원리와 기준을 정초 함에 있어서 이성 개념이 최고의 심급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이성중심주의이다. 그러나 도덕의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그것은 인간중심주의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형식적인 차원에서 이성에 의해 정초된 도덕은 내용적으로 항상 도덕의 주체인 인간에 다시 결합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임을 원하는(vernünftig sein wollen) 인간이 도덕의 실제적인 바탕을 이루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칸트에게 도덕적인 구속력은 형식적으로 순수한 실천 이성의 개념 속에, 곧 “이성의 사실”(Faktum der Vernunft)에 근거를 두지만, 내용적으로는 “의지의 자율”(Autonomie des Willens)에, 즉 인간의 자기 법칙부여에 그 기초를 두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별에 무리가 없다면, 우리는 칸트 윤리학의 모습을 이성중심주의와 인간중심주의로 번갈아 가며 묘사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먼저 그것의 이성중심적인 측면을 살펴보자.

도덕성의 정초 프로그램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칸트는 분명히 이성중심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도덕원리를 순수한 실천 이성의 개념 속에서 선험적으로 발견해야 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7)


누구든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어떤 법칙이 도덕적인 것이라면, 다시 말해서 그것이 구속력의 근거로서 타당하려면, 절대적인 필연성을 수반해야 한다. (‧‧‧) 구속력의 근거는 여기서 인간의 본성이나 아니면 인간이 처한 환경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고, 단지 순수 이성의 개념들 안에서 선험적(a priori)으로 찾아져야 한다. 단순한 경험의 원리들에 바탕을 둔 다른 모든 규정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떤 점에서 보아 보편적인 규정조차도 그것이 극히 일부분일지라도, 혹 그 동기에 있어서 경험적인 근거들에 의존하는 한, 그것들은 실천적인 규칙이라 할 수는 있을지는 모르나 결코 도덕적 법칙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GMS BA VIII).

  도덕법칙은 “경험적인 법칙이 아니라 순수한 이성의 유일한 사실이다”(KpV A 57).


이 인용문은 칸트의 논지가 어느 지점으로 귀결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도덕법칙은 경험 개념이나 원리들이 아닌, 순수한 이성 개념에 선험적(a priori)으로 근거해야 한다. 도덕법칙이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지려면 그것의 근거는 경험적이어서는 안되고, 선험적이어야 한다. 달리 말해서 이성이나 혹은 이성 개념이 도덕성의 정초를 위한 최고의, 그리고 최종적인 심급이다. 이러한 입장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은유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모든 도덕적인 개념들은 완전히 선험적으로 이성 안에 자신의 거처(Sitz)와 원천(Ursprung)을 가져야 한다”(GMS BA 34). ‘거처’나 ‘원천’과 같은 은유적 표현이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다른 의미가 아닐 것이다. 도덕적 개념들이 이성 안에서 선험적으로 발견되어야 하고, 또 순전히 이성적인 심사숙고를 바탕으로 근거 지워져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8)

도덕성을 정초 하는데 있어서 이성이 바로 최종 심급으로서 중심점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 자연이나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 그리고 신의 의지 등 다른 심급들은 도덕성의 근거로서 그 자격을 상실한다. 이 논지를 뒷받침하는 칸트의 언급은 이렇다. 철학은 “하늘이나 땅의 어떤 것에 매달리거나 의지해서” 도덕법칙을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법칙의 보유자로서 자신의 순수성을 입증해야 한다”(GMS BA 60). 세계나 자연은 말할 것도 없고, 신으로부터도 도덕적인 권위나 도덕성의 충분한 근거가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이 나에게 이런저런 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에서 그것에 상응하는 구속력이 생기지는 않는다.9) 잘라 말해서 칸트에게 도덕성은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학으로부터 자유롭게”(Anthropologiefreiheit)10), 그리고 신이나 전통의 권위와 무관하게, 단지 이성을 통해, 이성 개념만으로 근거 지워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칸트 윤리학은 이성 개념에 초점을 맞추어 도덕성을 정초한 전형적인 예로서 읽힌다.

칸트 윤리학의 이성중심주의적인 면모를 이제 도덕법칙의 타당성의 범위라는 관점에서 좀더 다루어 보자. 칸트가 생각한 도덕 법칙의 적용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에 대한 가능한 답을 ‘형식적인 차원’과 ‘실제적인 차원’으로 나누어 구해 보자. 칸트에게 도덕법칙의 형식적인 타당성의 범위를 결정하는 기준은 ‘이성적인 존재 일반’이라는 표현일 것이다.


만약 우리가 도덕성의 개념이 진리이고, 그것이 어떤 가능한 대상과의 관계 가능성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면, 도덕 법칙이 단지 인간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존재 일반에게 타당하고, 그리고 우연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지 예외적으로가 아니라 절대 필연적으로 타당해야 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GMS BA 28).

  도덕법칙은 인간에게만 제한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이성과 의지를 갖고 있는 모든 유한한 존재에로까지 나아간다. 아니 심지어는 최고의 지성이라 할 무한한 존재까지를 포함한다(KpV A 57).


칸트는 인간을 비롯하여 이성적이거나 이성적인 능력을 소유한 다른 존재들, 예를 들어 신, 천사, 외계인 등을 통 들어 도덕법칙의 통용 범위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물론 여기에 인간과 다른 이성적 존재들이 포함된 이론적 차원은 단순한 ‘가능성’의 차원으로 읽힌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논변의 핵심 점은 인간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있지 않고, 이성적인 존재인가 아닌가, 이성능력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라는 문제가 결정적인 기준이 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칸트에게 도덕법칙의 타당성의 영역은 모든 이성적인 존재 일반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칸트 윤리학은 인간중심주의를 넘어서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럼 칸트는 왜 도덕성의 통용범위를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이성적인 존재를 포괄한 것으로 파악했을까? 위의 인용문이 시사하고 있듯이, 그 답변은 이렇게 예상 가능하다. 도덕법칙은 예외 없이 통용되어야 하는데, 특히 법칙으로서 도덕은 보편타당하고 필연적으로 표상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도덕법칙이 어떤 조건하에서도 필연적으로 타당해야 한다면, 그것의 외연은 도덕적인 존재로 예상되는 가능한 모든 존재를 포괄할 수밖에 없다. 도덕법칙이 모든 이성적인 존재에 타당해야 한다는 이 추론은 사실 도덕법칙의 필연성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셈인데, 그것은 논리적인 귀결에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다. 도덕법칙은 그것이 인간의 이성이든지 아니면 초인간적인 이성이든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능력을 갖는 존재로 생각되는 외계인의 이성이든지 간에 모든 이성존재에 타당해야 한다는 칸트의 논변에서, 우리는 도덕이론을 가능한 객관적인 토대 위에 세우려고 한 칸트의 의도와 더불어 그 이론적인 세심함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대목은, 우리가 상식으로 아는 근세 철학의 이성주의(Rationalismus)와 접맥된 부분이다.

그러나 “도덕법칙은 순수한 이성의 유일한 사실이다”(KpV A 56)와 같은 칸트의 명제는 논리적 추론과 경험적 증명을 통해 입증될 성질은 물론 아니다. 이 점이 칸트 윤리학의 커다란 맹점으로 비판되어 왔지만, 도덕성의 최고의 보편적 원리 자체는 순수한 이성 개념 이외에 그 무엇으로부터도 연역될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 자체를 그대로 전제된 사실로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칸트가 말한 ‘이성의 사실’은 단순한 자연 존재와 달리 “이성적 존재는 법칙들의 표상에 따라, 즉 원리를 따라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또한 그럴 의지를 가지고 있다”(GMS BA 36)는 점을 전제한다는 사실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칸트는 논증의 무한 소급의 위험을 피한 것으로 간주된다.11)

이상의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 보자. 도덕 정초의 프로그램과 도덕법칙의 형식적인 타당성의 차원에서 칸트 윤리학은 이성 개념에 바탕을 둔, 이성적 존재 일반을 대상으로 한 이성주의 혹은 이성중심주의적 귀결을 갖는다. 이성은 도덕원리의 뿌리이고, 이성적 능력은 어떤 존재가 도덕의 주체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인 셈이다. 한마디로 이성은 칸트 윤리학에서 도덕성과 그 타당성의 최고의, 그리고 최종적인 심급으로 제시된 것이다.


3. 칸트 윤리학의 인간과 인간중심주의


칸트 윤리학의 실제적인 내용에 주목하면, 그 성격은 다소간 달리 이해된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논의를 시작해 보자. 칸트의 도덕 정초에서 회전축 역할을 하고 있는 이 이성은 누구의 이성인가? 신의 이성인가 인간의 이성인가, 아니면 내용 없는 공허한 개념으로서의 이성인가? 그것을 기독교적인 신의 세속화된 개념이나 공허한 개념으로 이해하여 그러한 이성은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것을 수사학적으로 “강조된 이성”(fettgedruckte Vernunft)12)으로 간주해야 하는가? 여기서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 대신에 필자는 자기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로서 이해하는 인간의 본성에 주목하면서 제기된 물음에 답해 본다. “남자인가 여자인가, 백인인가 흑인인가, 가난한 인간인가 부유한 인간인가라는 사실과 무관하게, 인간은 칸트가 말한 이성적 존재의 독보적인 후보자임을 스스로 입증한다. 이성적 존재를 위한 원리를 근거로 자신의 윤리학을 정초 함에 있어 칸트는 부적절한 요구를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이 도덕적 질문에 접하여 저절로 이해할 수 있는 바를 단지 개념화시킨 셈이다. 이성이라는 인간의 자기개념을 칸트가 ‘이념’이라고 특징 지우는 것을 보면, 칸트는 사태를 적중해서 파악한 것이다. (‧‧‧) 칸트는 단지 인간으로부터 이성적 존재라는 개념에 도달한 셈이다”.13) 이러한 해석의 정당한 근거를 우리는『실천이성비판』의 한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 이외의 다른 이성적 존재를 우리가 알고 있지 않다는 이 단순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이성적 존재들도 마치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처럼, 달리 말해서 마치 우리가 그들을 실재로 아는 것처럼 그러한 특성을 갖는다고 말할 권리가 있다(KpV A 25).


칸트는 여기서 우리 자신을 바탕으로 다른 이성적 존재들(천사, 신, 다른 행성의 거주자 등등)도 우리와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유추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언뜻 유비 추리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보이는 칸트의 이 진술을 그 출발점으로 되돌려 버리면, 즉 인간 이외에 다른 이성적 존재들도 우리와 유사한 능력을 가질 것이라는 가정을 제외하고 보면,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이성적인 존재는 인간뿐이라는 사실이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행위하고, 또 그렇게 행위 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를 인간과 동일시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하겠다.14) 물론 이 때의 이성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을 “이상화시킨 자기상”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규범적인 자기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데, 이 때 ‘규범적’이라는 말은, 설령 우리가 실제로는 결코 이성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이성적 존재로서 이해하며 행위 한다는 의미에서이다.15) 칸트가 말한 이성이 실제로는 인간의 이성을 뜻한다는 점을 귀결로 삼아 우리는 칸트 윤리학의 기본 성격을 “인간이성중심주의”(Anthropo-Ratiozentrik)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겠다. 즉, 도덕성의 정초와 그 형식적 타당성이라는 시각에서 이성중심주의로 특징 지워진 칸트의 윤리학은 사실 인간이성중심주의를 그 실제 내용으로 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칸트에게 도덕이 인간에 맞추어 재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도덕의 제 자리는 바로 인간이고, 가능한 존재라 할 초인간적인 이성적 존재가 아님은 분명하다. 


완전히 선한 의지도 역시 (선의) 객관적 법칙을 따를 것이나 그렇다고 하여 객관적인 법칙에 의해 합법칙적인 행위들에로 강요되는 것으로 생각되어 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완전히 선한 의지는 그 자체로 자신의 주관적 성질에 따라서, 선의 표상을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적인 의지에 대해서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성한 의지에 대해서는 어떠한 명령도 타당하지 않다. 거기에 당위를 들이대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의욕 그 자체가 이미 법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령들은 의욕 일반의 객관적인 법칙이 이러저러한 이성적인 존재, 예를 들어 인간의 의지의 주관적 불완전성에 대해 갖게 되는 관계만을 표현하는 형식일 뿐이다(GMS BA 38). 


초인간적인 이성적 존재는 도덕 법칙에 실재로는 종속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의욕과 당위의 일치라는 그 존재의 ‘개념적인’ 특성상, 그 존재들은 완전한 존재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도덕이 인간만의 일인 까닭은 한마디로 인간의 유한하고 불완전한 본성 때문에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적 명령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갖기 때문에 그렇다.16) 도덕법칙이 완전한 이성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감각적인 자연 존재자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존재자인 “이성적인 자연 존재로서의 인간”(MdS II A 2)을 향한다는 생각은 칸트 윤리학의 중요한 통찰이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의 의지가 도덕법칙에 의해 강제되어야 할 이유는 이렇다. 인간의 이성은 자기 힘으로 의지를 규정하는데 충분하지 않고, 또 그 의지는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어떤 충동들에 굴복한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인간의 의지가 자신의 본성 상 이성의 근거들을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기에 인간에게는 강제를 본질로 하는 도덕법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GMS BA 37f).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의 자연적 본성은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장애요소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강력히) 방해하는 힘”(MdS II A 2)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에 맞서 도덕적인 의무를 이행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력의 도움으로 “법칙이 무조건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바의 것을 할 수 있는 능력”(MdS II A 3)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자연적 본성에서 비롯된 심적인 저항이나 반발심을 누르고 도덕법칙을 따라야 하는 이론적 배경에는 “이성의 주체인 규범의 주체가 통찰한 의욕”17)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달리 말해서 왜 내가 도덕적으로 행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당성은 본래 내가 스스로 그것을 원한다는 통찰에 근거를 둔다고 할 것이다.18) 이러한 맥락에서 도덕의 주체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알고, 또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인격체 Person]이여야 한다(MdS II A 106)고 칸트는 주장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고, 책임질 능력이 없는 일군의 인간 집단도 도덕적 의무의 주체의 집단밖에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의 윤리학은 “인격체중심주의(Person-Zentrismus)”19)라고 불릴 수 있다.

여기서 ‘인격체로서 인간은 목적 그 자체이고, 사물로서 자연은 수단이다’는 칸트의 목적-수단의 정식을 음미해 보아야 할 것 같다. 필자가 보기에 목적-수단의 정식을 해석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의 해석에 따라 칸트의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오해’와 ‘이해’의 길이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이성이 없는 자연 존재들은] 단지 수단으로서 상대적 가치만을 갖고 있기에 사물이라 불린다. 이에 반해 이성적 존재들은 사람[인격체]이라 불린다. 왜냐하면 이성적 존재의 본성은 이성적 존재를 단순히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그것을 목적 그 자체로 특징 지우기 때문인데, 그런 한에서 모든 자의적인 것을 제한한다(GMS BA 65).

   [많은 표현들은] 도덕의 이념에 따라 대상들의 가치를 나타낸다. 도덕법칙은 성스러운(불가침의) 것이다. 인간은 충분할 정도로 성스러운 존재는 아니지만, 인간의 인간성은 성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전체 창조물 중에서 우리가 원하고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단순히 수단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인간만이, 그리고 모든 이성적 존재는 목적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 자율 능력으로 인해 성스러운 도덕법칙의 주체이다(KpV A 155f).


여기서 우리가 먼저 주목해야 될 사항은 ‘목적-수단’, ‘인간-물건’ 등의 가치 규정이 칸트의 도덕 개념과 깊은 관련을 갖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도덕적 이념에 따라’ 내려진 언표들이라는 사실이다. 도덕적인 관련성을 무시하고, ‘인간은 목적 그 자체이고 자연은 수단’이라는 칸트의 언명을 그 자체로 따로 떼어내 단편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종종 이 진술을 인간의 목적을 위해서는 자연을 ‘아무런 제약 없이’ 수단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식으로 첨예화시켜 이해해 왔다. 그러나 자연은 수단이지만, 인간은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칸트의 언명의 뒤에는 무엇보다도 그 배경이 되는 근세 윤리학의 인간평등주의가 숨겨져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즉 그것은 “무엇보다도 존엄과 권리의 평등, 자기존중의 조건을 해치는 도덕적인 미성숙과 특권에 대한 반대”20)의 사상이다. 칸트 윤리학의 이러한 사상적인 배경과 더불어 저 목적-수단의 정식이 이해되어야 함은 자명하다 하겠다.

목적-수단의 정식이 담고 있는 그 ‘일차적인’ 강조 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평등이 부각된 인간평등주의이다. 물론 부차적이긴 하지만, 거기에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차별성과 특수성이 드러나 있다는 점을 전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을 토대로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를 곧바로 자연파괴를 정당화해 주는 무차별적이고 전제적인 인간중심주의로 귀착시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필자는 칸트의 저 정식을 이렇게 이해한다. 인간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있는 조건은 다름이 아닌 이성적 존재인 인간의 도덕성이기 때문에, 자연은 수단으로 ‘간주해도’ 되지만, 인간은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자연을 수단으로 삼는데 있어서의 가능한 모든 자의성은 도덕성을 통해 여과되어야 한다. 칸트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이성적 존재인 인간이 목적 그 자체일 수 조건은 바로 도덕성이다(GMS BA 77). 칸트가 강조한 점은 바로 이 점이다. 

논의의 내용을 바꾸기에 앞서 이상의 내용을 간추려 정리해 보자. 이성은 도덕성의 정초에서 핵심 개념이며, 그 근거이다. 이성적인 능력은 도덕의 주체를 결정하는 기준이다. 이성적 존재 일반은 도덕의 형식적인 타당성의 범위를 나타내는 개념이다. 이성의 역할과 위상 등으로 미루어 칸트 윤리학의 성격은 이성중심주의로 해석된다. 그러나 정초 지워진 도덕의 내용과 그 실제적인 타당성의 차원에서 그 성격은 달리 규정된다. 칸트가 말한 이성은 자기 스스로를 이성적 존재로 이해하며 행위 하는 인간의 이성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실제로, 그리고 완전히 획득한다.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이성적인 존재는 인간뿐이라는 사실이 이러한 논지를 자연스럽게 뒷받침한다.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이성적 존재로 이해하며 행위 하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칸트 윤리학의 내용은 인간이성중심주의로 파악된다. 도덕은 초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라, 바로 이성적인 자연존재인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기에, 바로 인간에게서 도덕이 요구되고, 또 요구될 수 있고, 나아가 요구되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덕적 의무와 책임의 실제적 주체는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알고, 또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인격체]일 뿐이다. 바로 여기에 칸트 윤리학의 인간중심주의가, 아니 서양의 전통 윤리학 일반의 인간중심주의가 자리잡고 있는 셈이다. 


4. 칸트 윤리학에서 자연과 전체주의


이상의 논의에서 드러나듯이, 칸트 윤리학은 인간에게만 도덕적 가치와 위상을 인정하는 협소한 혹은 강한 인간중심주의로 이해될 충분한 소지를 갖고 있다. 이점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성적인 능력을 갖는 인간만이 도덕적인 의무와 권리를 소유하며, 또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는 식으로 좁게 이해된다면, 그 귀결은 분명하다. 이성 능력을 지닌 인간만이 도덕의 유일한 주체이며, 객체가 됨으로써 유아와 지능이 낮은 인간은 물론이고, 여타의 동물, 식물, 생명이 없는 자연 존재들은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된다.21) 이렇게 보면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의무나 책임을 이론적으로 근거 지우는 데에 취약하거나 그러한 여지 자체를 갖지 않는다. 즉,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는 다름 아닌 배타적 인간중심주의로 간주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해석은 도덕 주체, 의무의 주체, 책임의 주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지만, 오늘날 새롭게 대두한 생명의료의 문제나 환경문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칸트 비판자들과 견해를 달리 한다. 도덕이 인간의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도덕적인 고려(보호)의 대상은 인간에 한정되지 않으며, 또 이는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를 통해 정초 가능한 이야기이다. 인간이 아닌 자연에 대한 의무와 책임의 문제를 도덕의 주체와 도덕의 객체를 구별하여 푼다면 그렇다는 것이다.22)

칸트의 도덕공동체는 인격체인 인간만으로 협소하게 구성된 ‘귀족적’ 공동체가 아니다. 어린이처럼 이성적 능력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거나, 정신장애자들처럼 그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인간 존재, 그리고 아예 이성적 능력이 없는 자연 존재는 도덕공동체의 주체의 원에서 당연히 배제되어 있다. 왜냐하면 스스로를 도덕법칙에 종속시킬 수 있는 자만이, 곧 의무를 질 수 있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자만이 도덕적 권리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곧바로 도덕적인 객체의 원도 주체의 원과 똑같이 그렇게 협소하게 제한되어 있다거나, 또 그래야 된다는 사실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도덕공동체에 대한 확장된 개념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물론 확장된 도덕공동체 안에는 도덕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객체인 이성적인 능력을 소유한 존재들뿐만 아니라, 단지 도덕적 의무와 책임의 대상일 뿐인 이성이 없는 존재도 포함되어야 한다.

도덕적으로 의무를 행해야 할 주체는 인간뿐이지만, 도덕의 객체는 인간을 넘어서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에까지 그 범위가 뻗어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윤리학의 인간중심주의는 약한(혹은 계몽된) 인간중심주의나 전체주의로 읽혀 질 수 있다. 즉, 도덕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강한 인간중심주의 혹은 인격체중심주의로 이해되어야 겠지만, 도덕 객체의 관점에서, 도덕적인 책임의 대상에서 보면, 그것은 인간중심적이 아니라, 오히려 전체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다. 칸트 철학의 저변에 흐르는 인간중심주의의 특징은, 인간이 도덕성의 주체로서 세계와 전체 자연체계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이다. 칸트에게 인간의 자연이용의 정당성은 인간의 도덕성을 토대로 하며, 그 우월성과 특권은 특별권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들에 대한 특별한 의무와 책임의 강조라는 사실이다.23) 필자는 이와 같은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책임과 의무가 정초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칸트는 인간에 대한 의무와 인간 아닌 자연 대상들을 고려한 참작의 의무를 구별한다. 흔히 이를 ‘인간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와 ‘인간이 아닌 존재에 대한 간접적인 의무’로 나누어 이야기하기도 한다. 칸트는 인간 아닌 자연 대상들로 단순한 자연 존재(광물)나 생식을 위하여 유기적으로 조직된 자연 존재(식물), 감각과 자의적인 능력이 있는 자연 존재(동물)를 예로 들고 있다. 『도덕형이상학』의「덕론」제17절에서 칸트는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들을 고려한 참작의 의무를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MdS II A 107f) 그 내용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해석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는 직접적인 이용이나 이해관심과 무관하게 아름다운 자연경관이나 자연 대상들을 보호하고, 세심하게 돌보고, 파괴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칸트는 “파괴주의”를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다.24) 또한 칸트는 동물에 대한 의무를 상당히 자세하게 언급하는데, 그 요점은 불필요하게 동물을 학대하거나 동물에게 자의적인 고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동물을 난폭하고 무자비하게 다루는 일은 비도덕인 것으로 간주한 것이다. 칸트는 분명히 고통 없는 죽임과 종에 상응한 대우와 보호를 옹호하며, 무자비한 생체실험을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단순한 사변이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실험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아울러 칸트는 현세대가 미래세대를 위해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달리 말해서 미래 인류의 자연이용과 그들이 입게 될 피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지적한다. 미래세대에 대한 칸트의 도덕적인 책임의 사상은『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의 한 대목에 잘 드러나 있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 상 인류가 앞으로 걸어갈 아득한 미래세계 - 그것을 확실히 예상할 수만 있다면 - 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 (‧‧‧) 우리는 우리의 이성적인 주도와 행위를 통해 후손에게 주어질 행복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으므로, 그 같은 무관심은 있을 수 없다.”25) 이와 같은 언급을 토대로 강조될 점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도덕적 판단은 시간적으로 제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초역사적이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이상에서 필자는 오늘날 우리가 자연에 어떤 도덕적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라는 관점에서 칸트의 입장을 간단하지만 폭넓게 해석해 보았다. 이렇게 하여 얻은 필자의 귀결은 한마디로 이렇다. 칸트에게 인간의 도덕적인 고려와 책임의 범위는 인간에 한정되지 않고,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들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특히, 현재의 생태계의 위기에 비추어 이러한 확장된 해석은 동의의 차원을 넘어 필요한 전략적 해석이다. 문제는 칸트가 제시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책임의 근거이다. 왜냐하면 칸트는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에 대한 의무를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로 환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해서 칸트는 인간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의무가 있고, 인간 이외의 자연 존재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사실 동물이나 다른 자연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직접적인‧일차적인’ 의무인가 아니면 ‘도출된‧이차적인’ 의무인가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 여기서 자세한 논의를 전개할 수는 없다. 칸트에 가해진 비판의 요점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에 대한 의무가 왜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의무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 이러한 비판에는 칸트가 제시한 도덕의 본질과 의무의 설명방식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 ‘간접적’이라는 말마디는 단지 이 의무관계의 도덕 이론적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의무의 근거가 다분히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제시되지만, 예를 들어 동물에 대한 의무의 실제적인 수행은 인간의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라는 점을 고려하면, 직접적이니 간접적이니 하는 식의 구별은 큰 의미가 없다. 달리 말해서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의무를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로의 환원방식은 인간의 의무를 자신의 도덕성, 자유, 이성에 재귀적으로 결합시킨 칸트의 기본 입장에 기초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의무 수행의 실제적 주체가 누구냐’는 물음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다른 자연 존재에 대한 의무도 인간의 실제적인 의무인 것이다. 따라서 ‘자연에 대한 책임과 의무의 진정한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축으로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도덕적 지위는 달리 고려될 것이다.26)


5. 맺음말


지금까지 필자는 윤리학의 현대적 논의를 배경으로 삼아 칸트 윤리학의 성격을 규명해 보고, 이를 토대로 그것의 자연에 대한 책임윤리로의 정초 가능성을 탐색해 보려고 했다. 필자가 칸트 윤리학의 성격을 밝히는 데에 있어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그리고 전체주의라는 개념 틀을 다소 무리를 하면서까지 사용한 의도는, 칸트 윤리학은 ‘너무나 인간중심적이다’는 비난과 오해를 풀어 보는 데에 있었다. 달리 말해서 인간중심주의를 가운데에 두고 한쪽에서는 이성중심주의를, 다른 한쪽에서는 전체주의를 들이대면서 각각의 방향으로 인간중심주의를 완화‧약화시켜 해석해 보는 것이다. 이를 화살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① 이성중심주의 ← 인간중심주의 → 전체주의

② 이성중심주의 ← 인간중심주의

③ 인간중심주의 → 전체주의  


이 그림에서 ①은 칸트의 인간 중심주의가 너무 배타적이라는 비난이 ②와 ③의 방향으로 약화될 수 있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만이 도덕적 위상을 갖고, 그런 한에서 인간 종족에 속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도덕적인 고려의 결정적인 기준이 이라는 비난을 ②의 방향에서 무력화시킨다. 즉, 모든 인간이 아니라 단지 이성적인, 성숙한, 책임질 능력이 있는, 자율적인 인격체가 도덕 공동체의 주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도덕적인 의무와 책임에서의 불변의 심급을 분명히 한다. 이는 환경윤리학의 현재적 논의에서 종종 암묵적으로 전제된 도덕의 주체의 범위를 좀더 명확히 함으로써, 우리가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unhintergehbar) 지점이 어디인가 하는 경계를 그어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림 ③은 인격체중심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제한성과 그 배타성이 전체주의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도덕적인 능력이 있는 도덕의 주체와 그 능력이 없는 도덕의 객체라는 구별을 통해, 인간이 아닌 자연 존재들도 도덕공동체의 책임과 의무의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얻게 된다. 물론 각각의 존재들이 어떤 도덕적 위상을 갖느냐는 문제는, 한편으로는 그것들의 자연적인 속성에 달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련 존재가 현실적으로 아니면 잠재적으로 도덕적 주체인가 아니면 결코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는가, 그들이 어느 정도로 우리의 감정적인 경험의 대상인가 등에 달려 있다.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를 넓게 해석하면, 권리와 의무의 대칭적 관계뿐만 아니라, 도덕적 능력이 없는 존재나 자연 존재에 대한 비대칭적 의무가 존재한다는 점이 분명해 진다. 결과적으로 도덕공동체의 주체의 원 속에 포함된 인간들에게는 그 밖의 존재들, 곧 도덕공동체의 대상들 대한 특별한 의무와 책임이 부과되어 있다. 한마디로 넓게 그려진 도덕의 객체(의무의 대상)의 원 한 가운데에 (어떻게 보면 귀족적인) 도덕의 주체의 원이 자리잡고 있는 꼴이다.

칸트 윤리학을 전체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자만의 희망사항일 수 있을 것이다. 칸트 윤리학을 그 자체로 놓고 전체론으로 해석하는 데에는 일정한 무리가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필자는 그것의 현대적인 발전과 전개, 그리고 그 응용의 가능성의 차원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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