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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철학 하기

로티와 퍼트남의 실용주의적 전회

작성자lordinc|작성시간08.04.15|조회수767 목록 댓글 0

 

로티와 퍼트남의 실용주의적 전회


 

 

【주제분류】언어철학, 실용주의, 철학방법론

【주요어】듀이, 로티, 퍼트남, 실용주의, 경험적 방법

【요약문】

본 논문의 목적은 로티의 ‘방법론 없는 실용주의’와 퍼트남의 ‘실용주의적 계몽’을 검토함으로써 듀이 철학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로티와 퍼트남은 전통 철학, 특히 근세 인식론의 기본적인 가정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듀이의 실용주의와 철학적 시각을 공유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로티와 퍼트남은 20세기 초 ‘언어적 전회’의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대안으로 ‘실용주의적 전회’에 가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티와 퍼트남의 실용주의는 의도적이든 아니든 듀이의 실용주의의 주도적 개념을 거부함으로써 듀이에게서는 발생하지 않는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로티는 ‘경험적 방법’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반면, 퍼트남은 ‘연속성의 원리’를 간과하고 있는데, 경험적 방법과 연속성의 원리는 듀이의 실용주의의 핵심적 기제로 작동한다. 로티와 퍼트남의 실용주의는 듀이의 실용주의에서 멀어지도록 할 뿐만 아니라 듀이 철학의 현재성을 간과하고 있다. 필자는 최근의 경험적 탐구, 특히 ‘인지과학’의 연구 성과들을 제시함으로써 듀이로의 회귀가 탈분석시대에 우리에게 열린 철학적 담론을 위한 더 나은 지평을 제공해준다고 제안할 것이다.

 


1. 머리말


분석철학의 영향이 급속히 확산되면서 많은 철학자들에게 ‘실용주의’(pragmatism)는 유용성을 잃은 구시대의 철학 사조 내지는 금세기 초 매우 편협한 분위기에서 융성했다가 이제는 반박되었거나 지양된 철학 운동쯤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분석철학이 자기 초월을 거쳐 스스로를 폐기”1)한 이후 ‘분석의 세례’ 속에서 성장하여 정교하고 치밀한 분석적 논의를 주도했던 영어권의 주요한 철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실용주의를 그 대안적 사유로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가 실패한 이후 분석철학 진영에 있던 다수의 영향력 있는 철학자들, 예컨대 콰인(W. V. O. Quine), 굿맨(N. Goodman), 데이비슨(D. Davidson), 퍼트남(H. Putnam) 로티(R. Rorty) 등이 직ㆍ간접적 방식으로 ‘실용주의적 전회’(pragmatic turn)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2) 이들 가운데 특히 로티와 퍼트남은 실용주의의 부활에 극적인 계기를 마련한 철학자들이며, 그들은 공통적으로 듀이(J. Dewey)의 실용주의에 주목한다.

퍼트남에 따르면 듀이는 지난 세기의 그 어떤 다른 사상가보다도 훌륭한 철학자이며, ‘실용주의적 계몽’(pragmatic enlightenment)을 이끌었다. 실용주의적 계몽은 ‘비판에 대한 비판’(criticism of criticisms),3) 다시 말해서 “높은 수준의 비판으로서 우리의 비판 방식들에 대한 비판”4)을 함축하고 있다. 퍼트남이 이러한 실용주의적 계몽에  주목하는 이유는 듀이가 비판에 대한 비판을 통해서 전통 철학에 순응하지 않고 그것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한편 로티는 제임스(W. James)와 듀이가 “분석철학이 거쳤던 변증법적 여정의 종착지에 미리 가서 기다렸을 뿐만 아니라 푸코(M. Foucault)나 들뢰즈(G. Deleuze)가 지금 여행하고 있는 길의 끝에 서서 기다리고 있다”5)고 말한다. 나아가 로티는 듀이의 실용주의가 자신의 철학적 기조이며, 분석철학이 부딪힌 한계들이 ‘실용주의적 전회’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6) 이는 듀이의 실용주의가 전통 철학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유방식을 ‘치유’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주된 목적은 로티의 ‘방법론 없는 실용주의’(pragmatism without methodology)와 퍼트남의 ‘실용주의적 계몽’을 검토함으로써 듀이 철학의 현재성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러한 탐색을 통해서 필자는 로티가 듀이의 실용주의에서 ‘경험적 방법’(empirical method)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고, 퍼트남은 ‘경험’(experience) 개념을 구성하는 한 축인 ‘연속성’(continuity)의 원리를 간과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것이다. 이는 경험적 방법과 연속성의 원리가 듀이의 실용주의의 핵심적 기제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듀이의 경험 개념과 경험적 방법은 우리와 우리의 생활 세계를 경험적으로 설득력 있게 해명해주는 데 있어 유용한 도구이며, 나아가 그것은 전통 철학에서 발생했던 문제들, 즉 ‘철학적 열망’에서 비롯된 초월적인 주장과 ‘선언’을 제약하는 중요한 장치가 된다. 짧은 역사를 갖고 있지만 경험적 방법에 의해 탐구된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은 많은 연구 성과물을 기반으로 하여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으며, 인지과학의 탐구 방법과 그 탐구의 성과물들은 듀이가 강조한 경험적 방법의 중요성을 확증해준다.



2. 방법론 없는 실용주의


로티는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7)에서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과 듀이를 ‘교화적’ 철학자 또는 실용주의 철학자로 분류한다. 이 실용주의 철학자들은 주로 체계철학에 대해서, 즉 보편적인 공약이라는 기획 전체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러한 기획의 공허한 함정과 문제점을 드러내고 해소시켰다는 점에서 금세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들이다. 로티는 이렇게 말한다.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그리고 듀이, 젊었을 때 이들 각각은 철학이 ‘토대 역할을 할 수 있게’하는 새로운 방법, 즉 초창기에는 사고를 위한 궁극적인 맥락을 구축하는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 그러나 이들 세 사람은 각각 자신들의 초기의 노력이 자기 기만적이었음을 곧 깨닫게 되었다. …… 후기의 저작에서 이들 세 사람은 각각 철학이 토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칸트의 생각에서 벗어나, 그들 자신이 한때 굴복했었던 바로 그 유혹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따라서 그들의 후기 저작은 건설적이라기보다는 치료적이며, 체계적이라기보다는 계발적이며, 새로운 철학적 계획을 독자에게 제시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을 하고자 하는 독자들의 동기를 되묻기 위해서 기획되었다.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그리고 듀이는 정확한 표상으로서의 지식은 특별한 정신적 과정에 의해서 가능해지며 보편적인 표상이론을 통해서 이해될 수 있다는 식의 지식에 대한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8)


로티는 ‘표상주의’(representationalism)로 특징지어지는 근세의 토대주의적 인식론을 거부하는 반표상주의적 입장을 취한다. 그에 따르면 전통 “철학의 핵심적 관심은 실재를 잘 표상하는 분야와 별로 잘 표상하지 못하는 분야, 그리고 잘 표상하는 척하고 있지만 전혀 표상하지 못하는 분야로 문화를 구분하는 보편적인 표상이론이 되는 것에 맞추어져 있다.”9) 이러한 이유 때문에 로티의 철학 비판의 초점은 철학이 자연의 거울이 아니며 오랫동안 전통 철학을 사로잡고 있었던, 특히 근세의 인식론으로 정형화된 ‘거울로서의 마음’(Mind as a Mirror)이라는 은유를 깨뜨리는 데 있다. 이 같은 로티의 기획은 자신이 실용주의로 분류한 철학자들의 철학적 방법, 즉 치유적이며 전체론적인 시각을 수용하여 자신의 논의를 전개함으로써 마음이 세계와 그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신념들 사이에 매개체로서 존재하는 하나의 거울이며, 우리가 이 거울을 통해 세계를 정확하게 ‘표상’한다는 생각 자체를 와해시킨다.10) 이러한 점에서 로티는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듀이, 즉 실용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진 빚이 크다고 언급하고 있다.

로티는 󰡔실용주의의 결과󰡕에서 ‘실용주의의 부활’ 및 ‘실용주의에로의 복귀’를 선언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이 실용주의라고 주장한다. 이 같은 선언과 주장에도 불구하고 로티의 실용주의는 ‘방법론 없는 실용주의’와 ‘반토대주의적 실용주의’의 입장, 다시 말해서 철학에 있어서 이론화나 체계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비판적 기능만을 중시하는 포스트모던적 입장을 취한다. 강한 해체성과 어떤 이론화나 체계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로티의 실용주의는 퍼스(C. S. Peirce), 제임스, 듀이로 이어져 온 고전적인 실용주의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듀이의 실용주의와는 거의 화해되기 힘든 거리를 드러낸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로티의 실용주의는 흔히 ‘신실용주의’(Neo-pragmatism)라고 불린다.11)

로티는 고전적인 실용주의자들 가운데 칸트주의적인 퍼스를 제외한 제임스와 듀이의 실용주의에 주목한다.12) 로티에 따르면 “어떤 작가도 과거와 판이하게 다른 미래를 일궈내기 위한 급진적인 제안을 제임스와 듀이가 했던 것처럼 제시한 적이 없었다.”13) 로티의 표현을 빌면 현재 소홀히 취급되고 있는 ‘위대한 실용주의자들’의 핵심적 교의는 ‘반본질주의’(antiessentialism)와 ‘전체론적 관점’, 그리고 ‘대화주의’로 특징지어진다.14)

로티는 실용주의의 세 가지 특징에 주목하면서, 그 첫 번째 특징이 “‘진리’, ‘지식’, ‘언어’, ‘도덕성’ 등의 관념이나 그것들과 유사한 철학적 이론화의 대상들에 대해 적용될 때, 실용주의는 한마디로 반본질주의”15)라고 말한다. 반본질주의의 관점에서 ‘진리’란 어떤 본질 같은 것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좋은 것’이다. 진리는 세계를 정확하게 표상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언어적 단위체, 즉 문장의 한 속성이기 때문에 어떤 실재와 대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응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실용주의가 진리에 관하여 어떤 유용한 것을 말할 것이 있다면, 이론보다는 ‘실천의 어휘’를 통해서이며 명상보다는 행위를 통해서 말한다. 따라서 실용주의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폐기하고, “진리를 믿으면 무엇이 좋은가?” 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라고 제안한다. 이는 실용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 진리는 더 이상 철학적으로 심오하거나 흥미로운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용주의의 두 번째 특징, 즉 ‘전체론적 관점’을 특징으로 하는 실용주의는 “당위와 사실에 관한 진리 사이에 아무런 인식론적 가치도 없고, 사실과 가치 간에 아무런 형이상학적 차이도 없으며, 도덕과 과학 사이에 아무런 방법론적 차이도 없다”16)고 본다. 실용주의자들에게 있어 모든 탐구의 방식은 여러 가지 구체적인 대안들의 상대적 매력에 관한 사려 분별이다. 로티에 따르면 “과학이나 철학에서 사변의 대안적인 결과들을 놓고 따지고 사려 분별하는 것을 ‘방법론’이라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은 다만 희망적인 관측에 불과하다.”17) 전체론적인 시각을 통해서 세상을 보는 실용주의는 그 유용성이 소멸했다고 보는 플라톤 및 칸트적인 인식론의 전통 전부와 특히 전통적인 구분, 즉 이분법적 사고방식과 결별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를 폐기할 것을 요구한다. 로티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통적이고도 플라톤적인 인식론 중심의 철학은 그러한 절차에 대한 추구이다. 그것은 대화와 사려 분별의 필요성을 회피한 채 단순히 사물들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 방식을 조사할 수 있는 길을 추구하는 것이다. …… 그러한 전통의 중대한 오류는 실용주의자의 말에 따르면 시각적 비유, 대응, 지도 그리기, 그림 그리기 등과 같이 조그맣고도 일상적인 주장들에 대해 적용되는 표상이 거대하고도 논쟁적인 주장들에 대해서도 적용될 것이라고 생각한 점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는 대응될 대상이 없는 곳에서는 우리가 합리성을 얻게 될 가망이 없고 다만 기호와 정념과 의지만을 얻게 될 것이라는 발상을 낳게 한다. 그러므로 실용주의자가 진리는 곧 표상의 정확성이다라는 관념을 공격할 때, 그는 이성과 욕구, 이성과 식욕, 이성과 의지 따위의 전통적인 구분을 공격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이 시각적 모델에 입각하여 생각되는 않는다면 그리고 듀이가 ‘관람자 지식 이론’이라고 불렀던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구분들 중 어떤 것도 의미를 갖지 못할 터이기 때문이다.18)

로티는 실용주의의 두 특징, 즉 ‘반본질주의’와 ‘전체론적 관점’보다 세 번째 특징인 ‘대화주의’를 더 선호한다. 이는 대화주의로서의 실용주의가 “대화의 제약을 제외하고는 탐구에 아무런 제약도 없다는 교의, 즉 대상들의 본성이나 정신의 본질이나 언어의 본질에서 파생된 어떤 도매급의 제약도 없으며, 오로지 우리의 동료 탐구자들이 행한 논평들이 제공하는 소매급의 제약만이 있다는 교의”19)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티가 말하는 ‘대화’(conversation)는 “논증과 반박 등의 제과정을 통해 변증법적으로 점차 진리를 찾아가는”20) 철학적 담론(dialogue)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적 대화’를 전제로 하면서 철학적 혼동을 치료하는 대화, 즉 교화적인 깨우침을 위한 대화다. 로티의 관점에서 실용주의자는 우리가 어떤 대상에 탐구할 때 엄격한 방법론이나 명료한 언어로 접근함으로써 그것에 관한 진리를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제약해 줄 것이라는 희망을 헛된 희망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것을 탐구하는 데 있어 방법의 우선성과 같은 것은 없다. 이는 누가 언제 진리에 도달했는지 혹은 그 이전보다 진리에 더 가깝게 접근했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 역시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로티의 실용주의는 ‘방법론 없는 실용주의’다.

로티의 관점에서 실용주의의 대화의 목적은 동의를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소크라테스적인 대화가 대화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대화를 지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는 성공을 담보해 주는 어떤 형이상학적 보증이나 인식론적 보증 같을 것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 그러나 “반실용주의자가 지닌 열정의 근원은 대화가 반드시 ‘동의’와 ‘합리적인 합의’ 도출을 목표로 한다는 것, 즉 더 이상의 대화가 불필요한 것이 되게 하려고 우리가 대화를 한다는 반실용주의자의 확신”21)에서 비롯된 것이다. 반면에 대화주의적 실용주의에 따르면 대화를 통해 단순한 의견이 아니라 확실한 앎에 도달하려는 플라톤적 희망과 의심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발견하려는 데카르트적 희망, 그리고 선험적 구조에 대한 칸트적 희망은 ‘우연성’(contingency)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들이다.22) 그러므로 로티는 이러한 전통 철학자들이 희망했던 철학적 희망을 포기하면 비인간적 제약에 대한 복종에서 벗어나게 될 뿐만 아니라 ‘오류 가능’하고 변화 가능한 인간적 계획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3. 반성적 초월로서의 실용주의적 계몽


“분석철학의 역사”23)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자주 변경했던 퍼트남에 따르면 듀이의 철학적 입장은 ‘객관적 상대주의’이며, 이것이 ‘객관주의 아니면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타파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한다.24) 퍼트남은 󰡔이성ㆍ진리ㆍ역사󰡕25)에서 ‘객관주의 아니면 상대주의’라는 이분법적 사고가 오늘날 철학이 당면한 가장 큰 난제 중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철학적 관점의 필요성을 역설한다.26)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퍼트남은 ‘내재적 실재론’(internal realism) 또는 ‘내재론’(internalism)을 새로운 철학적 관점으로 제시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형이상학적 실재론’(metaphysical realism)이 가정하는 ‘신적 관점’, 즉 외적 관점에서만 발견되는 ‘진리 대응설’을 반박하기 위해 창안된 것이다. 진리 대응설은 진리의 기준을 세계와 언어 사이의 대응 관계에서 찾고 있는데, 퍼트남에 따르면 이 ‘대응’이라는 개념은 ‘지칭’(reference) 문제를 토대로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유사성’이라는 개념에 의존하고 있다. 퍼트남에게 있어 이러한 유사성 개념은 정합적 설명이 불가능한 마술적 지칭 능력을 우리의 마음에 부과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에 대한 참되고 완벽한 하나의 기술만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은 특정한 문장의 의미가 상대화될 수 있다는 ‘개념의 상대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의 상대성의 인정은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다원주의’를 허용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퍼트남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만약 진리가 대응 관계에 있지 않다면 일종의 다원론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러나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신적 관점, 즉 하나의 참된 이론을 고수하고자 한다. …… 오직 하나의 참된 이론만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은 2,000년 넘게 지속되어 왔다. 이 주장이 처음부터 내적인 모순과 불명확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가지 형태로 지속되어 온 이유는 신적 관점을 가지려는 사람들의 욕망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또 강력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욕망이 결코 성취될 수 없다는 점을 처음으로 간파한 칸트도 그 욕망이 우리의 합리성 자체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27)


이처럼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은 다원주의를 허용하는 관점에서 한편으로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거부하기 위해 고안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 철학의 문제인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을 나름대로 지양 종합시켜 ‘객관성’이나 ‘합리성’ 등을 옹호할 수 있는 철학적 입장을 구축하고 동시에 그것이 상대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퍼트남이 말하는 객관성과 합리성이란 “바로 우리 자신들에 속하는 것으로서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지 어떤 절대적인 성질을 가진 것이 아니다.”28)

퍼트남은 자신이 ‘객관적 상대주의’로 규정한 듀이와 실용주의 일반이 자신의 내재적 실재론의 관점과 거의 같은 맥락에 있다고 주장한다.29) 퍼트남에 따르면 “현대에 와서 합리성을 도구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 자체가 객관적 상대주의의 성향을 띠고 있다.”30) 이 같은 실용주의에 대한 퍼트남의 친화성은 그의 두 저서, 즉 󰡔실용주의󰡕31)과 󰡔존재론 없는 윤리학󰡕에서 보다 극명하게 드러난다. 󰡔실용주의󰡕에서 퍼트남은 ‘전체론’(holism)과 ‘다원주의’로서의 실용주의를 강조하고 있으며, 󰡔존재론 없는 윤리학󰡕에서 퍼트남은 듀이를 자신의 ‘영웅’ 목록에 포함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세기의 그 어떤 다른 사상가보다도 훌륭한 철학자”32)인 듀이가 ‘실용주의적 계몽’을 이끌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그는 ‘오류주의’(fallibilism)이면서 동시에 ‘반회의주의’(antiskepticism)를 특징으로 하는 듀이의 실용주의에 주목한다.

퍼트남은 󰡔존재론 없는 윤리학󰡕에서 철학에 있어 세 가지 계몽이 발생했다고 주장하는데, ‘플라톤적 계몽’과 ‘17-18세기 계몽’, 그리고 ‘실용주의적 계몽’이 그것이다. 먼저 플라톤적 계몽은 플라톤의 대화편 󰡔에우티프론󰡕에서 출발하는데, 이 대화편은 퍼트남이 철학을 ‘반성적 초월’(reflective transcendence)이라고 부르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이 대화편이 관습적 의견과 계시의 권위, 즉 무비판적으로 글자대로 수용한 종교적 텍스트나 신화들로부터 물러서서 “왜?”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화편에서 철학은 이처럼 두 열망, 다시 말해서 ‘정의에의 열망’과 ‘비판적 사고에의 열망’을 결합시키고 있다.33) 퍼트남에 따르면 첫 번째 계몽철학자로서의 플라톤은 종교적 광신에 대한 그의 비판과 사회의 모든 공직이 남자뿐만이 아니라 여자에게도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옹호했다.

퍼트남에게 있어 두 번째 계몽은 17-18세기에 영국에서 나타난 홉스와 로크의 새로운 철학, 그리고 루소의 철학 및 대륙 합리론의 철학이 끼친 영향과 ‘새로운 과학’이 끼친 영향, 다시 말해서 홉스와 스피노자, 루소와 칸트, 볼테르와 그 철학자들의 이름들과 관련된 17-18세기의 운동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 같은 운동은 ‘정의에의 추구’와 반성적 초월인 ‘물러섬’(standing back)을 연결시키는 사고의 진보를 이룩했으며, 두 번째 계몽의 특징은 새로운 과학이 가진 힘에 대한 신념과 사회 계약으로서 사회 개념을 대변한 것이다. 두 번째 계몽에 속해 있는 철학자들은 과학이 가진 힘이 사회적이고 도덕적인 문제들에 관하여 생각하는 데 적용될 수 있기를 희망했다.34) 퍼트남에 따르면 근세적 계몽과 플라톤적 계몽과의 유사성은 양쪽 모두 똑같이 ‘반성적 초월에 대한 열망’이 있고, 관습적인 믿음과 제도를 비판하고 근본적인 개혁을 제안하는 데 있다. 이 같은 플라톤적 계몽과 근세적 계몽의 유사성은 더 확대되는데, 새로운 과학을 향한 열정과 윤리학과 정치철학의 문제들을 종교적 텍스트와 또는 신화에 호소하여 결정할 수 없다고 거절한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두 계몽 간의 커다란 차이는 한 국가를 이상적으로 정당하게 만들려는 플라톤의 무리한 주장에서 드러난다. 즉 그것은 선의 본성을 홀로 신빙성 있게 확인할 능력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 즉 철학자들에 의해 선의 본성이 다스려져야 한다는 주장과 국가의 다른 요소들이 철인 통치자의 지도하에 적절하게 기능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의 정당성,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용어로 ‘정의’는 피지배자의 동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기능하는 엘리트 계층의 존재에 의존한다.

퍼트남에 따르면 두 번째 계몽은 심각한 결함이 있는 잘못된 개념들을 가졌는데, 한편으로 전통적인 합리론이 과학적 설명들의 일반 형식을 ‘선험적으로’(a priori) 알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경험론이 똑같이 과학적 자료, 실상 모든 경험적 자료의 일반 형식을 ‘선험적으로’ 알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그것이다.35) 다시 말해서 두 번째 계몽의 양 날개인 합리론의 날개와 경험론의 날개는 서로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크게 ‘선험적인 것에 대한 열망’으로 특징지어지는 결함을 함축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퍼트남은 이러한 열망이 “사회와 인간에 관하여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합리론자 및 경험론자자의 프로그램은 그 경우에 모두 다양한 종류의 형이상학적 환상으로 끝났다”36)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제3의 계몽’, 즉 17-18세기 개념보다 훨씬 더 오류 가능하며 반형이상학적인 것이지만 회의주의에 빠져들지 않는 것으로서 실용주의적 계몽의 필요성을 제안한다. 


나는 이제 세 번째 ‘계몽’에 관하여 말하고 싶다. 이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거나 어쨌든 완전히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고, 그것을 위해 싸울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계몽(나는 그것을 실용주의적 계몽이라고 부르겠다)에서 지난 세기의 그 어떤 다른 사상가보다 존 듀이가 더 훌륭한 철학자라고 나는 생각한다.37)


퍼트남은 듀이가 여러 가지 면에서 세 번째 계몽을 위하여 필요한 방향으로 향하게 하는 철학자이며, 플라톤적 계몽과 근세적 계몽들처럼 듀이를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적 계몽도 자신이 주장한 반성적 초월의 가치를 인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듀이의 말을 빌려 자신이 주장하는 반성적 초월이 ‘비판에 대한 비판’과 유사한 것이라고 말한다. 퍼트남에 따르면 “철학과 동등시한 비판에 대한 비판으로써 듀이가 뜻하는 것은 수용된 생각들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비판으로서 우리가 생각들을 비판하는 방식들조차도 ‘물러서서’ 비판하는 우리의 비판 방식들에 대한 비판”38)이다. 이처럼 실용주의적 계몽이 앞의 두 계몽처럼 기존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다는 데에 서로의 공통점이 있지만, 세 번째 계몽은 이상 사회를 향한 플라톤의 엘리트주의 모형과 같은 계몽에 대해서는 반대 입장을 취한다. 이러한 점에서 근세적 계몽은 듀이의 실용주의적 계몽과 의견을 같이 한다. 그러나 실용주의적 계몽은 오류주의이면서 동시에 반회의주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근세적 계몽과는 정반대의 철학적 태도를 취하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실용주의적 계몽은 근세적 계몽의 연속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퍼트남에게 있어 실용주의적 계몽과 앞선 두 계몽과의 현저한 차이 및 또 하나의 특징은 그들 사이에 있어 ‘이성’에 대한 가치 평가에 있다. 듀이는 자신의 논의를 전개함에 있어서 이성이라는 용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듀이는 ‘지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것은 전통적 철학에서 전제되어 있듯이 영원불변한 진리를 관조하는 관조적 지성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만드는 ‘기술적 지성’이며, 우리의 삶에 필요한 ‘실제적 지성’, 및 인간에게 위대한 수단을 제공하는 ‘행동적 지성’이다. 지성의 창조적 역할을 강조하는 듀이는 이러한 지성을 ‘창조적 지성’이라고 부르며, 듀이에게 있어 창조적 지성은 인간이 직면하는 모든 ‘문제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들 가운데 하나로 작동한다. 이 같은 용어상의 변화는 전통 철학에 대한 심층적인 비판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이성은 무엇보다도 이러저러한 부류의 변치 않는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가정된 인간의 능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듀이에게 있어 계몽 철학자들이 선험적으로 추론하려고 한 것, 즉 독단적으로 추론하려는 시도는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다. 이는 전통 경험론에서 전통적인 합리론만큼이나 선험적인 방식을 취하는 것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듀이는 문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지성적인 방식 이외에도 ‘민주주의적 방식’과 ‘과학적 방법’을 사용했다. 그래서 듀이는 종종 과학주의라는 비판이 가해지는데, 이러한 비판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듀이가 사회적 문제들에 관한 신중한 경험적 탐구를 존중하지 않은 오랜 사회사상의 전통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퍼트남에 따르면 듀이는 모든 것을 설명하는 단일 이론의 관념이 철학의 역사에 있어서 재앙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지적한다.39) 또한 듀이는 과학 자체가 결코 하나의 단일한 이론으로 구성된 적이 없으며, 한 시대에 존재했던 여러 이론들조차 완전한 일관성을 유지한 적이 없음을 지적했다. 듀이는 우리의 이론들이 일관성을 갖추도록 계속해서 노력하는 일은 당연하지만 철학에 있어서 세계에 관한 단일하고 절대적인 이해를 가지려는 꿈은 포기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듀이의 관점에 따르면 이제 철학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궁극적 이론을 찾으려는 철학적 열망을 포기하고, 우리 인간이 어떻게 과학, 윤리학, 정치학, 교육 등 여러 분야에서 실제로 직면하는 다양한 종류의 ‘문제 상황’을 해결해 갈 수 있는가를 탐구하는 작업에 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 상황에 대한 듀이의 해결책은 항상 잠정적이면서 오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 본 것처럼 로티와 퍼트남은 듀이의 실용주의를 오늘날의 새로운 대안적 사유로 간주한다. 이는 듀이의 실용주의가 전통 철학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전통적 사고방식을 ‘치유’하고, 나아가 새로운 사유 방식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티와 퍼트남도 새로운 사유 방식, 즉 ‘민주주의’ 및 ‘다원주의’와  ‘전체론적’ 시각과 ‘오류주의’이면서 동시에 ‘반회의주의’적 시각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점은 듀이의 실용주의를 수용하여 선험적 내지는 ‘신적 관점’(God's-Eye view)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어 온 전통 철학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그것을 제거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로티와 퍼트남은 서로 화해될 수 없는 입장에 서 있는데, 퍼트남이 여전히 ‘합리성’을 옹호하려는 반면에, 로티는 그것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4. 경험과 경험적 방법의 중요성


듀이는 전통 철학에서 “이성이나 합리성에 반대되는 것으로 취급”40)된 ‘경험’에 주목하고, “경험이라는 말을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41)로 사용한다. 듀이가 재구성한 경험 개념이 어느 특정한 영역에 고정되지 않고 포괄적이라는 점에서 에임즈(S. M. Eames)는 그것을 ‘경험의 충만성’(fullness of experience)으로 특징지어 진다.42)   듀이의 경험 개념은 ‘상호작용’(interaction)과 ‘연속성’의 원리에 의해서 형성된 것인데, 듀이에 따르면 상호작용은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원리이며, 그것은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특징 가운데 하나다.


인간이 자연의 외부에 있는 작은 신이 아니라 자연의 안에 있으며, 다른 것들과 불가분 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면 상호작용은 모든 인간의 피할 수 없는 특징이다. 사고, 철학적 사고까지도 예외가 아니다. 이 상호작용은 인간적 요소가 경향성과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편파성에 빠지게 되었다.43)


연속성의 원리는 인간의 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징이며, 듀이에게 있어 연속성은 인간의 경험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원리로 작용한다. 이 같은 연속성의 원리는 듀이의 사상에 있어 어떤 개념보다도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며, 듀이는 경험의 본성을 연속성으로 특징짓는다. 이 원리가 듀이의 철학 내부에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유는 듀이가 “연속성의 회복”(restoration of continuity)44)함으로써 자연주의적 입장에서 경험 이론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이다.45) 듀이의 말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연속성의 회복이 심신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 자연과 경험의 연속성은 연속성이 무시될 때, 더욱 많이 일어나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준다.46)


이처럼 연속성의 원리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정면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인 것이다. 듀이는 연속성의 원리를 바탕으로 인간 경험의 형성 과정에 어떠한 ‘단절’(breach)이 없다고 주장하고, 전통적으로 분리된 것들의 문제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시각을 열어준다.

이러한 경험 개념과 함께 경험적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듀이에 따르면 철학이 경험적 방법을 사용할 때 얻게 되는 중요한 결과는 ‘선택적 강조’(selective emphasis)에 의한 ‘철학적 오류’(philosophical fallacy)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생략과 거부를 수반하는 선택적 강조는 우리의 정신생활의 핵심이며, 반성이 일어날 때 불가피하게 나타나는 것이다.47) 즉 어떤 것을 생략하고 거부하는 것은 우리가 사고할 때 동반하여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적 강조는 철학자들의 특별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되어 왔다. 예컨대 전통 철학은 경험의 특정한 영역만을 선택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경험을 인식의 문제와 심적인 것, 또는 사유와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했다. 듀이에 따르면 전통 철학자들이 비경험적 방법으로 철학적 탐구를 시도했기 때문에 철학적 오류가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비경험적 탐구 방법을 사용함으로써 미해결의 대립된 개념들, 즉 주체와 객체, 몸과 마음 등과 같은 개념들을 만들고 그것들에 등급을 부여하여 상대적으로 등급이 높은 것들만을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듀이는 경험적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철학적 탐구가 경험적 방법에 의해서 점검되고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경험적 방법을 표시적 방법(denotative method)이라 부르겠다. 철학이 반성의 양식이며 종종 포착하기 어렵고 심오한 종류의 양식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철학적 활동의 비경험적 방법을 비난하는 것은 철학이 이론화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세련되고 이차적 산물을 일차적인 경험 안의 어떤 것을 지시하고 되돌아오게 하는 하나의 길로서 이용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이다.48)


경험적 방법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한 마디로 말하면 새롭고 풍부한 경험에 결실을 가져다주는 더 많은 연구를 위한 기회들을 제공한다. 그러나 철학에 있어 비경험적 방법이 제기하는 문제들은 탐구에 장애가 된다. 그것들은 문제라기보다 수수께끼들이며, 일차적 경험의 본래의 재료를 ‘현상적’, 단순한 외형 단순한 인상 혹은 어떤 다른 모욕적인 이름으로 부름으로써만 해결한다.49)


이처럼 비경험적 방법의 문제는 ‘이론적 선언’만 할뿐, 선언에 대한 어떤 ‘증명’이나 ‘검증’ 또는 ‘점검’을 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며, 또한 과학적 원리와 추론이라는 매개를 통해 일상적 경험의 사물들이 연구될 때보다 그 의미를 확장시키거나 풍부하게 하는데 상대적으로 취약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기능의 결여가 철학의 주제들을 일상적 경험과는 동떨어지고 추상적이며, 무미건조하게 만든다. 경험을 넘어선 방식, 즉 초월적 방법을 사용하여 획득한 철학적 결과물은 그것의 본성이 비현실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현실 세계의 척도로 사용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방법에 의해 수행된 철학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무책임한 철학’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50)

듀이의 경험적 방법은 ‘일차적 경험’과 철학에서 발생하는 이차적 혹은 반성적 경험’이 연속적이며, 일차적 경험보다 반성적 경험이 더 우월한 실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적 탐구에 있어 경험적 방법을 강조하는 듀이는 자신의 철학을 ‘자연주의적 경험론’(naturalistic empiricism)51) 혹은 ‘경험적 자연주의’(empirical naturalism)52)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이 재구성된 경험 개념과 ‘창발’(emergence)53) 개념, 그리고 ‘초월’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철학사에 등장한 자연주의와 구별된다.54) 듀이에 따르면 “경험적 자연주의는 곡식을 까불러 고르는 하나의 키”55)와 같아서 지금까지 전통 철학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많은 것들에 대해 재검토하도록 하고, 현실적인 것과 비현실적인 것을 구분하는 척도로 작용한다. 이처럼 경험적 방법을 강조하는 듀이의 과학적인 방법은 과학자가 행하는 전문적인 실험실의 연구 방식을 따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과학주의나 환원주의, 그리고 물리주의 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듀이가 현실의 세계에 부적합한 초월적인 방법을 거부하고 경험적 방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확실해서라기보다는 우리의 경험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작용하며 초월적인 방법보다 안정적이고 공유 가능성이 더 많기 때문이다.

오늘날 다양한 경험 과학 분야의 통합적 탐구 형태인 인지과학은 “마음은 본유적으로 신체화되어 있고, 사고는 대부분 무의식적이며, 추상적 개념들은 대부분 은유적”56)이라는 것을 연구의 성과물로 내어 놓았다. 경험적 탐구 방식으로 수확한 연구 성과물들은 2,000년 이상의 선험적 방식에 의한 철학적 사유에 의문을 제기하고, 우리의 경험을 넘어서려는 사유 방식을 제약해 준다. 이러한 인지과학은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탐구를 경험적 방법으로 수행할 것을 강조했던 듀이의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확증해 준다.



5. 맺는 말


전통 철학의 문제점들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로티와 퍼트남, 그리고 듀이의 실용주의는 철학적 시각을 공유한다. 로티는 모든 탐구에 있어 경험적 방법의 우선성을 주장하는 듀이의 실용주의를 비판하고, 방법론 없는 실용주의를 주장한다. 이러한 로티의 방법론 없는 실용주의는 경험적 방법의 필요성과 우선성을 강조하는 듀이의 실용주의와 거의 화해될 수 없는 거리를 드러낸다. 이는 로티가 듀이의 철학적 입장을 강하게 오독함으로써 건설적이고 원리적인 측면을 비판할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험적 탐구 방식으로 수행된 인지과학은 듀이가 주장한 경험적 방법이 여전히 유용하고,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듀이 철학의 원리적인 측면에 대한 로티의 비판은 그릇되고 무의미하다. 로티는 듀이의 경험적 방법을 재검토하거나 수용할 때 자신에게 가해지는 상대주의라는 비판에 대해 적절히 대처할 수 있다.

로티가 상대주의자이며 비합리주의자라고 비판하는 퍼트남은 과학이 자연이나 실재의 거울은 아니지만 여전히 합리적인 기획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에 듀이의 경험적 방법을 거부하지 않는다. 퍼트남은 듀이의 실용주의를 포함한 실용주의 일반이 자신의 내재적 실재론의 관점과 거의 같은 맥락에 있다고 말한다. 듀이의 실용주의를 많은 부분 수용 또는 옹호하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퍼트남의 실용주의는 듀이의 실용주의와 정반대의 입장을 취한다. 왜냐하면 합리성의 옹호를 목표로 하고, “마음과 세계가 공동으로 마음과 세계를 구성한다”57)는 퍼트남의 내재적 실재론은 ‘전체론’적인 관점, 즉 연속성의 원리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듀이의 실용주의와 대립하기 때문이다. 연속성의 회복을 주장하는 듀이는 몸과 마음, 경험과 자연, 마음과 세계를 구분하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전통 철학의 유산물인 이성을 거부하고 ‘지성’ 개념을 사용한다. 따라서 퍼트남의 실용주의가 듀이의 실용주의와 유사하려면 퍼트남이 마음과 세계를 독립된 실체로 상정함으로써 ‘세계 자체’라는 풀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는 내재적 실재론을 포기해야만 한다.

듀이의 실용주의는 경험적 탐구 방법을 통해 세계의 일부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경험적으로 설득력 있게 해명하는 데 유용한 도구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철학적 열망에 의한 초월적인 주장과 선언을 제약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동한다. 나아가 경험적 방법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듀이의 실용주의는 우리에게 시간과 역사로부터 도피하려는 전통 철학자들의 노력을 비판적으로 고찰할 수 있도록 해주며, 동시에 그것은 전통적 사유에서 벗어난 이후에 우리의 삶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사유의 길을 열어 놓는다. 또한 듀이의 실용주의는 오늘날 철학이 당면한 문제, 즉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의 극단적인 대립 사이에 어떤 중간적인 가능성, 즉 제3의 철학적 입장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듀이의 실용주의는 여전히 현재성을 드러내며, 또한 그것은 닫힌 이론이 아니라 열린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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