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 교회 종소리 울리리라, 오웬
“나는 주일에는 교회에 갈 수 없지만,
언제나 당신의 어머니가 준 선물을 읽는다.
이 산들이 언제나
교회 종소리를 메아리쳐 울릴 것인가.”
1898년 11월 6일(토) 목포에 처음 도착한
오웬 선교사의 일성이다.
마치 13년 전, 1885년 한국 최초 목사 선교사 언더우드가
가난과 복음의 황무지 조선에 첫 발을 내디딜때
은총의 땅이 될 것을 소망하며 기원하던
축복의 메시지를 연상케 한다.
100여년 전 무명 무지의 땅,
조선하고도 남쪽 이름없는 바닷가 목포에 첫 발을 디디며
복음의 전령사 사역을 시작한 오웬은
수많은 병자들을 치료하는 의사일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복음의 생명을 전하는 일에 충성하여
전남 일대를 안 다녀본 곳 없이 밟고 밟으며
곳곳에 교회를 일으킨 전도자였다.
오웬(Clement C. Owen, 오기원) 선교사는
1867년 7월 19일 버지니아주 블랙 왈누트에서 태어났다.
햄프턴 시드니 대학. 유니온 신학교,
에딘버러 대학교, 버지니아 대학교 등에서
신학과 의학 전공하였다.
오웬은 미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목포에 와
전남 최초의 병원, 진료소를 열면서
‘진료소를 통해 목포 지역 사람들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축복이 되리라 믿는다’고 기대하였다.
그의 진실한 소원처럼 그가 처음 목포에 온 1898년 연말에는
목포 교회 성도가 10여명에 불과했으나,
진료소를 연 지 1년이 지난 그 다음해 1899년 10월에는
30여명으로 늘어났고,
그 이후로도 목포 교회는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하여 목포 교회는 1900년 3월 5일 처음으로 당회를 구성,
(당회장 : 배유지, 서기 : 오기원)
성례전을 독자적으로 시행하기에 이른다.
이때 세례희망자 5명을 문답하여
4명을 요리문답 교인으로 하는 등
목포 교회 처음 시작과 성장에 있어서 배유지와 함께
오웬의 역할은 상당한 것이었다.
1900년 당시 30대 노총각이었던 오웬은
북장로교 선교회 출신 휘팅(Georgiana Whiting) 양과
서울 언더우드 집에서 부위렴 목사의 주례로 결혼,
가정을 이루며 세 딸 메리, 루스, 도로시를 두었다.
오웬은 지원근 마서규 등 목포교회 교인들을 훈련하며
조사로 동참케 하여
이후 광주와 순천 선교부를 세우는 일과
전남 일대 곳곳을 다니며 전도와 교회 확장에 크게 기여한다.
오웬은 광주권은 물론
해남 진도 등 전남 남부지역,
장흥, 강진을 중심한 전남 중부지역
순천, 광양의 동부지역 등
전남 일대 곳곳을 가리지 않고
그야말로 광인처럼 돌아다니며
복음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그의 지칠줄 모르는 전도에 대한 열정과 충성은
급기야 건강을 심히 해치게 되었고
결국 급성폐렴으로 1909년 4월 3일 소천하였다.
10여년 조금 넘게 목포 전남에서
의사요 목사로서 사역한 오웬은
수 많은 병자들을 치료하였으며,
35~40개에 이르는 예배 처소 순회 전도자로
전남 각 지역의 초기 교회들 수십 개를 세웠으며,
2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430명의 요리문답 교인을 세웠다.
경건하고 검소한 그의 삶과
불꽃같은 전도자로서 살아간 그의 일생은
참으로 후대의 모범이요 귀감이며
하나님나라 생명의 역사를 책임진 이들의 귀한 좌표다."(김양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