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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하기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에 나타난 인간중심주의

작성자lordinc|작성시간07.08.29|조회수5,902 목록 댓글 0
 

<논문 요약문>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에 나타난 인간중심주의

-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


Kants Anthropozentrik im teleologischen Naturverständnis der "Kritik der teleologischen Urteilskraft".


1. 주제 분류: 칸트의 형이상학(목적론), 자연철학, 환경윤리학


2. 주요어: 칸트의 목적론, 자연관,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


3. 요약문


오늘날 철학자들은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반성적으로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의 논의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 목적론적 자연관에 대한 복고적 논의를 배경으로 삼아, 필자는『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을 중심으로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에 나타난 인간중심주의의 본질을 밝혀 본다.

필자는 먼저 (1)목적론이 칸트철학내에서 어떤 위상과 기능을 가지고 있는가를 밝히고, (2)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외적인 합목적성과 내적인 합목적성의 고찰을 통해 드러내 보고, (3)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의 함의를 음미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4) 칸트의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는 다름이 아닌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임을 논증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칸트 비판자들과 달리 두 가지 결론을 이끌어 냈다. (1)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전제적이고 강한 인간중심주의가 아니라, 순화된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이다. 칸트가 자연적‧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인간,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 인간, 자연에 대한 책임의 주체인 인간을 바로 중심에 두기에,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는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인 것이다. (2)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자연은 인간의 이용대상임과 동시에 인간이 끊임없이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 인간의 자연이용의 행위나 자연과의 관계에서의 의식적 목적설정은 도덕적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런 조건에서만 인간의 자연이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에 나타난 인간중심주의1)

-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을 중심으로 -



김 양 현 (전남대 철학과)


1. 머리말


최근 철학자들은 자연문제를 반성적으로 조망하고, 이론적으로 새롭게 정립하려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자연문제가 전통적으로 철학의 중요한 반성의 대상이었다는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문제에 대한 철학적 관심의 동인이나 핵심적인 질문내용을 비교해 보면, 최근의 철학적 논의는 전통 철학의 접근과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대체로 전통 철학이 초역사적인 관점에서 자연문제를 추상적으로 다루었다면, 오늘날의 자연문제는 환경파괴와 생태계의 위기라는 역사적이고 구체적인 현실과 직접적인 관련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전통적 자연철학의 핵심질문이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곧 자연 자체(Natur an sich)에 대한 본질적인 물음이었다면, 현재는 파괴된 자연, 곧 환경으로서의 자연, 또는 이에 대립된 아직 손상되지 않은 원형으로서의 자연이 문제의 대상이 된다. 인간의 행위를 가늠하는 척도로서의 자연이 철학적인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과 자연의 실천적 관계, 자연에 대한 혹은 자연속에서의 인간 행위의 문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문제 등이 철학적 반성의 중요한 대상이 된 것이다.1)

이 글은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반성적으로 새롭게 정립하기 위한 최근의 철학적 논의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다. 자연관의 재정립이라는 최근의 논의에서 특히 필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목적론적 자연관’에 대한 복고적 논의이다.2) 한스 요나스는 자신의 저서 『책임의 원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 객관적 목적론을 부활시켜 그것을 토대로 과학기술 문명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윤리학’을 정초하려고 시도한다. 요나스는 인간과 자연의 올바른 관계를 다름이 아닌 객관적 목적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3) 이와 달리 요나스의 ‘전근대적인(vormodern)’ 자연관으로의 복귀를 비판하고 나선 로타 쉐퍼는 칸트의 주관적 목적론을 새롭게 해석하여 인간과 자연의 바람직한 관계와 자연이용의 도덕적 통제원리를 제시하고자 한다.4) 쉐퍼의 기본입장을 따르고 있는 필자는 이 글에서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이 함축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의 본질과 그 성격을 밝혀 보려고 한다.

잘 알려진 것처럼, 칸트는 그의『판단력비판』5) 제 2부인 「목적론적 판단력비판」6)에서 목적론적 자연관에 대해 비교적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은 우리가 그것을 칸트 비판철학의 “네 번째 비판”7) 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칸트철학내에서 독자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즉, 칸트는 「목적론적 판단력 비판」에서 목적론의 원리와 그 사용에 대한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여기서 필자는 목적론적 원리에 의해 파악된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을 환경철학의 논의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마디인 ‘인간중심주의’로 한번 묶어서 고찰해 보려고 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오늘날 환경철학이 비판의 수사학 속에 갇아 둔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를 밖으로 끌어내 올바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아래에서 우리는 먼저 (2) 목적론이 칸트철학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피고, (3) 인간과 자연의 목적론적 관계를 외적인 합목적성과 내적인 합목적성의 고찰을 통해 드러내 보고, (4) 목적론적 자연관의 인간중심주의적 함의를 음미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5) 칸트의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는 다름이 아닌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임을 살펴 볼 것이다.


2. 칸트 목적론의 기능과 위상


목적론 혹은 목적론적 사고방식8)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오랫동안 서양의 정신세계를 지배한 사고틀[패러다임]이었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와서 목적론적 사고방식은 베이컨, 홉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들의 철학과 갈릴레이, 뉴톤의 자연과학적 성과에 의해 학문적 설명원리나 사고방식으로서의 자신의 권위를 상실하였다. 왜냐하면 인과율에 기초한 기계론적 설명방식이 목적론의 자리를 대신하였기 때문이다.9) 이러한 시대 상황속에서 칸트는 목적론에 대해 자못 상반되게 비치는 두 가지 입장을 취한 것으로 보여진다.

하나의 입장은『순수이성 비판』의 학문적 방법론과 관계되는데, 목적론은 과학적으로 정당화 될 수 없고, 자연 대상들의 설명원리로서도 적당하지 않다는 생각이다.10) 인과기계론적 설명방식만이 유일한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이다. 대상의 경험과학적 인식이라는 점에서 보면, 칸트는 목적론을 철저히 배격했었다고 볼 수 있다. 달리 말해서 칸트는 “자연과학적 합리주의와 논리적 합리성에 따라”11) 자연을 파악한 것이다.

다른 입장은 칸트가『순수이성비판』의「초월적 변증론」과「초월적 방법론」에서도 그렇지만, 자신의 주요 저작들에서 목적론적 사고원리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회페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정리해 준다. 목적론적 원리는


『순수이성비판』에서는 규제적 이념으로서 절대적으로 완전한 인식이라는 이성의 목적을 떠맡고 있다.『실천이성비판』에서는 행복할 가치와 행복의 통일이라는 목적론적 이념이 요청이론의 바탕이 된다. 법철학과 역사철학에서 칸트는 영원한 평화를 역사의 궁극적 목적(“의미”)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칸트 철학에서 목적론적 사고는『판단력비판』에서 최고 정점에 도달한다.12)


한마디로 말하자면, 칸트는 인과기계론과 나란히 또 하나의 원리로서 목적론을 “강조점을 달리 하면서(mit veränderter Akzentsetzung)”13) 학문의 영역에 수용하고 있는 셈이다. 목적론 혹은 목적론적 사고원리가 칸트 철학내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면, 그것은 어떤 철학적 위상과 기능을 갖고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체계기능(Systemfunktion)”과 “사태분석(Sachanalyse)”14)이란 두 마디의 표현을 가지고 어림잡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로 목적론 혹은 목적론적 사고원리가 체계기능을 갖는다는 의미는 미적 판단력과 목적론적 판단력으로 구분되는 반성적 판단력이 칸트 철학의 체계적 매개기능을 떠 맏고 있다는 말이다. 칸트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판단력비판』은 “철학의 두 부분을 하나의 전체”(B XX)로 묶는 역할을 한다. 다시 말해서 지성과 이성의 매개자인 반성적 판단력의 작용을 통해 자연과 자유, 감각계와 예지계, 이론이성과 실천이성, 이론철학과 실천철학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반성적 판단력15)으로서 목적론적 판단력은 칸트 철학체계내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는 체계내적인 통일성의 요구를 반영한 결과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내재적인 매개장치로서의 체계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칸트의 목적론적 사고원리는 체계적 매개기능 이외에 발견술적‧사태분석적인 기능(heuristische, sachanalytische Funktion)을 갖고 있다. 달리 표현하면 목적론적 사고원리는 인과기계론적 사고원리를 보완하고 보충하는 역할을 한다. 칸트 당시의 과학자들은 인과기계론적 설명방식이 ‘유기체’나 ‘자연의 통일성’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데에는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적절한 원리도 아니라고 본 것 같다.16) 그래서 그들은 목적론적 논증이나 그것의 기초 개념인 목적개념에 인과법칙에 못지 않는 중요한 이론적 자리를 내어 주었다. 물론 이러한 이론적 양보의 배경에는 “유기체(Organismus)는 기계적 조직체(Mechanismus)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구별된다”17)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자연과학의 발전수준에 비추어 본다면, 칸트가 목적론적 사고원리를 수용한 것은, “그 시대의 문제의식”에 맞아떨어진 결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달리 말하자면, “인과기계론적 고찰방식을 학문의 근본 원리로 적극 긍정하긴 했지만, 어떤 특정 대상의 이론적 설명에 있어서 인과기계론이 갖는 일정한 한계를 알아차린”18) 당시 학문의 이론적 추이를 따른 결과였다고도 하겠다.

인과기계론을 보완하는 원리로서의 목적론의 위상과 기능을 좀 더 고찰해 보자. 칸트는「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의 여러 곳에서 인과기계론적 설명방식이 유기체의 인식을 위해서 충분하지도 적절하지도 않는 원리라고 지적하고 있다.『목적론적 판단력비판』의 두 대목을 인용해 보자.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새의 몸의 구조, 곧 뼈속이 비어있음, 운동을 위한 날개의 위치, 방향을 잡기 위한 꼬리의 위치 등을 열거하면, 우리는 곧바로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새가 가지고 있는) 이 모든 것은, 특수한 종류의 인과율이라 할 목적의 인과율(목적인적 결합 nexus finalis)의 도움을 빌리지 않고, 단지 자연의 동력인적 결합(nexus effectivus)에 의해서만 판단한다면, 지극히 우연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연을 단순한 기계적 조직으로만 고찰하면, 자연은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형성되었을 수가 있었을 것이다. (B 269)

아주 분명한 사실은, 자연의 단순한 기계론적 원리들만을 따르면, 유기적 존재들과 그것들의 내적 가능성을 충분히 알 수 없고, 또 그것들을 거의 다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음과 같이 말 할 수 있을 만큼 확실하다. 언젠가 뉴톤과 같은 사람이 또 나타나 풀줄기 하나의 생성까지도 의도나 목적과는 무관한 (인과기계적) 자연법칙들로 설명해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든가 아니면 희망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불합리한 일인가. (B 337 이하)


그것이 새이든지 한줄기 풀이든지 유기적 자연의 대상들이면, 그것들의 존재, 곧 그 존재의 생성과 가능성은 인과기계론적 원리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칸트의 생각이다. 인간의 인식능력의 본성으로 보아서도, 유기체의 독특한 성질이나 형태를 고려해서도, 유기체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석연치 않는 대목이 많다는 것이다. 또 한번 천재 뉴톤같은 사람이 태어난다해도 인과기계론적 자연법칙만으로는 유기체를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고 칸트는 말하고 있다. 칸트는 인과기계론적 사고원리가 불충분하다는 통찰을 통해 유기체를 인식하는 데에 적절한 방법이 발견되어야 하고, 그것의 타당성이 철학적으로 근거지워져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마디로 발견술적이고 사태분석적인 원리로서 목적론적 원리는 유기적 자연 대상들을 위해서, 또 전체 자연을 체계적이고 세부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19)

그러나 칸트에게 문제된 것은, 유기체 자체의 고유한 특성이 무엇이냐가 아니고, 유기체에 대한 우리 인간의 설명방식이 문제였던 것이다.20) 달리 말해서 유기체 일반의 인식이 어떻게 가능한가, 유기체를 인식하기 위한 대안적인 사고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떤 학문적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등이 칸트가 염두에 둔 사항이라 할 것이다.

목적론적 사고원리가 인과기계론의 대안적인 원리로서 갖고 있는 학문적 위상과 기능을 우리는 다음의 두 인용문을 통해 정리해 볼 수 있겠다.


목적론적 판단이 자연연구에 적용되는 것은 적어도 개연적으로는 정당하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자연을 목적의 인과성에 의해 유추하여 그것을 관찰과 탐구의 원리들 속에 끌어넣기 위해서 일 뿐이지, 부당하게 자연을 목적의 인과성에 따라 설명하려고 하는 데에 있지 않다. 따라서 목적론적 판단은 반성적 판단력에 속하지 규정적 판단력에 속하지 않는다. 목적에 따르는 자연의 형식들이나 결합들의 개념은, 자연의 단순한 기계적 조직에 의한 인과성의 법칙들이 충분한 설명력을 갖지 못한 곳에서, 자연 현상들을 규칙하에서 파악하려는 최소한 또 하나의 원리이다. (B 269)

다음 사실은 자명하다. 목적론적 원리는 규정적 판단력을 위한 원리가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을 위한 원리이다. 그것은 규제적이지 구성적이지 않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주어져 있는 규정 근거와 관련된 자연물들을 하나의 새로운 법칙적인 질서에 따라 고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는다. 그리고 자연학을 다른 원리, 곧 목적원인의 원리에 따라서, 그렇지만 그것의 인과성의 기계론을 손상하지 않고서, 확장하는 실마리를 얻는다. (B 301)


칸트에 따르면 목적론적 원리는 우선 규정적 판단력이 아니라, 반성적 판단력이라는 점이 분명히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반성적 판단력으로서 목적론적 원리는 자연을 설명하고, 규정하는 원리가 아니라, 자연을 관찰하고 탐구하는 반성의 원리이다. 이 점을 칸트는 분명히 하고 있다. 목적론적 원리는 자연이 인과기계론적 원리에 의해 남김없이 설명되지 않는 곳에서, 곧 자연의 유기적 대상이 문제될 때, 보완‧보충의 원리로서 작용한다. 수학이나 물리학적인 학적 엄밀성을 가지고서는 유기체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았기에, 대안의 사고원리, 대안의 고찰방식이 필요한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지성의 범주적 사유틀에만 의지해서는 유기적 자연 대상들을 신뢰할만 정도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유기체 일반을 사유를 통해 파악”하는 “보완의 사고장치(Zusatz-Denkmittel)”21)로서 목적론적 사고원리가 필요한 것이다. 칸트는 목적론적 사고원리의 사용을 유기적 생명체에 대한 반성과 자연의 통일적인 상을 파악하는 데에 분명히 한정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 목적론이 아니라, 주관적 목적론[혹은 Als-ob-Teleologie], 인간의 인식능력의 본성에 어울리는 목적론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다시 정리해 본다면, 칸트의 목적론은 “보편적 목적론과 보편적 기계론 사이”에 놓여 있는 “비판적 목적론”(kritische Teleologie)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겠다. 비판적 목적론은22) 다름이 아니라, “생명체도 오로지 원인 진술을 통해 완전히 파악될 수 있다고 본 보편적 기계론을 배척”하고, 또 “전자연이 합목적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고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보편적 목적론도 마찬가지로 배척한다”는 의미에서의 목적론이다.23)


3. 자연의 목적론적 이해


칸트에게 목적론적 원리를 이루고 있는 중심개념은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이다. 그런데『판단력비판』에는 여러 종류의 합목적성 개념들이 등장한다. 그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특성과 인식대상에 따라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 진다. 칸트는 미적 판단력의 핵심개념인 주관적 합목적성24)과 목적론적 판단력의 핵심개념인 객관적 합목적성을 구별하고 있다. 객관적 합목적성은 다시 객관적-형식적 합목적성25)과 객관적-질료적 합목적성으로 구별된다. 칸트는 객관적-질료적 합목적성을 다시 외적인 합목적성과 내적인 합목적성으로 구별한다. 칸트가 실재적 혹은 경험적 합목적성이라고 달리 표현하기도 한 객관적-질료적 합목적성은 자연대상과 직접 관계된다. 외적인 합목적성과 내적인 합목적성은 한마디로 다양한 자연 대상들을 판단하는 하나의 질서도식(Ordnungsschema)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에서 우리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서 먼저 내적인 합목적성을 간단하게 살펴 볼 것이다. 그리고나서 자연 사물들 사이의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정식화되는 외적인 합목적성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3.1 자연의 내적인 합목적성


자연의 내적인 합목적성은, 한 자연물 그 자체가 자신의 존재목적에 부합한다는 의미에서의 합목적성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자연물이 다른 가능한 자연 존재자의 사용을 위한 재료나 수단이 된다는 상대적인 의미에서의 합목적성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나무(결과)를 직접적인 나무의 산출물(나무 기술의 생산물), 곧 목적으로 상정함으로써,26) 나무의 내적 합목적성이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사물 자체의 합목적성 이념의 표현”27) 용어인 내적인 합목적성(innere Zweckmäßigkeit)이라는 말과 자연목적(Naturzweck)이라는 말을 별 구별없이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고 있다. 자연목적이라는 용어는, 사물의 생성의 관점에서 자연 사물들이 목적원인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부각한 표현이다. 이에 반해 내적 합목적성이란 말은, 이 말의 일상적인 사용과 칸트 자신이 사물의 외적인 합목적성이라는 이념의 분석에서 사용한 말인 ‘합목적적’과 연관지워 생각될 수 있는 데, 이것을 칸트는 주로 자기보존이라는 생명체의 합목적적인 조직을 주목하여 사용한다.28) 내적인 합목적성의 개념은 “한 대상의 현실성 자체가 목적이냐 아니냐 하는 물음과 무관하게 한 대상이 갖고 있는 가능성”(B 380)과 관련되는 것이다. 내적인 합목적성은 목적에 따라 가능한 존재로 있는 사물들의 내적인 성질이다.

『판단력비판』§64에서 칸트는 자연목적이라는 개념을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 사물이 스스로 (비록 이중적인 의미에서이지만) 원인이고 결과이면, 이 사물은 자연목적으로 존재한다.” (B 286) 이 말은 결과에 항상 원인이 앞선다는 인과율의 일반적인 해석에 비추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유기적 존재의 원형으로 칸트가 들고 있는 나무의 예를 여기서 잠시 살펴 본다면, 자연목적에 대한 칸트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B 286이하 참조)

(1) 한 그루의 나무는 자연법칙에 따라 다른 나무를 산출한다. 그 나무는 유(Gattung)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자신의 원인이고 결과인데, 이는 자신의 유를 계속적인 재생산 과정을 통해 산출해 나가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무는 유적 성질에 따라 자기 자신을 산출하면서 유로 존재한다. (2) 그런데 나무는 성장하고 살아 있는 동안에 또한 개체로서 자기 자신을 산출하는 것이다. 나무의 개체로서의 성장은 기계적 법칙에 따른 양적 증대와 구별되며, 일종의 생식(Zeugung)과 같은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공급된 물질을 나무는 자연의 기계적 조직이 주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질로 바꾸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무는 분해하고 형성하는 독창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3) 나무의 한 부분의 유지는 다른 부분의 유지에 의존해 있고, 또 나무의 부분들이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나무의 한 부분은 자기 자신을 산출한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유기적 존재의 내적인 결합과 분리의 과정은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서 이해될 수 있다. 예컨데 나무의 잎들은 나무의 산물이지만, 나무를 보존하고 있는 부분들인 것이다. 유기체의 부분과 전체는 이렇듯 상호 의존해 있고, 또 자기를 스스로 조절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유기체의 생성과 번식의 자기조절 능력을 칸트는 “번식하고 형성하는 힘(eine fortpflanzende bildende Kraft)”이란 말로 특징지우고 있다. (B 293) 나무의 예가 보여주듯이 내적인 합목적성의 의미는 유기적 생명체가 그 자체로 원인이고 결과라는 사실에 있다. 달리 말하자면 결과인 나무는 자신의 직접적인 기술의 산물(Kunstprodukt)인 나무로서 간주되는 데에, 자연의 내적인 합목적성이 이야기되는 것이다. 나아가 유기적 생명체가 복합적인 구조로 되어 있고, 스스로 생식하고 조절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의 전체와 부분을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서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자연의 유기적 산물은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목적이면서 교대로 또 수단이 되는 것이다.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어떤 것도 쓸데없이, 아무런 목적없이 존재하지 않고, 또 거기에는 맹목적인 기계적 조직으로 환원할 수 있는 것도 없다.” (B 295 이하) 이 원리를 칸트는 “유기적 존재자의 내적 합목적성을 판정하는 준칙”(B 296)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러한 판정의 원리는 사물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판정자의 이념속에만 있는 선험적이고 규제적인 원리이다.


3.2 자연의 외적인 합목적성


내적 합목적성이 자연의 유기적 존재 자체와 관련을 갖는다면, 외적 합목적성은 “결과가 다른 원인들의 합목적적 사용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는 경우에”(B 279), 혹은 “자연의 한 사물이 다른 사물에 대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 이용되는 경우”(B 379)에 생각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합목적성은 어떤 것을 다른 어떤 것의 합목적적 사용을 위한 수단으로 봄으로써 생긴다. 칸트에 따르면 외적인 합목적성은 자연이 “인간을 위한 유용성(Nutzbarkeit für den Menschen)”이거나 아니면 자연물들이 “각각의 다른 피조물을 위한 유익성(Zuträglichkeit für jedes andere Geschöpf)” (B 280)일 때 이야기될 수 있다.

칸트는 어떤 자연물이 (목적으로서의) 다른 자연물을 위해 수단으로서의 유익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가문비 나무는 번식하기에 모래땅 보다 더 좋은 땅이 없다. 태고적에 바다는, 그것의 접경지대가 육지가 되기 전에, 독일의 북부 지방에 엄청난 모래사장을 남겼다. 그 결과 보통 다른 것의 경작을 위해 아무쓸모가 없는 이 땅에는 광활한 가문비 나무의 살림이 형성될 수 있었다. (‧‧‧‧‧‧) 분명한 것은, 이 가문비 나무의 살림을 자연의 목적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저 모래도 역시 목적으로 - 이 목적에 대해서 태고의 바다와 그것의 모래사장의 형성은 수단으로 -, 그러나 다만 상대적인 목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소, 양, 말 등이 이 세상에 존재했어야 한다면, 지구상에 풀이 있지 않으면 안되었고, 낙타의 번식을 위해서는 사막에 염분초가, 이리, 호랑이, 사자를 위해서는 많은 초식동물들이 있어야 했다. (B 281 이하)


여기서 칸트는 자연 사물들 상호간의 관계가 목적과 수단의 유익성의 관계로 파악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목적연관의 계열에 있어 각 중간항은 목적으로 간주되고, 또 그 중간항에 대한 최근접의 목적원인은 수단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칸트는 인간과 자연 사물들 사이에 여러 가지 의도에서 상정된 유익성이 상대적인 자연목적이 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칸트는 두 가지 경우를 들어 한 경우는 자연의 목적으로, 다른 경우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만일 자연 사물들이‧‧‧자신의 어리석은 의도(다채로운 색깔의 새털은 옷의 장식품으로, 칼라 색상의 흙이나 식물의 수액은 화장품으로)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거나, 또 종종 합리적인 의도에서 말은 타기 위해, 황소나‧‧‧당나귀나 돼지는 밭을 가는 데에 유익하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그러한 사용을 위한 상대적인 자연목적을 결코 상정할 수 없다. 인간의 이성은 사물들을 자신의 자의적인 착상에 합치시킬 줄 아는데, 이 자의적인 착상을 위해 인간 자신이 자연에 의해 예정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인간이 지구상에 생존해야 한다”고 전제할 경우에만, 최소한 인간이 동물로서, 그리고 이성적 동물로서 (아무리 낮은 정도에서라도) 살아 가는 데에 없어서는 안될 수단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목적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자연 사물들은 자연의 목적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B 282)


인간이 목적과 수단에 의한 유익성의 관계방식을 자의적으로 혹은 이기적인 안목에서 아니면 도구적 합리성의 관점에서 자연 사물들에 이입한다면, 그것은 결코 자연의 목적으로, 곧 자연 사물들 상호간의 유익성에 대한 외적인 합목적성으로 생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외적인 합목적성(한 자연물의 다른 자연물에 대한 유익성)은, 한 사물이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유익한 어떤 다른 사물의 현존 그 자체가 자연의 목적일 수 있다는 조건하에서, 외적인 자연목적으로 간주될 수 있다.” (B 283)


외적인 합목적성은, “한 사물이 스스로 (비록 이중적인 의에서이지만) 원인이고 결과이면, 이 사물은 자연목적으로 존재한다”(B 286)는 자연목적의 원리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이러한 언급은 바로 칸트의 인간과 자연의 목적론적 관계[외적인 합목적성과 내적인 합목적성의 연관]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대단히 중요하다 하겠다.  

간단히 다시 정리해 보면, 자연 사물들 상호간의 유익성에 근거를 둔 합목적성은 사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객관적 합목적성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상대적인 합목적성인데, 곧 사물의 관점에서 보면, “사물 자체에 부가되는, 단순히 우연적인 합목적성(beigelegte, bloß zufällige Zweckmäßigkeit)” (B 282) 일 뿐이다. 따라서 가설적으로 자연의 목적을 상정하는 상대적이고 외적인 합목적성은 절대적인 목적론적 판정의 근거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하겠다. 따라서 외적인 합목적성은 자연관계를 “해석하는 성격”을 갖고 있는 것이지 “설명의 가치”29)를 갖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4.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


우리는 이상의 논의를 통해 칸트는 처음부터 목적론적 판정의 원리를 대상에 대한 사실적 설명의 원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판단력의 반성적 원리로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을 알았다. 즉, 반성적 판단력의 원리는 우리들의 지성과 이성의 성질상 유기적 자연의 내적인 관계나 자연 대상들간의 외적인 관계를 목적과 수단의 관계로 생각하는 원리이다. 자연을 목적과 수단의 연관이나 결합으로 생각하고 파악하는 방식은, 한편으로는 자연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인 인식능력의 반성적 산물이다. 이 점은 칸트 인식론의 배후30)에서 보면 분명한 데, 곧 자연의 목적연관은 인간이 자기능력의 특성에 따라 자연이 합목적적으로 질서지워져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하는 데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자연의 합목적성은 그 자체로 절대적 객관적 합목적성이 아니고, 다름 아닌 우리의 반성의 산물인 것이다. 이러한 반성들은 특히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와 인간의 위치에 대한 심사숙고를 위해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제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이해에 기초해서 인간과 자연의 목적론적인 관계를 살펴 보도록 하자.

인간을 중심축으로 한 자연의 합목적적 질서관계에 대한 칸트의 생각은 특히「목적론적 판단력의 방법론」§82에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 식물계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식물계는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계를 위해 존재하고, 그래서 동물계는 그토록 많은 종을 이루어 지구상에 퍼져 있다라고 대답한다면, 그러면 무엇을 위해 이 초식동물들은 존재하는가? 라고 다시 묻게 된다. 그 대답은 아마 이럴 것이다. 초식동물은 생명을 가진 것만을 먹어야 사는 육식동물을 위해서 존재한다. 이리하여 결국 다음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지금까지 언급된 자연의 세계와 육식동물들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고, 인간의 다양한 사용을 위해서이다. 지성이 인간에게 모든 피조물들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인간은 이 지구상에서 창조의 최종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목적개념을 만들고, 이성에 의해서 합목적적으로 형성된 사물들의 집적을 목적의 체계로 만들 수 있는 지상 유일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B 382 이하) 


이러한 인간을 정점으로 한 “인간중심주의적 목적론”31)을 우리는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비단 칸트에게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다음의 네 가지 점으로 요약‧정리되는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는 철학사상 여러 철학자들에게서 발견되고 있다.32) 즉, 그것은 (1) 자연속에서 어떤 것도 불안전하고 쓸모없는 것은 없다. (2) 전체 자연은 위계질서적이고 목적론적인 구조로 되어 있고, (3) 인간이 최종 목적으로서 전체 자연체계의 정점에 서 있고, (4) 인간은 자신의 능력에 의해 자신의 목적설정에 따라 자연을 수단으로 이용하고 변화시키고, 또 개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요나스가 자연친화적인 목적론으로 간주하여 과학기술 문명시대를 위한 ‘새로운 윤리학’의 토대로 삼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객관적 목적론도 부분적으로 여기에서 예외가 아닐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의 한 부분이 이 점을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 식물은 동물을 위해 존재하고, 또 다른 동물들은 인간을 위하여, 즉 길들여진 가축은 서비스나 음식물을 위해, 야생동물은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음식물을 위해, 그리고 의복과 다양한 도구의 제작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자연이 불안전하고 쓸데없이 만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면, 자연은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33)


오늘날 환경문제를 다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를 자연환경 파괴의 ‘정신적인’ 원인 제공자로 여기고 있다.34)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을 인간의 주관적, 사회적, 경제적 목적에 대한 가능한 효과적인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인간의 자연에 대한 지배의 관점을 이러한 자연관이 제공하였다라고 믿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인간중심주의적 자연관이 인간의 자연지배의 정당성을 무한정 확보해 주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 철학도 베이컨, 데카르트의 인간중심주의와 더불어 자연환경에 ‘적대적인 인간중심주의 철학’으로까지 이야기되고 있다.35) 칸트 철학이 자연에 적대적이라는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는 많은 이유들36) 중의 하나가 칸트의 저서 이곳 저곳에 나타나 있는 ‘목적-수단의 정식’일 것이다. 즉, ‘인간은 목적 자체이고 자연은 수단’이라는 칸트의 언명을 ‘인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는 자연을 아무런 제약없이 수단으로 사용해도 된다’는 식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이렇게 피상적으로 추측‧해석한다면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는 분명히 전제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칸트의 인간중심주의가 강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차별적이고 전제적(rücksichtslos und despotisch)’ 이다라는 비판을 필자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순화‧계몽된(gemäßigte und aufgeklärte)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의 용모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목적을 위한 모든 자연이용에 있어서 지배적인 원리는 도덕적 원칙일 수밖에 없다는 근거”37)를 밝힌 최초의 철학은 칸트 철학임을 필자는 확신하고 있다. 이러한 확신에서 ‘칸트의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의 본질은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이다’라는 주장을 아래에서 전개해 보려고 한다.


5. 도덕적 인간중심주의


우리는 칸트 인간중심주의의 도덕적 용모를 위의 §82 인용문의 ‘인간은 자연의 최종목적(letzter Zweck)이다’는 칸트의 말을 자세히 뜯어보는 데에서 문제를 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산물들을 수단으로서 사용할 줄 안다는 단지 그 이유에서 인간은 자연의 최종목적인 것은 아니다. ‘인간이 자연의 최종목적이다’는 말을 마치 모든 자연물이 인간의 욕구충족을 위한 수단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설령 그렇게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자연을 수단으로 삼아 자신의 모든 욕망을 다 충족할 수도 없다. 사실 자연은 인간을 자신의 “특별한 총아(besondern Liebling)” (B 389)로 삼지도 않았으며, 또 인간에게 다른 동물들 보다 더 많은 혜택을 준 것도 아니다.38)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자유로운 목적 일반의 준칙들에 적합한(angemessen) 수단으로 사용할 줄” (B 391) 안다는 의미에서 자연의 최종목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칸트가 분명히 강조하고 있는 점은, 자연을 단지 수단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자신의 목적에 ‘적합하게’ 수단으로 이용할 줄 안다는 점이다. ‘자연을 적절한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칸트의 언명은 오늘날의 자연이용을 반성해 볼 수 있는 중요한 단초일 것이다.

인간은 지구상에서 자연의 최종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유롭게 자기 활동적으로 목적을 설정하고, 동시에 자연의 합목적적인 통일체계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 스스로를 목적으로 삼음으로써 인간은 자연이 자신을 마치 목적으로 규정한 것처럼 보이는 원리이지만, 거꾸로 전체 목적항들의 매카니즘내에서는 합목적성을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인간에 함께 주어진 것이다. (B 390) 자연의 합목적적 통일체계속에서 인간은 자기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지상 유일의 존재로서 “자연의 주인 칭호를(betitelter Herr der Natur)” 갖을 뿐만 아니라, 목적론적 자연체계내에서 자신의 규정상 자연의 최종목적이 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목적체계를 이해하고, 또 자연과 자기 자신 사이에 목적관계를 부여할 줄도 알고 또 그럴 의지를 갖고 있다는 조건에서 그렇다. (B 390) 그런데 인간이 자유롭게 목적을 설정하는 차원은 도덕적이고 실천적인 행위의 차원일 것이고, 또 인간 스스로 자연의 주인이라 칭해도 되는 것도 인간이 기술적 힘의 수단들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의미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39)

칸트는 ‘인간은 자연의 최종목적이다’는 규정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을 자연의 궁극목적(Endzweck)이라고 규정한다. “자신의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다른 어떤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B 396) 것이 궁극목적인데, 도덕덕으로 행위할 수 있고, 행위해야 하는 인간이 자연의 궁극목적이라는 것이다. 이 점을 칸트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그 현존으로 보아 의존적 존재자인 세계의 사물들이 목적에 따라 행위하는 어떤 최고의 원인을 필요로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창조의 궁극목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없이는 상호 종속적인 목적들의 연쇄관계가 완전하게 근거지워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에 있어서만, 그리나 도덕성의 주체(Subjekte der Moralität)인 인간에게서만 목적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법칙부여가 이루어질 수 있다. 따라서 이 무조건적인 법칙부여를 통해 인간은 전체 자연이 목적론적으로 종속되는 궁극목적일 수 있다. (B 398이하, 강조: 인용자)  

이상의 논의에서 우리는 칸트의 강조점이 어디에 놓여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자유롭게 목적을 설정할 줄 알고, 자연을 수단으로 이용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도덕적 능력으로 인해 인간은 자연의 최종목적이고 궁극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덕적 존재인 인간은 ‘그는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라고 더 물을 수 없는 존재이다. (B 398)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이 아니라, 도덕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연목적의 핵심점인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목적론적 인간중심주의 본질은 인간의 도덕성인 것이다. 회페는 칸트의 이러한 의도를 헤아려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인간은 그렇게 단순히 자연의 궁극목적이고 자연의 주인이라는 칭호를 갖지는 않는다. 사실은 그 이상이고, 인간은 아주 정당한 방식으로 주인인데, 전제자(Despotes)로서도 아니고, 물론 한번도 악의적 기술자(Technites)로서도 아니다. 인간은 ‘도덕의 주체’로서만 자연의 주인인 것이다. 비판자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다. ‧‧‧ 바로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이 누리는 이 특권(Privileg)은 특별권(Sonderrecht)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특별한 의무를 표현한 것이다. 자연지배에 대한 권리를 준 능력이면서 과제가 바로 도덕성인 것이다.40)


인간은 자유롭게 목적을 설정하고, 자연 대상들을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이 자기 삶의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은 인간 본성의 고유한 성질에 속할 것이다. 죽지 않으려면 자연을 대상으로 삼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에, 인간이 자연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아 이용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비난될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에 따르면 인간이 자신의 행위속에서 스스로를 도덕법칙에 합당하게 규정함으로써만 자연을 수단으로 간주하는 일은 허용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목적론적 고찰이나 자연의 수단으로의 사용은 도덕성에 종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연과의 관계에서 모든 종류의 자연이용이나 모든 의식적 목적설정은 도덕적 원리에 비추어 정당한 것이어야 한다.41) 생태계의 위기라는 오늘의 시각에서 보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도덕적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기 목전의 이익을 상대화하거나 포기하고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것이다. 나아가 집단의 이익과 종족의 이익을 위해 자의적이고 무차별적인 자연이용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의 이익과 종족의 이익조차도 상대화 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보면 칸트의 입각점은 인간중심주의를 바로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를 통해 극복하고 있으며,42) 또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의 규범들을 제시해 준다고 하겠다.43)

이상에서 필자는 칸트 비판자들의 비판적 시각과 다른 각도에서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을 해석‧정리해 보았다. 이를 통해 필자는 칸트 비판자들과 반대되는 두 가지 결론을 얻어 냈다고 본다.

(1) 칸트의 목적론적 자연관에 나타난 인간중심주의는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이다.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를 전제적이고 강한 인간중심주의(starke Anthropozentrik)로 본 생태론자들의 이해방식과 달리, 우리는 그것을 약한 혹은 순화된 인간중심주의(schwache, gemäßigte Anthropozentrik)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해석의 근거는, 칸트가 자연적‧생물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도덕성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자연세계의 ‘중심’에 놓고 있다는 점이다. 달리 말해서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인간,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 인간, 자연에 대한 책임의 주체인 인간이 바로 중심이기에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인 것이다.

(2)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보면, 자연은 인간의 이용대상임과 동시에 인간이 끊임없이 책임져야 할 대상이다. 인간의 자연이용의 행위나 자연과의 관계에서의 의식적 목적설정은 도덕적 원칙에 종속되어야 하며, 그런 조건에서만 인간의 자연이용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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