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도덕적 위상과 도덕 공동체의 확장 문제
칸트 의무론의 환경윤리적 해석*
전남대 김 양 현
“포이에르바하의 열 한번째 테제를 바꾸어: 지금까지 환경윤리학은 새로운 윤리학을 모색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잘 알려진 도덕적 수단을 가지고 새롭게 대두한 문제연관들을 판단하는 일이다.”
오트프리트 훼페
1. 머리말
오늘날 철학자들은 생태계의 위기에 직면하여 환경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분석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제해결의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활발한 논의를 펴고 있다. 환경문제에 대한 최근의 철학적 담론에서 필자의 관심을 끄는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의 도덕적 권리 인정’에 대한 논의이다. 글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먼저 이들 문제에 대한 현재의 지배적인 견해를 압축하여 이렇게 표현해 본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간중심주의를 포기하고 자연의 도덕적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이 주장은 사실 환경문제를 다룬 많은 철학 문헌들 속에서 우리가 줄곧 접하는 테제일 것이다. 단순하게 보이기도 한 이 주장을 뜯어 보면, 그것은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경고성의 비판이나 자연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자는 감상적인 호소 이상의 메시지와 복합적인 문제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그 핵심 메시지는 한마디로 사유의 생태학적 전환에 대한 요청이라 여겨진다. 한스 요나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적지 않은 사고의 전환”1)을 요구하고 있다고도 하겠다. 달리 말해서 자연의 도덕적 권리 인정이라는 말마디가 시사하듯이, 그것은 “제2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 할 “의식의 혁명적 전환”2)을 요청하고 있으며, 또 그러한 의식의 전환이라는 조건하에서 저 주장의 내용이 실현 가능할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어떻든 환경윤리학의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보여 주듯이, 그것은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련의 이론적‧실천적인 어려움을 던지고 있다.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으로 비난‧비판되고 있는 인간중심주의 문제가 그렇고, 그것의 치료를 위한 도덕적인 전략으로 제시된 자연의 권리 인정의 문제가 또한 그렇다.
환경윤리학의 현재적 담론에 대한 이러한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필자는 이 글에서 그 핵심 논제들 중의 하나라 할 ‘자연의 도덕적 권리 인정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3) 아래에서 필자는 먼저 (2) 자연의 권리 인정의 문제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들을 도덕의 객체, 도덕적 위상, 도덕 공동체의 확장이라는 관점에서 풀어 보고, 그 귀결점을 음미해 볼 것이다. 그 다음으로 지금까지 주로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의 맨 앞 줄에 서 있었던 (3) 칸트의 인간중심주의적 윤리학을 긍정적인 차원에서 논의해 보고, 이를 바탕으로 그것의 환경윤리적 해석의 가능성을 밝혀 볼 것이다. 그리고 칸트의 인간중심적인 윤리학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토대로, 비록 거칠고 시론적이긴 하지만, (4) 인간과 자연의 도덕적 위상에 대한 이론을 전개해 볼 것이다.
2. 자연의 도덕적 권리 인정의 함의
우리는 자연의 도덕적 권리 인정의 문제를 서구 윤리학의 현재적 논의를 따라 도덕의 객체, 도덕적 위상, 도덕 공동체의 확장이라는 세 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음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들은 물론 한 몸의 지체들처럼 서로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들이다.
2.1 자연의 도덕적 권리 문제는 먼저 도덕의 객체라는 관점에서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근본 물음들은 이렇다: 자연이 도덕의 객체일 수 있는가? 자연이 인간의 의무의 대상인가? 우리는 어떤 자연 존재에 대해 도덕적 의무를 갖는가? 자연은 어느 정도로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가?
대부분의 환경윤리학자들은 근세적 전통의 윤리학을 ‘너무 인간 중심적이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비판의 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사람은 사람에 대한 의무 이외에는 어떠한 의무도 갖지 않는다”(MdS II A 106f)4)는 칸트의 말에서도 드러나듯이, 근세적 전통의 윤리학에서는 도덕의 주체가 도덕의 객체로, 의무의 대상으로 인정되었다. 스스로를 도덕법칙에 종속시킬 수 있는 자만이, 곧 의무를 따를 수 있는 자만이 도덕적 권리의 주체이며, 객체이다. 도덕을 ‘사람의 일’로 한정시킨 근거로 도덕적 행위능력인 이성, 자유(자율), 도덕감 등이 이야기되며, 도덕적 행위관계란 본질적으로 도덕적 행위능력을 소유한 사람들 상호간의 대칭적인 관계로 파악되었다. 따라서 도덕은 ‘사람의 일’이기에 도덕적인 행위능력이 없는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생명이 없는 자연물은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된 것이다.5)
근세적 전통의 윤리학은 도덕적 규범과 규칙의 타당한 범위를 사람들 상호간의 행위의 영역에만 한정함으로써,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무한히 자유로운 행위의 공간을 창출해 주었으며, 원했든 원하지 않았던 간에 결과적으로 사람의 자연이용이나 파괴행위를 도덕적 판단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사람의 자연실천을 무차별적으로 정당화시켜 주었다. 잘라 말해서 항상 사람의 이익과 욕구충족만이 여타 자연 존재의 이익관심에 앞서서 우선적으로 고려되었다. 전통 윤리학의 기본 구도와 그 귀결들을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전통 윤리학의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은 포기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아래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필자는 이러한 현재의 지배적인 견해가 근세적 전통의 윤리학을 너무 협소하고, 또 선택적으로 첨예화시켜 해석한 결과라 생각한다.
2.2 자연의 도덕적 권리 인정의 문제는 다음으로 도덕 공동체의 범위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되고 있다. 자연의 고유한 가치와 도덕적 권리가 인정된다면, 이제까지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 인간중심의 도덕 공동체의 범위는 수정되거나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도덕 공동체는 일반적으로 “동시대에 살고 있는 성인인 사람들(Personen) 간의 상호적인 의무에 의해 구성된”6)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도덕 공동체에 대한 이같은 일반적인 해석은 최근에 많은 사람들의 문제제기에 의해 불투명하게 되어 버렸다.
도덕 공동체를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갖는 동시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이해한 기존 해석의 문제는 한마디로 도덕 공동체가 너무 좁게 파악되고 있다는 점이다.7) 그것은 한편으로는 태아, 소아, 정신 장애자, 그리고 미래세대의 구성원인 사람의 일부를,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 이외의 자연 존재들을 배제하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 건강한 성인과 비교해서 육체적‧정신적으로 동등한 조건을 충족시킬 수 없는 소아, 또 사람의 보통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정신 장애자 등을 생각해 보자. 이들은 어쩌면 건강한 성인들보다 더 도덕적인 보호가 필요한 존재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합리적이지도 자율적이지도 않다는 이유로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이 아니다. 그들에 대한 도덕적 의무는 일방적이며, 호혜성의 원칙이 통용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생물학적인 의미로 사람이지만, 사람됨(인격성)의 원칙에 따라 보면, 아직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사람이 아니거나 그러한 능력이 결여된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펼칠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들은 도덕적 주체가 아니며,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아니다.8) 마찬가지로 미래세대의 구성원들도 현세대와 상호적이고 대칭적인 관계에 있지 않다. 그러나 미래세대에 미칠 환경문제의 심각한 영향을 생각하면, 우리는 미래세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9) 도덕 공동체에 대한 이같은 통상적 규정에 따르면, 그것은 가장 긴급하게 도덕의 보호가 필요한 인류의 구성원들을 배제하고 있는 셈이다.
현재 많은 환경윤리학자들은 사람과 동물은 물론이고, 나아가 자연 전체를 도덕 공동체의 영역내에 통합시켜야 한다고 급진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고통과 기쁨을 의식하는데 있어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는 동물에게 도덕적 위상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도덕적 직관에 모순되며10), 또 최소한 고등동물이 마음대로 다루어도 상관없는 ‘재료’가 아니라면, 도덕 공동체의 경계는 생물학적인 인간 종(homo sapiens)의 경계와 일치될 수 없을 것이다.11) 나아가 생태계의 위기와 연관해서 의식있는 동물뿐만 아니라, 식물이나 다른 자연 요소들(땅, 공기, 물 등)도 도덕 공동체의 영역으로 통합하여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3 도덕의 객체와 도덕 공동체의 확장의 문제는 결국 도덕적 위상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도덕적 위상은 한마디로 도덕적인 고려의 범위를 정하는 일이며, 사람의 의무의 대상을 분명히 밝히는 문제일 것이다. 이성적인 행위자만이 도덕적인 위상을 갖고 있고, 또 도덕적으로 고려될 수 있다는 입장이 여전히 지배적이지만, 최근의 환경윤리학의 논의는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들도 도덕적 위상을 갖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12)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의 도덕적 위상은 세계관, 이론적인 전제 등 각자의 입각점에 따라 상이하게 제시되고 있다. 현재 지배적인 입각점들을 간추린다면, 그것은 대체로 인간중심주의, 동물평등주의, 생명중심주의, 자연중심주의 등으로 압축될 것이다.13) 각 입각점들은 한마디로 사람, 동물, 모든 생명체, 모든 자연물에 각각 내재적 가치와 도덕적 위상을 부여한다.
인간중심주의적 입각점은 사람에게 다른 모든 자연 존재에 앞선 절대적이고 특권적인 우선권을 인정한다. 사람의 특수한 위치와 우월성은 사람만이 갖는 특별한 본성(이성, 언어사용, 자율 등)에 근거를 두며,14) 이를 바탕으로 사람에게만 내재적 가치와 도덕적 위상이 부여된다. 사람의 이성적 능력을 제일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인간중심주의와 달리, 사람이나 동물이 기쁨과 고통을 느끼고, 스트레스를 받는 기제에 있어 같다는 점에서 동물평등주의적 입각점은 감각능력의 유무(혹은 유정성)를 도덕적 가치부여의 기준으로 삼는다. 감각능력이 있는 모든 자연존재에게, 특히 고통을 의식할 줄 아는 고등동물에게 고유한 가치와 도덕적 위상을 부여한다. 이에 반해 생명중심주의는 “아픔을 느낄 능력이 없는 생명체도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생명에의 충동을 갖고 있으며, 또 생명보존과 생명의 완전한 전개에 관심을 갖는다”15)는 관점이다. 따라서 생명중심주의는 모든 생명체와 생명 그 자체에 고유한 가치와 도덕적 위상을 부여한다. 자연중심주의적(생태중심주의적) 입각점은 한 발짝 더 나아가 살아 있는 존재는 말할 것도 없고, 생명이 없는 존재까지를 포함하여 모든 자연물과 자연의 체계(혹은 자연적 질서나 균형)에 고유한 도덕적 가치를 인정한다.
현재의 논의에서 서로 경쟁하는 입각점들을 이렇게 구별하는 것은 각 입장의 경계를 그어 논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도식적인 구별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인간중심주의적 입각점을 예로 들어 보자. 인간중심주의는 인간에게만 도덕적 가치와 위상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어떤 특정 존재에게만 도덕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은 다른 여타의 존재를 배제하는 것이고, 또 그것들의 가치상실의 정당화로 귀결된다.16) 달리 말해서 인간중심주의의의 배타성은 사람이 아닌 모든 자연 존재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한 것으로 해석‧이해되는 것이다(동물중심주의적 입각점도 사람이나 고등동물 이외에 하등동물이나 식물 등의 도덕적 가치를 평가절하한 것이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중심주의적 관점은 결국 자연에 대한 사람의 도덕적 의무나 책임을 이론적으로 근거지우는 데에 취약하거나 그러한 여지 자체가 없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되어 왔다. 인간중심주의(특히,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이러한 협소한 이해와 해석을 필자는 잘못된 것으로 본다. 인간중심주의를 너무 협소하게 해석한다면, 그 귀결점은 뻔하다. 사람만이 도덕의 유일한 주체이며, 객체가 됨으로써 여타의 동물, 식물, 생명이 없는 자연 존재들은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릴 것이다.
널리 퍼져 있는 이러한 견해와 달리 필자는 도덕이 사람의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도덕적인 고려(보호)의 대상은 사람에 한정되지 않으며, 또 이는 인간중심주의의 틀 내에서 그 근거를 댈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도덕적으로 의무를 행해야 할 주체는 사람 뿐이지만, 도덕의 객체는 사람을 넘어서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에까지 그 범위가 뻗어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필자는 아래에서 칸트의 의무론을 새롭게 해석해 보려고 한다.
3. 칸트 의무론의 환경윤리적 해석
칸트 철학의 저변에 흐르는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의 특징은, 사람은 자신의 자연적 본성에 근거해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도덕성의 주체로서 세계와 전체 자연체계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점일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를 근세 철학의 다른 인간중심주의(베이컨이나 데카르트)와 구별시켜 주는 핵심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같은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여 환경윤리가 정초 가능하다는 점을 확신하고 있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칸트에게 자연지배의 정당성은 사람의 도덕성을 토대로 하며, 그 우월성과 특권은 특별권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과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들에 대한 특별한 의무와 책임의 강조라는 사실이다.17)
칸트에게 의무란 의지와 행위를 도덕법에 의해서 ‘강제’하는 것이다. 사람의 의지가 강제되어야 할 이유는, 달리 표현해서 의무가 외적인 강제이거나 내적인 자기 강제이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자연성, 유한성, 불완전성에 있다.『도덕형이상학원론』의 한 대목을 보면, 이러한 맥락을 잡을 수 있다.
(‧‧‧) 이성은 혼자 힘으로 의지를 충분히 규정할 수 없고, 또 의지가 객관적 조건들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 주관적 조건들(어떤 충동들)에 굴복한다면, 달리 말해서 의지가 그 자체로 이성에 완전히 합치하지 않는다면(마치 그런 일이 사람들에게 실제로 일어나듯이), (‧‧‧) 그러한 의지를 객관적인 법칙에 합당하게 규정하는 것은 강제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점에서 다 선한 것은 아닌 의지에 대한 객관적인 법칙의 관계는 이성의 근거들에 의해서 이성적 존재의 의지가 규정되는 것으로 표상된다. 그러나 이 의지는 이성의 근거들을 자신의 본성상 필연적으로 따르지는 않는다. (GMS BA 37f)
의무는 완전한 이성적인 존재자가 아니라, 한편으로는 감각존재자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성적인 존재자인 “이성적인 자연 존재로서의 사람”(MdS II A 2)을 향한다는 생각은 칸트 윤리학의 중요한 통찰이다. 자신의 이성과 자율적인 능력에 기초해서 사람은 도덕법칙을 인정한다. 도덕법칙의 객관적인 타당성은 사람이 도덕적 존재로서 자기 자신의 이익관심은 물론이고, 심지어 합리적으로 숙고한 이익마저도 상대화하여 도덕법칙에 따라 행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이는 사람이 “주관적으로 뿐만 아니라, 객관적으로도 도덕적 행위를 해야 할 의무가 있다”18)는 중요한 논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제로, 그리고 항상 도덕적으로 행위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도덕법칙을 따른다 해도, 마지못해서(억지로 혹은 자신의 심적인 경향을 거슬러) 따른다. 그렇다면 의무의 개념은 자기강제(법칙만을 표상하는)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MdS II A 2) 사람의 자연적 본성은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 장애요소이고, (부분적으로는 그것을 강력히) 방해하는 힘”(같은 곳)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들은 이성에 의하여 논박되고 극복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자연적인 본성에 맞서 의무를 이행해야 함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력의 도움으로 “법칙이 무조건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명령하는 바의 것을 할 수 있는 능력”(MdS II A 3)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서 사람은 행위의 주체로서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근거로 도덕적 요구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사람이 자신의 감각적 본성에서 비롯된 심적인 저항이나 반발심을 누르고 도덕법칙을 따라야 하는 이론적 뒷배경에는 “이성의 주체인 규범의 주체가 통찰한 의욕”19)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달리 말해서 왜 내가 도덕적으로 행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정당성은 “본래 내가 스스로 그것을 원한다”20)는 통찰에 근거를 둔다. 따라서 이러한 의지로부터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고, 타인의 이익을 고려하는 도덕적 요구에 스스로를 내맡기게 된다. 도덕적 요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집단의 이익을 상대화시키고, 결국은 종족의 이익조차도 상대화시키기에 이른다.21) 칸트 윤리학의 이같은 해석의 전망속에서 다음으로 칸트 의무론의 환경윤리적 적용 가능성을 자세하게 논의해 보자.
칸트는『도덕형이상학원론』에서 의무를 “자신에 대한 의무와 타인에 대한 의무, 혹은 완전한 의무와 불완전한 의무”로 나누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히고 있다. “의무의 구별은 앞으로 전개할 『도덕형이상학』을 위해서 전적으로 남겨진 문제이다. 여기서의 구별은 단지 임의적으로(나의 예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행한 것이다” (GMS BA 54). 칸트의 이러한 견해를 따라『도덕형이상학』에 나타난 의무의 구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칸트는 사람에 대한 의무(gegen den Menschen)와 무엇을 고려한 참작의 의무(in Ansehung auf)를 구별한다. 흔히 이를 ‘사람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와 ‘사람이 아닌 존재에 대한 간접적인 의무’로 구별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에 대한 의무와 사람 아닌 존재에 대한 의무, 곧 사람 이하(untermenschlichen)인 자연존재에 대한 의무와 사람 이상인(übermenschlichen) 존재에 대한 의무로 나눈다. 칸트는 초인간적인 존재로 신과 천사를, 사람 이하인 대상들로 단순한 자연 존재(광물)나 생식을 위하여 유기적으로 조직된 자연 존재(식물), 감각과 자의적인 능력이 있는 자연 존재(동물)를 예로 들고 있다.
“순전히 이성에 따라 판단해 보면, 사람은 사람(자기 자신 혹은 타인)에 대한 의무이외에는 어떠한 의무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주체에 대한 사람의 의무는 자신의 의지를 통한 도덕적 강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요하는(의무가 있는 또한 의무를 당하는) 주체는, 첫째로 인격체여야 하고, 둘째로 이 인격체는 경험의 대상으로 주어져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격체의 의지의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단지 실존하는 두 존재 상호간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다(왜냐하면 순전히 상상의 존재는 목적달성의 원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경험에 의하면, 사람이외에 어떤 존재도 의무(능동적이거나 수동적인)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 사람이 다른 존재에 대한 의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반성개념의 애매한 이중성에 의해 그렇다. 흔히 말하는 다른 존재에 대한 의무는 순전히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 다른 존재를 고려한 참작의 의무를 이 존재에 대한 의무로 혼동함으로써 저러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MdS II A 106f)
칸트에 비판적인 많은 환경윤리학자들은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의 강한 면모를 이 인용문을 전거로 내세운다. 사람 이외의 다른 존재에 대한 의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다름이 아니다는 칸트의 주장은, 도덕적 의무란 도덕법칙에 의한 의지의 강제이고, 도덕의 주체는 구체적인 경험대상이어야 하고, 동시에 이성적으로 판단할 줄 아는 도덕적 인격체여야 한다는 점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인격체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질 수 있는 주체이다”. (MdS I AB 22) 이 기준에 따르면,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들은 원칙적으로 도덕 주체의 범주에서 배제된다. 도덕적인 책임과 자기강제라는 점에서 책임질 능력이 없는 일군의 사람집단도 도덕적 의무의 주체의 집단밖에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칸트의 의무론은 “인격체중심주의(Person-Zentrismus)”라 할 것이며, 또 “도덕 주체의 원(Kreis moralischer Subjekte)”22)은 매우 좁게 그려져 있다. 물론 이같은 사실은 도덕 객체의 원도 주체의 원과 똑같이 협소하게 제한되어 있다거나, 또 그래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쉽게 넘겨짚어서는 안될 사항은 도덕 주체의 도덕 객체에 대한 관계일 것이다. 위의 인용문의 “실존하는 두 존재 상호간의 관계”라는 표현이 나타내듯이, 상호대칭 관계의 원칙, 곧 권리와 의무의 관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도덕적 의무에 종속시키는자가 도덕적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의무는 사실 항상 사람의 일에 속한다. 그렇지만 이는 도덕의 통용범위가 배타적으로 사람들 상호간의 관계에만 한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칸트는 도덕적 의무를 그 주체의 관점에서 인간중심주의적으로 강하게 근거지우고 있지만, 의무의 대상들은 사람만이 아니고 사람 이외의 자연 존재들을 넓게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도덕형이상학』의 「덕론」 제17절에서 칸트는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들을 고려한 참작의 의무를 논하고 있는데, 길지만 그 전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고려할 때, 비록 생명은 없을지라도 자연을 그저 파괴하려는 성향(파괴정신)은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를 거슬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 속에 내재한 어떤 감정 - 그것은 비록 그 자체로 도덕적인 것은 아니지만, 도덕성을 매우 촉진하고, 이용에 대한 의도없이도 최소한 무엇을 좋아하게 하는 데에(예를 들어 아름다운 크리스탈이나 형언할 수 없는 식물계의 아름다움) 마음을 쓰는 감성의 어떤 분위기 - 을 약화시키거나 제거하기 때문이다.
비록 이성은 없지만 살아 있는 피조물의 일부를 고려할 때, 동물을 난폭하고 잔혹하게 다루는 일을 삼가야 할 의무는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에 내적으로 훨씬 더 가까운 일이다. 왜냐하면 난폭하고 잔혹한 행위를 하면, 동물의 고통에 대한 사람의 동정심이 위축되고, 또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매우 이로운 자연적인 소질인 도덕성의 소질이 점점 약화되어서 결국은 없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동물을 신속하게(고통없이) 죽이거나 동물을 부림에 있어 그 능력을 넘어 무리하게 일을 시키지 않는다면(그런 짓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한 일은 인간에게 허락된 일이다. 이와 반대로 순전히 사변(추측)을 위하여 - 비록 그것이 없이는 목적이 달성될 수 없다고 하더라도 - 동물에게 무자비한 고통을 주는 생체실험들은 마땅히 피해야 한다. 오랫동안 (마치 한가족처럼) (주인에게) 충직하게 봉사한 늙은 말이나 개에 대한 고마움은 간접적으로 사람의 의무에 속하는 데, 그것은 곧 이 동물들을 고려한 참착의 의무(Pflicht in Ansehung dierser Tiere)에 속한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보면 이 의무는 항상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 (MdS II A 107f)
이 인용문을 잘 읽어 보면, 사람이 아닌 거의 모든 자연 존재가 우리의 의무의 대상으로 이야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23) 첫째로 우리는 직접적인 이용이나 이해관심과 상관없이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보호하고, 자연물들을 세심하게 돌보고, 파괴하지 말아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여기서 칸트의 말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여 칸트가 단지 자연의 아름다운 대상들만을 문제삼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 대상들은 물론이고, 다른 보통의 자연물이 문제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칸트는『윤리학강의』에서 모든 파괴주의(Vandalismus)를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직 사용할 수 있는 물건에 대한 사람들의 파괴행위는 아주 비도덕적이다. 누구도 자연의 아름다움을 해쳐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 필요 없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24)
둘째로 불필요하게 동물을 학대하거나 고통을 주어서는 안된다. 동물을 난폭하고 무자비하게 다루는 일은 비도덕이다. 칸트는 분명히 고통없는 죽임과 종에 상응한 대우와 보호를 옹호하며, 무자비한 생체실험을 비도덕적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특히, 단순한 사변이나 지적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한 실험의 부당성을 지적한다. 가축이나 애완동물은 동종의 다른 동물들보다 우선권을 갖으며, 그것들을 마치 한 가족처럼 다루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만약 개가 자기의 주인에게 오랫동안 충직하게 봉사해 왔다면, ‧‧‧ 나는 개에게 보답해야 하고, 더 이상 봉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끝까지 지켜 주어야 한다.”25) 물론 이러한 차별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사람의 감정적인 경험에 비추어 상응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위의 인용문에서는 직접 언급되어 있지는 않지만, 칸트는 현세대가 미래세대를 위해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달리 말해서 미래 인류의 자연이용과 그들이 입게 될 피해를 소홀히 해서는 안됨을 지적한다.26) 미래세대에 대한 칸트의 도덕적인 책임의 사상은 단편적이긴 하지만, 『세계 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의 한 대목에서 유추해 낼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본성상 인류가 앞으로 걸어갈 아득한 미래세계 - 그것을 확실히 예상할 수만 있다면 - 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다. ‧‧‧ 우리는 우리의 이성적인 주도와 행위를 통해 후손에게 주어질 행복의 시기를 앞당길 수 있으므로, 그 같은 무관심은 있을 수 없다.”27)
이같은 언급에 미루어서 우리는 칸트의 입각점을 토태로 어렵지 않게 미래세대에 대한 책임을 근거지울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기서 강조될 것은, 칸트의 윤리학에서 도덕적 판단은 시간적으로 제약되어 있다기 보다는, 오히려 초역사적이고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개념이라는 점이다.
‘왜 자연을 보존하고 보호해야 하는가’라는 그 근거에 대한 철학자들의 견해의 차이를 사상하고 보면, 필자가 방금 그 내용을 스케치한 칸트의 입장도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자연환경을 보호해야 할 근거이다. 칸트는 사람 이외의 자연 존재에 대한 의무를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로 환원하고 있다. 달리 표현해서 사람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의무가 있고, 사람 이외의 자연 존재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인간중심주의적 논변은 현재의 논의에서 여러모로 공격 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칸트와 같은 극단적인 인간중심주의의 입장은 더 이상 옹호될 수 없다. 익히 알려져 있듯이, 동물에 불필요하게 고통을 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동물에 대한 사람의 직접적인 의무이다.”28) 우리들의 감정적인 경험에 비추어 보아서도 그렇고, 또 동물이나 자연이 - 권리의 신장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 이제 권리를 인정받을 다음 ‘후보자’라는 논의29)에서도 그렇듯이,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의무란 말은 의심의 여지없이 자명한 것으로 들린다. 그러나 동물이나 다른 자연 존재에 대한 사람의 의무가 “직접적인‧일차적인” 의무인가 아니면, “도출된‧이차적인”30) 의무인가에 대해 명쾌한 답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다. 위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칸트에 가해진 비판은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에 대한 의무가 왜 직접적이지 않고 간접적인 의무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서 칸트 논변의 핵심점을 파악하기 위하여 필자는 위의 인용문의 동물에 관한 의무를 몇 가지 테제로 나누어 논의해 본다.
①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는 것은 도덕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동정심을 위축시킬 뿐만 아니라, 도덕적 소질을 약화시켜 결국은 아예 없애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긍정식으로 표현하면, 동물을 그 종에 합당하게 대하는 것은 도덕적 명령이며, 이 의무의 수행을 통하여 사람의 도덕감이 계발될 수 있으며, 사람은 자신의 도덕적인 완성의 길로 나갈 수 있다.
② 동물에 대한 사람의 의무는 단지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거나 혹은 인간성에 대한 간접적인 의무이다.
③ 동물에 고통이나 아픔, 스트레스를 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들의 직접적인 의무이다.
④ 동물에 고통이나 아픔, 스트레스를 가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동물에 대한 우리들의 간접적인 의무이다.
⑤ 동물에 대한 의무는 (간접적으로는) 사람의 의무이지만, (직접적으로는)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다. 달리 말해서 의무의 ‘실제적인 수행’이라는 점에서 사람의 의무이지만, 의무를 ‘수행할 수 있는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혹은 타인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
동물에 대한 의무의 근거가 제시된 테제 ①은 두 가지 점으로 나누어 해석될 수 있다. 그 하나는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지 말라’는 도덕적 명령일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 ‘만약 이 명령을 어기게 되면, (동물이 상처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람의 도덕적 소질이 약화되거나 아예 없어져 버린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해석가들은 괄호 친 부분을 뺀 후자를 의무의 결정적인 근거로 이해해 왔다.31) 이렇게 보면, 칸트의 윤리학은 급진적인 인간중심주의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이와 달리 해석될 여지는 없는가?
‘동물을 결코 잔혹하게 다루지 말라’는 위의 명제는 의무를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칸트의 의무 개념이 강제적 성격을 담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의무는 도덕적인 명령에 의한 강제이고, 의지의 강요이다. 칸트에게 의무는 그것이 사람에 대한 의무이든지,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를 고려한 참작의 의무이든지 간에 그 자체로 “법칙(우리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도덕적 명령으로서)에 의한 객관적 강제”(MdS II A 98)이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위의 두 번째 진술은 의무의 침해문제와 의무의 근거문제를 함의하고 있다. ‘동물을 잔혹하게 다루지 말라’는 의무가 침해된다면, 먼저 동물이 손상을 당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사람의 도덕감의 발전에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론 이 후자를 결정적인 의무의 근거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동기라는 의미에서 근거”로 이해될 수 있는데, “동기는 다른 종류의 근거이고, 즉 어떤 행위나 행위방식을 옹호하는 근거이다.”32) 이러한 분석적인 해석을 통해 필자가 얻은 귀결은 이렇다. 의무의 수행을 유도하고, 사람의 심성속에 있는 도덕감의 부단한 발전에 기여할 도덕 교육론적인 동기로서의 근거가 전면에 강하게 내세워져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인간중심적인 색채의 동인 이외에 동물에 불필요한 고통과 손해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의무의 명령 그 자체를 함께 읽어 내야 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동물에 해를 입혀서는 안될 근거는 다분히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에서 간접적인 방식으로 제시되고 있지만, 동물에 대한 의무의 실제적인 수행은 사람의 동물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인 것이다. 간접적이라는 말마디는 단지 이 의무관계의 도덕론적인 설명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 필자의 이같은 해석의 입각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진다면, 그 동안 대부분의 해석가들이 배타적으로 행한 직접적인 의무(테제 ③)와 간접적인 의무(테제 ④)의 구별은 문제의 사태 자체에서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간접적인 의무와 직접적인 의무의 구별은 테제 ⑤의 해석 방향에서 이해될 때, 그 의미가 충분히 살아난다고 하겠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의무를 사람의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로 환원시키는 입장을 표현한 테제 ②도, 사람의 의무를 사람의 도덕성, 자유, 이성에 재귀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는 칸트의 기본적인 입각점에 기초해서 풀이되어야 한다.
간단히 다시 정리해 보면, 사람이 아닌 다른 자연 존재에 대한 의무는 사람의 의무에 속한다. 그러나 도덕이론의 관점에서 ‘의무 수행의 실제적 주체가 누구냐’는 물음에서 보면, 그 의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거나 타인에 대한 의무일 뿐이다. 필자의 이상의 해석이 동의 가능한 근거를 갖고 있다면, 칸트의 인간중심주의는 “종족이기주의”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4. 사람과 사람이 아닌 자연의 도덕적 위상
지금까지 칸트 윤리학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인 혹은 그 능력을 갖는 사람만이 도덕적인 의무와 권리를 소유하며, 또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는 식으로 좁게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해석은 도덕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지만, 오늘날 새롭게 대두한 생명의료의 문제나 환경문제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도덕의 주체와 객체를 엄밀히 나누어, 이를 바탕으로 사람과 사람이 아닌 자연의 도덕적 위상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론적인 시도는 물론 칸트의 의무론을 오늘의 관점에서 폭넓게 해석한 결과로 필자가 얻은 귀결점들을 저변에 깔고 있다.
도덕적 위상(moralischen Status) 문제는 어떤 존재가 도덕적 요구를 갖는다라고 말하기 위해서 그 존재가 어떤 본질적인 특성과 능력을 갖고 있는냐는 물음과 관계한다. 동물 윤리학자인 아하(Ach)는 완전한, 제한된, 도출된 도덕적 위상을 구별하고 있다. (1)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능력과 특성을 갖는 모든 존재는 “완전한(vollen)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 (2)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은 아니지만, 일정한 관점에서 도덕적 고려를 할 가치가 있는 모든 존재는 “제한된(beschränkten)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 (3)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은 아니지만, 도덕 공동체의 존속을 위해 우리가 의무의 대상으로 삼는 모든 존재는 “도출된(abgeleiteten)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33) 필자는 도덕적 위상에 대한 이러한 개념적 구분의 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들을 더욱 자세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즉, 완전한-상호인격체적, 잠재적-상호인격체적, 인격체-유추적, 제한된, 도출된 도덕적 위상이 그것이다.
(1) 완전한-상호인격체적 도덕적 위상: 도덕적 행위 능력, 곧 이성, 자유, 자율 등의 능력을 소유한 모든 존재는 이러한 완전한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 항상 도덕적으로 행위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의 도덕적 행위자로서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도덕적으로 행하는 것을, 선해야 함을 서로 요구할 수 있고, 또 마땅히 요구해야 한다는 조건에서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다. 따라서 ‘현재’ 도덕적으로 행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특별한 의무를 갖는데, 도덕적인 행위능력이 없는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에 대한 도덕적 책임을 진다.
(2) 잠재적-상호인격체적 도덕적 위상: 도덕적 능력이나 책임질 능력이 아직 없는 존재, 또 그런 한에서 아직 완전한 도덕적 주체가 아닌 모든 존재는 이러한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 이들은 현재의 시점에서 도덕적 능력을 갖진 않지만, 미래적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간주해도 좋은 도덕적인 행위의 잠재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갓난 아이를 포함하여 어린이와 미래세대는 미래적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으로 간주된다. 이들의 도덕적 권리는 변호적인 방식으로 고려된다. 다음세대와 미래세대에 대한 도덕적 책임은 우리 현세대가 부담해야 할 긴급한 과제이다. “각 세대들은 미래에 대한 책임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교육하는 방식으로 전수해야 한다.”34)
(3) 인격체-유추적 도덕적 위상: 인간 종에 속하긴 하나 도덕적으로 행위 할 능력도 없고, 또 그러한 능력을 미래에도 전혀 갖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존재가 이같은 도덕적 위상을 갖는다. 예컨데, 정신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도덕적으로 행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격체-유추적으로, 마치 그들이 도덕 공동체의 구성원인 양 취급될 수 있다. “협력이 불가능한 사람들을 그들이 인간 종족임을 근거로 상호 협력하는 도덕 공동체의 성원으로서 통합시켜”35) 이해 할 수 있다. 이들은 도덕 공동체의 ‘유사적 구성원(Quasi-Vollmitglieder)이다.
(4) 제한적인 도덕적 위상: 사람이 아니지만 감각하며, 고통을 의식할 수 있는 존재, 즉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은 아니지만, 도덕 유추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할 동물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는 다른 자연 존재들보다 동물들에게 강한 정서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의 행위나 태도에 있어서 동물을 고려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이나 아픔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동물들에 대한 비대칭적인 의무를 갖는다. 도덕의 주체와 객체의 비대칭적이고, 일방적인 관계라는 점에서 우리는 동물을 도덕 공동체의 ‘유사적 준구성원’(Quasi-Mitglieder)이라 부를 수 있겠다.
(5) 도출된 도덕적 위상: 하등동물, 생물, 무생물 등은 비록 도덕 공동체에 속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도덕 공동체의 건강한 유지를 위해 자연 존재들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 있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자연의 보존과 보호, 그리고 성장에 도덕적 책임을 갖고 있다. 물론 우리의 책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전체 자연의 생태학적 운행과 균형에까지 뻗어 있다. 이는 사람의 생존뿐만 아니라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의 장기적인 안정을 도모하는 조건이 되며, 그러한 조건하에서 사람의 생명과 삶이 지속적으로 보장된다.
필자는 이상에서 ‘진정한 의무의 주체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을 축으로 사람과 사람이 아닌 존재들의 도덕적 위상을 구별해 보았다. 이를 도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존재 |
도덕적 위상 |
도덕적 능력 |
구성원의 종류 |
|
성숙한 사람 |
완전한-상호인격체적 |
갖고있음(현실적) |
완전한 구성원 |
|
태아, 소아, 미성년자, 미래세대의 구성원 |
잠재적-상호인격체적 |
갖고있음(잠재적) |
미래의 완전한 구성원 |
|
정신장애자, 의식불명자 |
인격체-유추적 |
갖고있지 않음 |
유사적 구성원 |
|
고등동물 |
제한적인 |
갖고있지 않음 |
유사적 준구성원 |
|
하등동물, 식물, 그밖의 자연존재 |
도출된 |
갖고있지 않음 |
구성원이 아님 |
이같은 도덕적 위상들에 대한 필자의 구별은 그 경계긋기에 무리가 있고, 인위적이다는 점에서 일정한 취약점을 안고 있다. 물론 모든 경계긋기에서 이러한 인위성은 전적으로 배제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지움은 일정한 이점을 제공한다. “(경계)선은 이렇게 혹은 저렇게 그어질 수 있다. 일정한 방식으로 선을 그음으로써 우리는 많은 것들을 이전보다 더 분명하게 총괄하며, 또한 다른 문제들로부터 분리하게 된다.”36) 위의 경계긋기의 불충분성에도 불구하고 필자의 모델은 몇 가지 점에서 이점을 가질 수 있다.
(1) 이 모델은 도덕적 인간중심주의가 너무 배타적이라는 비난, 즉 인간만이 도덕적 위상을 갖고, 그런 한에서 인간 종족에 속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도덕적인 고려의 결정적인 이유이다는 비난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도덕적인 능력이 있는 도덕의 주체와 그 능력이 없는 도덕의 객체라는 구별의 관점에서 각 존재의 도덕적인 위상을 각각 다르게 규정한다면, 사람이 아닌 자연 존재들도 각기 어떤 도덕적인 위상을 갖게 된다. 각 존재들이 어떤 도덕적 위상을 갖느냐는 문제는, 한편으로는 그것들의 자연적인 속성에 달려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몇몇의 다른 기준에 달려 있다. 예컨데, 관련 존재가 현실적으로 아니면 잠재적으로 도덕적 주체인가 아니면 결코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없는가, 그들이 어느 정도로 우리의 감정적인 경험의 대상인가 등에 달려 있다.
(2) 무엇보다도 이 모델의 장점은 인간중심주의의 틀 내에서도 사람이 아닌 자연존재에게 도덕적 위상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 모든 사람이 아니라, 단지 성숙한, 책임질 능력이 있는, 자율적인 인격체가 도덕 공동체의 주체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도덕적인 책임의 심급이 명료해 졌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 칸트의 ‘인격체중심주의’에 상응하는 해석이다. 도덕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다는 의미도 지금까지의 견해와 달리 해석되었다. 즉, 그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개체로서 권리와 의무의 대칭적 관계에 있다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만이 도덕의 주체로서 아직 도덕의 주체가 아닌 존재나 결코 도덕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떠 안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내에서는 권리와 의무의 대칭적 관계뿐만 아니라, 도덕적 능력이 없는 존재나 자연존재에 대한 비대칭적 의무가 존재한다는 점이 부각되었다. 결과적으로 도덕 주체의 원 속에 포함된 사람들에게는 그밖의 존재들에 대한 특별한 의무와 책임이 부과된 셈이다. 이러한 귀결을 달리 표현해 보면, “상호 협력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나 의사소통 능력이 없는 동물들을 (거의 귀족적이라 할) 도덕의 주체 영역에 포함시키자는 논의를 하는 대신에, 반대로 우리는 행위 능력이 있는 인격체의 요구들을 객체와 그 요구들의 포괄적인 원 속에 위치지울 수 있을 것이다.”37) 달리 말해서 넓게 그려진 도덕의 객체(의무의 대상)의 원 한 가운데에 도덕의 주체의 원이 자리잡고 있는 꼴이 되겠다. 이를 필자는 ‘인간중심적 전일주의’라 특징지운다. 필자는 현재의 수준에서 이같은 인간중심적 전일주의(全一主義 Holismus)를 환경윤리의 유효적절한 이론 틀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다른 기회로 미룬다.
5. 맺음말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해 봄으로써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분명히 하려고 시도했다. 칸트의 도덕적 인간중심주의는 도덕 주체의 관점에서 보면, 강한 인간중심주의나 혹은 인격체중심주의로 이해되어야 겠지만, 도덕 객체의 관점에서는, 곧 도덕의 타당성의 범위나 혹은 도덕적인 책임의 대상에서 보면, 그것은 인간중심적이 아니라, 오히려 전일주의적 색채를 띄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현재 요나스를 위시하여 많은 학자들의 주도적인 견해인 ‘전통 윤리학의 “가차없는 인간중심주의”는 포기되어야 한다’38)는 주장에 필자는 무임승차 할 생각이 없다. 윤리학의 인간중심주의적 기초가 반듯이 포기되거나 수정되어야만 자연속에서의 인간의 행위를 조절하고 통제할 환경윤리의 원칙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윤리학의 인간중심주의의 틀 내에 머물면서도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의무와 도덕적 책임을 충분히 근거지울 수 있다고 본다. 잘라 말해서 필자에게 인간중심주의나 인간중심주의적 윤리학은 딛고 넘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직면한 문제상황에서 새롭게 음미해 보아야 할 개념인 것이다. 서두에 이 글의 모토로 인용한 회페의 지적처럼, “새로운 윤리학”을 찾을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윤리학의 원칙을 적용하고 응용하여 새롭게 대두된 문제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 보는 것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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