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05 금요성령집회 / 박종광 목사
말씀 : 고린도후서 12:7-10
제목 : 장애물 달리기
(10절)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저희들의 삶과 믿음을 지켜주셔서 여름이 시작되는 6월 첫 금요일에 저희들을 기도의 자리로 불러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감사의 마음을 담아 주님 앞에 드린 예물들을 기쁘게 받아주시고
이 예물이 쓰이는 곳마다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하시며 드린 이들의 그 드려진 빈손 위에 복에 복을 더하셔서
그 빈 것이 오히려 채워지고 넘쳐나는 은혜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부족한 종의 입술에 주님 말씀 맡기셨사오니 말씀 나눌 때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게 하시고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은혜가 채워지게 하시며
바라고 원하는 마음의 소원들이 함께 이루어지고 해결되는 놀라운 역사가 이 밤 있게 하여 주시옵서,
이 모든 간구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의 놀라운 은혜와 평강이 더워지는 여름에도 여러분의 인생에 충만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옆의 분과 한번 인사하겠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축복합니다!"
요즘 건강을 위해서 달리기를 하는 분들을 많이 봅니다.
최근 부평 성전 앞에 신설된 도로 옆 인도에도 달리기를 하는 분들을 종종 보게 돼요.
저도 운동을 좀 해 보려고 숨이 차도록 한번 달려 봤습니다.
더 달렸다가는 내일 사역을 못 하겠다 싶을 정도로 숨이 차게 달리고 얼마나 달렸나 시간을 보니까 30초 달렸더라고요.
더 체력을 좀 키워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올해 안에 1분 달리기를 목표로 정진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달리기를 할 때 어떻게 달려야 하겠습니까?
최대한 옷차림을 가볍게 하고 손에 뭐 든 것 없이 최대한 평평하고 잘 정돈된 길을 달려야만 쉽게 달리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달려도 달리기가 힘든데, 만약 여러분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다면
여러분의 어깨에 어떤 무거운 무언가가 지워져 있다면 달리기가 많이 힘들 것입니다.
우리 올림픽 종목에도 장애물 달리기가 있습니다.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경기가 있는데, 바로 3000m 남자 달리기라고 해요.
여러분, 이 장애물 달리기가 일반 달리기와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제가 살펴보니까, 최정상급 선수들이 달리기를 하면
같은 3000m를 달릴 때 일반 달리기와 장애물 달리기를 한 선수와는 한 30초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여러분, 30초가 얼마나 긴 시간이지 아시겠죠?
제가 숨이 차 죽기 직전까지 달린 시간이 30초잖아요. 그러니까 굉장히 많은 차이가 나는 거예요.
이 장애물 달리기는 트랙 한 바퀴가 보통 400m 정도 되는데,
400m를 도는 동안 70cm 정도 되는 장애물을 세 개를 넘고, 또 물웅덩이를 하나 넘고 그렇게 꽤 여러 번을 돌아야 3000m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반 달리기를 한 선수와 그래서 30초 정도의 차이가 나는 거죠.
이 육상 경기는 1초를 가지고 순위가 바뀌고, 1초 안에도 몇 명이 동시에 들어오는
그런 기록 싸움이기 때문에 이 30초라는 시간은 아주 긴 시간인 겁니다. 그런데 일반 달리기에 비해 이 장애물 달리기는 참 고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데 점프를 해야 하고, 또 몸은 무거운데 물웅덩이에 발을 적셔야 하기도 합니다.
그런 경기가 바로 장애물 달리기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우리 인생을 마라톤 또는 오래 달리기에 비유하곤 합니다.
여러분도 인생 길 걸어가면서 내 인생이 마라톤 경주 같다라는 생각을 하신 적 있으실 텐데 여러분의 인생 달리기는 어떻습니까?
잘 정돈된 길에서 가벼운 옷 입고 좋은 체력 가지고 그냥 마냥 잘 달리는 것 같으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인생 길이 마치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의 무거움이 있으십니까?
왜 장애물 달리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까? 그것은 다름 아닌 여러분을 힘들게 하고, 또 여러분을 불편하게 하고,
여러분을 괴롭게 하는 무언가가 여러분 주변에 또 여러분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 괴롭게 하는 것, 힘들게 하는 것, 그것들을 우리는 성경에서 '약함'이라는 단어로 만나게 됩니다.
우리 인생 곳곳에 숨어 있고, 내 인생 길에 놓여있고, 또 내 육신 안에, 내 마음속에도 있는
나를 불편하게 하고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그 무언가를 우리는 '약함'이라고 부릅니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약함, 가장 대표적인 장애물을 꼽으라면 아마도 우리 육신에 찾아온 질병, 연약함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만 없다면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만 없다면 내가 좀 더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것만 없다면 정말 좋을 것 같은데,
자꾸 이것 때문에 내가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고 그 자리에 그냥 주저앉아 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육신에 찾아온 질병을 비롯한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이 약함들을 우리는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고 또 장애물이라 부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하나님 제발 이것 좀 없애 주세요' 하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일 감당하는 데 있어서, 내 가정과 일터의 일을 돌보는 데 있어서,
그리고 인생 길 살아가는데 너무 큰 걸림돌이고 너무 큰 장애물이 되니까 이 약함을 거두어 달라고 여러분들 기도해 본 적 있으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가 부족해서 그런 걸까요? 아니면 우리 믿음이 아직 연약해서 그런 걸까요? 쉽게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긴 시간 기도해도 해결되지 않는 약함의 문제, 장애물의 문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대부분 있더라는 겁니다.
오늘 우리는 읽은 본문에서 우리가 너무나 위대한 사도라 부르지만
자신에게 찾아온 약함의 문제로 괴로워하고 힘들어했던 한 사람의 고백을 듣게 됩니다.
바로 사도 바울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그 약함, 그 약함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리가 약함이라고 많이 듣는데, 그 자세한 의미를 한번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네 번이나 반복돼서 나오는 '약한' 또는 '약한 것'이라고 번역된 이 말의 본래 뜻은 두 가지의 단어가 더해진 말이라고 합니다.
첫 번째는 '없다'라는 말이 그 앞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힘'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합니다.
'약함'이라고 번역되는 성경에 나오는 헬라어 '아스테네이아'라고 하는 이 말은
'아'라고 하는 말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테네이아'는 '힘'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 '약함'의 본래 뜻은, '힘이 없는 것', '힘 없음'이라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이 없으니까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력해지겠지요. 힘이 없으니까 연약해지겠지요. 힘이 없으니까 병이 들겠지요.
힘이 없으니까 좌절하고 낙망하고 가라앉고 주저앉고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되겠지요.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약함'이라고 번역된 이 말의 본래적인 의미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단어가 성경에서 특히 신약 성경에서는 굉장히 여러 가지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먼저 누가복음 5장 15절에는 이렇게 번역이 됐습니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
병이라고 번역됐습니다. 기본적으로 질병, 육체적 병, 질환으로 번역이 됐습니다.
로마서 8장 26절,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연약함'이라고 번역된 말도 같은 단어의 번역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존재 자체의 연약함, 우리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 뜻대로 살아갈 수 없는 그런 상태,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갈 수 없고 이루어낼 수 없는 연약함을 가진
우리 인간 존재의 그 자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 이 '연약함'이라는 말입니다.
또 이 단어는 이렇게도 번역이 되었습니다. (히 7:28)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약점'으로도 번역이 됐습니다. 여기서 '약점'이 가리키는 것은 죄에 쉽게 흔들리는 상태, 불완전함,
영적으로 쉽게 흔들리고 무능한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약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약함은 결국 우리가 기본적으로 들을 때,
기본 의미나 더 나중에 확장돼서 번역된 의미나 어떤 것이든 우리가 별로 좋아할 만한 게 없습니다.
힘 없음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연약함, 무능함, 불완전함, 약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다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그런 의미는 하나도 없는 단어가 바로 이 '약함'이라고 번역된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 장애물로만 여길 수밖에 없는 이런 약함을 문제는 왜 그런 귀한 사도인 바울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셨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믿고자 몸부림치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 왜 허락하셨느냐는 겁니다.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어떤 상황 속에서 바울이 이 약함의 문제를 꺼냈는지 대략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감정적이고 격정이 담긴 논쟁적인 어투로 쓰여진 편지로 알려져 있어요.
왜냐하면, 이 고린도후서를 읽어 보면, 바울이 공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데 단순히 어떤 개인적인 공격을 받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세운 고린도교회 안에 바울을 반대하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율법을 꼭 지켜야 한다는 등 여러 가지 바울이 가르친 것과는 다른 것을 가르치며 공격하는
그런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와서 바울을 뒤흔들고, 바울이 가르치는 성도를 뒤흔들고, 교회를 뒤흔드는 그런 상황들이 생겼던 겁니다.
고린도후서 11장 13절에 보면,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거짓사도', 또는 '속이는 일꾼'이라고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표현할 정도니까 그 사람들의 공격, 그들의 말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 수가 있는 것이지요.
또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 보면, 그들이 직접 바울을 향해 했던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고후 10:10)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사도 바울을 두고 '그 사람 뭐 글은 좀 쓸 줄 아는 것 같아. 글로는 좀 힘이 있어.
그런데 대면해 보니까 너무 약해 빠졌네. 그리고 말하는 것도 말재주가 그리 대단하지 않네'
그렇게 그 사람들이 바울을 평가하고 비판하고 공격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고린도가 속한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는 웅변술, 수사학, 말을 잘하는 능력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능력은 단지 말 잘하는 재능 하나 정도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얼마나 교육을 받은 사람인지, 그리고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한지,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는지
그리고 철학자 또는 교사다운 면모가 있는지를 그 사람의 말하는 능력을 통해서 평가했습니다.
그래서 대중 앞에서 연설하고 토론을 잘하는 사람들을 지도자의 필수 조건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를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낮게 평가하는 그런 문화가 그 당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당시 그 사람들의 문화적 기준으로 볼 때 그렇지 못했다라는 거예요.
또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7절에서 자신의 육체에 어떤 가시가 있다고, 사탄의 사자가 있다고,
그렇게 불릴 만한 약함이 있다고 스스로 고백을 합니다.
그리고 글을 쓰는 능력에 비해서 말 재주도 그리 화려하지도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바울의 반대자들은 사도 바울을 두고 저렇게 약해 빠지고 말재주도 별로인 사람이 무슨 능력 있는 사도냐고,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을 어떻게 믿고 따를 수 있느냐고, 그런 사람이 어떻게 이 고린도교회의 리더라고 할 수 있겠냐고 공격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도 바울 한 사람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그가 전한 복음까지도 공격을 하고 흔들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공격받고 있는 그 상황이 무척 괴로웠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그 약함 때문에 복음 사역까지도 방해를 받고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단지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대적자들)의 비난과 멸시와 공격만이 바울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당장 바울 자신에게 있는 그 육체의 가시도 사도 바울을 너무 힘들게 하는 문제였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떠나서, 스스로가 너무 힘든 문제였던 거예요.
7절에 '가시'라고 번역된 이 말의 뜻은 말 그대로 '말뚝', '뾰족한 것' 그런 의미입니다.
뭔가 찌르는 어떤 무언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정확히 그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에 따라서 그것을 육체라고 표현했기 때문에 어떤 질병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정확히 질병으로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힘들게 하는 대적자들, 그를 공격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석을 하기도 하고,
또 뒤에 나와 있는 '사탄의 사자'라는 표현 때문에 어떤 영적인 공격이 있었다라고 그렇게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든 중요한 것은, 이 '가시'라는 것은 바울을 찌르는 괴로움을 주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떠나지 않고 바울을 계속해서 힘들게 하는 무언가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에 있는 '사탄'이라고 하는 말은 본래 대적자, 고소하는 자라는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자'라고 번역된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심부름꾼을 상징하는 그런 말입니다.
'앙겔로스'라는 말인데, 천사를 가리키는 영어 단어 '엔젤'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사탄의 사자'라는 말은, 대적자의 메신저, 대적자의 심부름꾼, 대적자로부터 온 심부름꾼, 하수인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탄의 사자가 나를 쳤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 "쳤다"라는 것도 그냥 한번 건드리고 갔다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아주 심각하게 주먹으로 후려치는 것을 가리켰던 그런 표현, 괴롭혔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지금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영적으로든
자신을 찌르고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무언가로부터 반복적으로 맞고 있는 상태인 겁니다. 지속적으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던 겁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그 약함이라는 것은 단지 힘이 좀 없는 그 정도가 아니라 너무너무 괴롭고 너무너무 수치스럽고
빨리 지금 당장 하루라도 빨리 나에게서 사라졌으면 하는 그런 인생의 커다란 장애물처럼 여겨지는 그런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 말씀에 보면,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했다"라는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바울은 '아, 내가 이것만 없으면 좀 더 잘 달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약함 때문에, 이 가시 때문에 내 권위가 흔들려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랑하는 성도로부터 무시 받으면 안 되는데'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중요한 내용은, 사도 바울 역시 본래 이 약함이라는 것을 좋아했던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습니다. 고통을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연약함이 있었고, 그도 장애물 없는 순탄한 길을 달리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도 우리처럼 인생의 장애물, 인생의 걸림돌 없이 주어진 선교 사역을 감당하고 싶어했을 겁니다.
그러니 세 번이나 간절하게 간구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이 '세 번'은 단지 숫자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사도 바울의 간절함,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깨닫기 위함이라는 그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면서 정말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왜 이 고통을 이 약함을 나에게서 가져가지 않으시는지 간절하게 그 뜻을 구했던 겁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찾아오는 이런 약함의 문제를 두고 기도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을 만나서 심방하고 면담해 보면 사실 이런 대부분의 약함의 문제, 인생의 장애물의 문제 때문에 기도제목을 나눕니다..
너무 잘 돼서 돈 쓸 데가 없다고 하는 분은 거의 못 봤습니다. 힘이 남아돌아서 어디 힘쓸 데 좀 없냐고 그런 분들 별로 못 봤어요.
다 인생의 장애물 문제 때문에 이 약함의 문제 때문에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대체로 이 약함 때문에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까 두렵다고 말씀하시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이렇게 아프면, 이렇게 내가 힘들고 연약하고 무능해서 지속적으로 괴롭힘 당하고 고통받고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 믿어도 별 수 없지 않냐'고 그럴 거 아니냐고...
아직 하나님을 모르는 내 가족들, 내 친구들, 내 지인들, 직장 동료들이 그럴 거면 하나님 뭐하러 믿느냐고,
주일마다 뭘 그렇게 교회를 가고 봉사를 하고 그러느냐고 그럴 거 아니냐고..
만약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면 제가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여러분, 그게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고민이지 않습니까..
전도를 위해서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제발 이 약함을 좀 거두어 달라고 우리 간절하게 매일마다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른 세상 사람들을 전도하는 것, 일단 그런 거는 둘째 치고라도 사도 바울처럼 사실 우리 자체가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육신의 약함 때문에 뭔가 정신적으로 마음적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문제들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사실 너무 견딜 수 없이 괴롭고 힘들어요.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너무너무 힘든 문제들이 많습니다. 육신의 질병의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분은 아마 그러실 거예요. 너무 약함이 많아서 병원 가는 것을 학교 가듯이 한다고.. 병원 가는 것을 직장 다니듯이 하고 있다고..
10시에 정형외과, 11시에 이비후과, 점심 먹고 잠깐 쉬었다가 2시에 안과, 3시에 치과, 4시에 내과, 저녁 7시에 한의원..
손녀가 이렇게 질문할까 봐 두려우신 분도 있을 거예요. '할머니는 병원에 입학한 거야?'
어쩌면 손녀가 그렇게 글을 쓸까 겁나는 분도 있을 거예요.
시 제목 "아침이 되면"
'아침이 되면 아빠는 회사에 갑니다. 엄마는 가게에 갑니다. 나는 유치원에 갑니다. 할머니는 병원에 갑니다.'
부흥회를 통해서, 성경필사 통해서, 대심방, 새벽기도 통해서 어떤 분들은 치유받고 고침 받았다는 얘기도 들리는데,
가정의 큰 고민거리가 해결되었다는 분들의 간증을 듣기도 하는데, 왜 제게는 응답해 주지 않으십니까?
하나님, 제 헌신이, 제 믿음이 아직 하나님 기준에 못 미쳐서 그런 겁니까?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헌신하고 어느 정도까지 제 믿음을 키워야 응답해 주시는 거냐고..
어떤 분은 '하나님이 이제 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그런 얘기도 하십니다.
제게는 별로 관심도 없으신 것 같고, 나를 잊으신 것 같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어요.
그런 하나님 때문에 서운하고 속상하고, 교회에 나오면 기쁨으로 말씀 듣고 기쁨을 누리다 가야 되는데
그저 눈물밖에 안 나온다는 분도 계십니다.
교회 오면 매일 울다 간대요. 그 울음이 하나님 앞에 서운해서 '아이고 서운해' 이러면서 울다 가신대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그냥 달려도 힘든 인생 길인데요. 왠지 제 앞에 하나님이 이런저런 장애물까지 계속 놓아 주시는 것 같아서,
그 장애물을 세상이 놓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놓아 주시는 것 같아서 그게 더 힘들다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달려가는 이 길이 그냥 달려도 힘든데 장애물 달리기 같다고, 특히 내 앞에는 너무 많은 장애물이 있는 것 같다고..
장애물을 넘어서 큰 장벽이 나를 막고 있는 것 같다고, 도저히 내 힘으로는 넘을 수 없는 그런 장벽이 내 앞에 있는 것 같아
한 걸음도 더 나가기가 어렵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여러분, 복음성가 중에 이런 찬양 아시죠?
♬ 주님은 너를 사랑해~ 주님은 너를 사랑해~
그런데 여러분, 이런 약함의 문제로 많이 힘들어하는 분들은 이 찬양이 이렇게 들린대요.
주님은 나를 싫어해~ 주님은 나만 싫어해~ 너무 괴로워서 환청으로 바뀌는 거예요.
아마 사도 바울도 우리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그도 사람이기 때문에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성도들 보기에 덕도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오늘 본문 8절에 나오는 것처럼, 이 약함 좀 내게서 떨어져 나가게 해 달라고
최근에 번역된 새한글 성경에 보면 이렇게 번역이 돼 있더라고요. "떨어져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떨어져 나가게 해 달라고....
여러분,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단 한 번의 명령으로 귀신을 쫓아냈던 사람입니다. 단 한 번의 기도로 죽은 사람도 살렸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기도하고 찬송하면 감옥 문이 진동하고 감옥 문이 열리게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의 문제를 두고는 여러 번 기도를 해야 했다라는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 기도였다는 겁니다. 게다가 이렇게 간절한 기도에 주님이 주신 대답은 무엇입니까?
(고후 12: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라는 뜻이지요.
뭐가 충분하다는 걸까요? 바울은 부족해서 필요해서 기도했는데 뭐가 충분하다는 것일까요?
지속적으로 대적자들로부터 공격 당하고 괴로움 당하는 것이 충분하다는 걸까요?
오죽하면 바울이 이것이 떠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을까요..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너에게 줄 내 은혜는 충분히 주어졌다"라는 겁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더 이상 구하지 말아라. 더 이상 은혜 구하지 말아라. 너에게 다 줬어." 그런 의미인 것이지요.
어쩌면 맨 처음에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도 바울은 큰 좌절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정말 더 놀랄 만한 것은 뭐냐면
그런 위대한 사도에게 그런 아픔과 약함과 어려움이 있었다는 것도 놀라운 것이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런 상황에 처했던 바울이 오늘 본문 9절 말씀에서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보이는 그 장애물인 약함을 두고 제발 떠나가게 해 달라고 간절히 세 번이나 기도했던 그 약함의 문제를 두고,
9절 말씀에 보니까 도리어 크게 기뻐하겠대요.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오히려 자랑하겠대요. 지금 그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바울은 주님이 주신 그 대답으로부터 어떤 깨달음을 얻었길래 그렇게 고백할 수가 있었던 걸까요?
주님이 주신 대답은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인 것 같은데 왜 사도 바울은 이런 놀라운 고백으로 바뀔 수가 있었던 걸까요?
여러분, 본문 9절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면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족하도다"라고 번역된 말은, '충분하다', '넉넉하다', '모자라지 않다'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주님은 바울에게 뭐라고 대답을 하신 겁니까? "너는 내 은혜를 넉넉하게 받았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주님의 은혜가 필요해서 은혜를 달라고, 치료의 은혜를 달라고, 떨어지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는 당신의 사도에게
주님의 대답은 "너는 내 은혜 넉넉하게 받았어. 부족한 거 하나도 없이 다 받았어." 지금 그렇게 대답하고 계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대답 뒤에는 또 어떤 대답이 있습니까?
"이 약함은, 너에게 주어진 그 가시는 너를 괴롭게 하려고 내가 허락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응답이 그 뒤에 같이 있는 것입니다.
"너에게 부어져야 할 나의 은혜는 충분히 이미 부어졌으니까 더 이상 구하지 않아도 된다.
이것이 정말 너에게 필요한 거니까"라고 주님이 대답하고 계시더라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봐야 됩니다.
능력의 사도인 바울에게, 그 위대한 사도인 바울에게,
온 세상을 다니며 선교 사역의 개척자로서의 길을 가야 했던 그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
건강이었을까요? 돈이었을까요? 가는 데마다 일이 쉽게 잘 되는 그런 형통함이었을까요?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주님이 볼 때는 그게 아니셨던 겁니다.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을 가져다가 병든 자들에게 주면 병이 나았다고 합니다.
그가 기도하고 찬송하면 옥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죽었던 자가 바울의 기도로 살아났다고 합니다.
우리는 가끔 선교사님들의 간증을 통해 듣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선교사역이 힘들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렇게 어렵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천 년 전에 아무런 기반도 없이 시작한 그 선교 사역 개척사역을 성공적으로 감당해냈던
그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 가장 위험한 것, 바울에게 가장 위협적인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끝까지 그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 바울에게 꼭 주어져야만 했던 그게 무엇일까요?
정말 바울을 무너뜨리고 선교 사역을 멈추게 만들 수 있는 진짜 장애물, 진짜 장벽, 진짜 걸림돌은 바울에게 무엇이었을까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바람과 달리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대표적인 예로
사도 바울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7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절~4절까지의 말씀에는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가 소개가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사람들은, 특히 사도 바울을 공격했던 거짓사도라 불리던 사람들은
말 잘하는 능력 뿐만 아니라 특이한 환상 체험, 남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그런 체험,
그리고 그런 것을 마치 자랑하듯이 떠들어 대는 것을 사람들은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남들이 경험하지 않은 놀라운 영적 체험을 했는데 그것을 자랑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지 주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자랑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2절을 읽어 보면 바울은 자기 자신이 경험한 건데 '나'라고 하지 않고 어떤 한 사람이 십사 년 전에 경험한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자신에게 놀라운 계시가 있었고 놀라운 영적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고 있습니다.
특별히 2절에 보면,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갔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그 당시 사람들은 지금과 달리 하늘을 세 개의 층으로 구분을 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의 세계관이지요..
첫 번째 하늘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 두 번째 하늘은, 해와 달과 별이 있는 곳,
그리고 셋째 하늘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낙원, 그렇게 이해를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 '셋째 하늘'이라는 것은 4절에 나오는 것처럼
낙원,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표현, 하나님을 만나고 온 것과 같은 것일 겁니다. 주님이 마련해 놓으신 낙원을 체험하고 온 것입니다.
거기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말을 들었고, 또 사람들에게 함부로 발설할 수도 없는
그런 놀라운 말들을 사도 바울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통 사람들은 체험하지 못한 체험을 한 사람입니다.
병을 위해서 기도하면 바로 병이 낫게 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죽은 자도 살리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런 바울에게 꼭 필요한 것은 평탄함이 아니라, 건강이 아니라, 물질이 아니라, 돈이 아니라,
바로 그가 자만하지 않도록, 그가 교만해지지 않도록 '아, 내 힘으로 할 수 있어'라는 그런 착각에 빠지지 않도록
바울을 겸손하게 붙잡아주는 그것만이 바울에게 필요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는 그 육체의 가시가 주어지고, 사탄의 사자가 주어졌고,
그것이 바울을 괴롭혀서 자만하지 않도록 했다고, 이것이 바로 나에게 진정하게 필요한 나의 은혜였고,
이 약함은 나의 인생의 장애물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신 은혜라고
사도 바울이 깨닫고 그것을 기뻐하고 자랑하겠노라고 9절 말씀에서 고백할 수가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기도만 하면 누군가가 병이 낫고, 여러분이 기도만 하면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면
여러분은 자만해지지 않을 자신이 있으십니까?
여러분, 사람은 둘째 치고, 제가 제 자신을 보니까 동물만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난리가 나겠더라고요.
요즘 심방을 해 보면, 반려견 반려묘들 중에 편찮으신 분들이 많아요.
10세가 넘으신 우리 연로하신 반려견들이 아주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아요. 간에 담석이 있고, 염증이 있고...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애완견을 위해서는 보험이 아직 활성화가 안 돼 있기 때문에
한번 치료 받으려면 너무 많은 물질을 써야 돼서 부담을 갖는 분들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제가 만약에 강아지의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어서 (강아지)를 데려와 보라고 해서
'이름이 무엇입니까?'
'크리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우리 크리미 간에 있는 담석이 크림처럼 녹아내릴지어다'
누워서 힘도 없던 이 크리미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밥을 먹으러 가면 어떤 소문이 나겠습니까?
이 집에서도, 저 집에서도, 여기도 제발 와 달라고 우리 강아지 좀 살려 달라고, 우리 방글이 살려 달라고 난리가 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고치는 것이 아니고, 동물만 일으킬 수 있어도 아마 하늘에 방방 떠다닐 겁니다.
여러분, 그런데 사람을 고치는 능력을 가진 그 사도, 죽은 자도 일으키는 능력을 가졌던 그 사도,
셋째 하늘을 보고, 남들은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한 놀라운 영적 체험을 하고 왔던 그 사도에게
하나님은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아셨던 거예요. 그에게 주어졌던 그 가시와 그 약함과 대적자들의 공격과
질병인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를 힘들게 하는 그 무언가는 사도 바울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생 길을 살면서 우리 인생에 놓인 그 약함의 문제, 나를 힘들게 하는 문제,
관계의 문제, 어떤 사람을 두고 장애물이라고 여길 때가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의 시각에서 그것을 잘 보면, 나를 아프게 하는 육신의 질병과,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과,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잘 보면,
오히려 그 질병이 그 문제가 그 사람이 내가 할 수 있다는 자만, 나 혼자서 살 수 있다는 자만,
하나님 없어도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의 그 자만을 누르고,
하나님께로 늘 나가야 하는 우리를 가로막는 그 자만이라고 하는 장애물을 쓰러뜨리고 없애는 도구가 바로 '약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밤에 어떻게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내일부터 또 휴일이 시작되는 이 귀한 날 밤에, 여러분 어떤 이유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약함 때문에 오셨잖아요. 그거 없었으면 올 수 없잖아요. 솔직하게 그거 없었으면 어디 놀러 가는 것 예약 잡고 했을 수도 있잖아요.
우리 인생의 장애물이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 진짜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소통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장벽이 진짜 무엇일까요?
우리가 빨리 없어지기를 바라는 그 '약함'일까요? 정말 그럴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약함'이라는 단어의 본래 뜻은 '힘 없음'입니다. 그렇다면, '약함'의 반대말은 '힘'입니다. '강함'입니다.
여러분, 힘이 있을 때, 강할 때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결국은 죄의 길에 빠지고 실패합니다.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저지릅니다.
다윗을 생각해 보십시오. 힘 없을 때는, 한없이 약해서 무능하고 연약해서 도망다닐 때는 그의 입에서 늘 이런 기도가 나왔어요.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시편 27:1)
다윗의 입에서 그런 고백이 늘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왕위에 올라서 힘을 갖게 되니까 세상 두려울 사람이 없으니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충성스러운 부하를 위험한 전쟁터에 내보내서 죽이는 살인 교사죄를 저지릅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은 모세가 왕자일 때 부르지 않으시고,
양치기로 살 때, '나는 아무것도 못합니다'라고 하는 그 연약함 중에 있을 때, 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셨을까요?
여러분, 그 약함 중에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온전히 깨달은 바울이기에 오늘 10절 끝 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겁니다.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내가 약한 그때에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나고, 나는 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주어진 이 장애물, 그냥 달려도 쉽지 않은데 하나님께서 내 손에 주신 이 무거운 무언가가 너무 싫어서
빨리 이것 좀 던져버리고 싶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장대높이뛰기 경기를 보신 적 있습니까? 높은 곳을 넘어야 하는데 그 선수의 손에는 긴 장대가 들려져 있어요.
그냥 달려도 될 것 같은데, 그냥 달려야 더 가벼워서 높이 뛸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손에는 긴 장대가 들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높은 장애물 앞에 가니까 그 장대를 이용해 그 높은 곳을 넘더라는 거예요.
오늘 이 밤에 여러분 기도하실 때, 여러분 손에 하나님이 들려주신 그 무거운 무언가가
여러분 앞에 놓인 그 장애물을 뛰어넘는 도구로 바뀐다는 것을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여러분의 약함이 장애물이 아니라, 내가 교만하고 거만해져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고 착각하기 쉬운 그 장벽을 정말로 넘게 하고 무너뜨리는 놀라운 도구가 약함이라는 것을
이 밤에 온전하게 고백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응답해 주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모르실 리가 없는데,
내가 약함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것을 우리 주님이 모르실 리 없는데, 내가 이렇게 괴로울 걸 알면서 허락하셨을 리가 없는데,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다고 약속하신 그런 분이신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이 없을 리가 있으시겠습니까..
생명을 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했는데, 우리의 고통에 나 몰라 하시는 하나님이시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을 우리가 다시 한번 굳게 하면서
오늘 이 밤 찬양하면서 우리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겠습니다.
♬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