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묵상하다보면 우리를 눈동자처럼 살피시는 위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창세기 21장을 보면 힘없이 쫓겨난 버림받은 여종 하갈을 만나주시고 위로하신 하나님을 먼저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입니다. 그런데 여종 하갈이 주인 아브라함과 관계를 맺어 먼저 자녀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후 자녀를 갖지 못한 사라도 임신하여 이삭을 얻게 되는데 사라와 하갈과의 관계는 서로 간에 질투심이 생겨 결국 종인 하갈이 여주인 사라의 구박을 견디지 못해 어린 자식 이스마엘과 함께 광야로 쫓겨나게 됩니다. 모자를 누구하나 따뜻한 격려와 위로 없이 아브라함 주인집을 떠나 삭막한 광야의 길을 가게 됩니다.
얼마나 걸었을까요? 준비한 가죽 부대의 물이 떨어지고 삭막한 광야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한 하갈은 멀리 떨어져 소리 내어 우는데 정말 하갈은 버려진 절망의 순간이었습니다. 이쯤되면 한 여인의 인생은 포기상태입니다.
그러나 눈동자처럼 살피시는 하나님은 하갈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름을 부르시며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저 아이의 울음소리를 내가 들었다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이 아이로 통해 큰 민족을 이루리라(창21:17-18)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뜨게하시여 샘물을 보게 하시고 물을 떠다 지쳐 있는 아이에게 물을 주어 회복되게 합니다. 하갈은 상처 입어 치유될 수 없는 절망의 순간이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아시고 살피시며 고통스러워하는 아이의 장래를 축복하시는 위로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비로소 안도의 숨('나함')을 내쉬며 마음에 평안을 얻는 장면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서 구경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내 곁에서 살피시며 잘못하여 아파하고 울고 있을 때 상처를 어루만지시며 위로해 주신 분이 나의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 성경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이사야 말씀 앞에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총 66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총 66권인 것과 참 닮았어요 1장부터 39장까지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징계가 몰아칩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가 바르게 자라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으로 아프게 매를 드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40:1부터는 분위기가 완전히 바뀝니다. 매를 드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그 매를 내려놓으시고,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위로의 하나님으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저와 여러분 우리의 관계를 아주 밀접하게 말씀하신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시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신 줄 너희는 알찌어다 그는 우리를 기르신 자시오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
이 말씀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로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처럼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마음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자식이 잘못하여 탕자처럼 유산 가지고 아버지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며 살다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자식에게 무엇을 따지고 묻지 않았습니다.
먼저 달려가 둘째 아들을 끌어안았습니다.(눅15장) 이런 모습이 유다백성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인데 그 위로가 얼마나 크신 가를 1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1절 다시 봅니다....위로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백성을 위로하라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다음 위로하라는 단어가 반복됩니다.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요? 위로가 중요하니 빨리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관계속에서 누구를 위로할 때가 있습니다. 위로를 히브리어로 나함(Nacham, נָחַם)인데 원래 뜻은 "깊은 숨을 쉬다"입니다. 누구든 슬픔이나 고통을 겪을 때 숨이 턱 막히거나 가슴이 답답해 한숨을 쉽니다. 엣날 어른들은 한숨 쉬면 복이 나간다고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지만 무엇을 하는 데 막막하고 힘들면 자연스럽게 한숨 쉬는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순간 누구 와서 위로의 말 한마디가 막막하고 힘들었던 가슴이 뚫리면서 "이제야 살겠다"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상태가 바로 “위로”라고 뜻입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오늘 읽은 본문 이사야40:1...위로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 힘든 일을 겪을 때 세상에 나 혼자만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 위로의 성령 하나님은 "내가 여기 같이 있느니라 " 세미한 음성으로 다가와 위로해 주심을 믿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말하기를 "하나님은 우리를 시련에서 건져내시기보다, 시련 속에서 우리를 위로하시는 분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위로의 하나님은 유다 백성의 삶이 어느 정도였기에 내 백성을 위로하라 거듭 반복해서 말씀 하셨을까요?
이사야 1장 시작을 보면 말씀을 묵상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당시 유대 백성들의 모습이 너무 절망적입니다. 한마디로 위로의 하나님의 속삭임을 들을 수 없는 부패한 짖을 했던 강팍한 백성들이었습니다.
이사야1:4....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패한 자식이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버렸으니 부패한 백성이지요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보고 또 보았던 자기 백성이 부패한 자식이라고 했던 주된 원인은 무엇일까요?....... 형식적인 예배에 있었습니다.
사1:11-12....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유다백성들이 제사(예배)를 안 드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성전에는 제물이 넘쳐났고 절기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예배)가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라고 하나님은 알맹이가 빠진 종교적 형식주의를 책망하십니다.
이런 신앙적인 형식이 결국 사회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결과는 고스란히 사회적 타락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사야 1장 15절에는 그들의 "손에 피가 가득하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를 돌보기는커녕 학대하고, 뇌물을 밝히며 불의를 행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니 인간 사이의 도덕과 정의도 함께 부패해 버린 것입니다 유다백성이 부패한 자식이 된 가장 큰 원인은 자신들을 구원하고 품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배반하여 떠났고, 그 결과 삶 속에서 정의를 잃어버린 채 성전 마당만 밟는 가식적인 종교 생활로 하나님을 기만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본질적인 관계의 회복을 원하셨기에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랑의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손을 내미셨습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점점 하나님 품에서 멀어진 유다백성을 하나님께서는 이웃 바벨론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시며 유다를 멸망시키십니다. 70년이라는 긴세월동안 포로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루 이틀이 아닌 70년 포로생활은 지칠 대로 지친 유다 백성들에게는 나라를 잃었습니다.....성전도 잃었습니다. 생업도 잃었습니다. 그래서 이젠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셨나 봐" 하며 절망하며 도저히 일어설 소망조차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의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을 향해 1절 하반절에 "내 백성"이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비록 죄 때문에 매를 맞았지만, 관계는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진정성 있는 위로는 "괜찮아질 거야"라는 막연한 위로가 아닙니다. 끊어진 줄 알았던 하나님과의 관계가 여전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 진정한 하나님 위로의 시작입니다.
이런 위로의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1절 하반절에 위로하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2절에서는 마음에 닿도록 위로를 외치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닿도록이란 원래뜻으로 직역하면 "그의 심장(Heart) 위에 대고 말하라"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위로하고 싶다며 멀찍이 서서 "힘내라", "괜찮아질 거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방의 가슴에 자기 귀와 입을 바짝 대고, 그의 심장 고동과 슬픔의 무게를 고스란히 느끼며 애절함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를 위로한다고 하는데 자신이 슬퍼하거나 애도하는 마음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데 어찌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죄에 대해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삶을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애통의 마음이 있는 사람만이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고, 그 위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십여 년 전, 한 어머니가 씻을 수 없는 큰 사고로 어린 자녀를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습니다. 장례식장에는 위로객이 찾아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이 좋은 분들이라며 **"집사님, 아이는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슬퍼하지 마세요. 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시간이 약이에요. 첫째를 생각해서라도 얼른 기운 차려야죠"**라며 조언을 건넸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로도 어머니의 찢어진 마음에는 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위로한다는 말들이 시린 상처에 소금을 뿌리듯 아프게 다가왔고, 어머니는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었습니다.
장례식 셋째 날, 멀리서 소식을 듣고 뒤늦게 도착한 나이 지긋한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권사님 역시 수년 전 같은 아픔으로 자식을 잃은 경험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권사님은 빈소에 들어서자마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에 갔다거나 기운을 내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하고 있는 어머니에게 다가가, 말없이 어머니를 품에 안고 함께 기꺼이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같이 울던 권사님은 자식 잃은 어머니의 젖은 뺨을 만지며 그제야 딱 한마디를 속삭였습니다." 지나야, 얼마나 아프냐... 내가 네 맘 안다. 정말 얼마나 아프냐..."
그 순간 어머니의 닫혔던 빗장이 스르륵 풀렸습니다. 자식을 잃은 가슴의 통곡 소리를 그대로 받아내며, 내 심장 소리에 자기 심장을 맞추고 울어주는 그 눈물과 한마디가 비로소 어머니의 '마음에 닿았던(심장에 와닿았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그 권사님의 품 안에서 비로소 살아갈 소망의 숨을 쉴 수 있었다는 실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이 산상보훈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선포하셨습니다.
진정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 슬퍼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마음에 와닿도록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사야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 마음에 와닿은 참된 위로를 전하는데 2절 중반절에 보면....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확신 가지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벌을 배나 받았다"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이 지은 죄의 대가가 충분히 치러졌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를 완벽하게 끝내신 분이 누구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공의(정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매 맞은 자리를 만지시는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진정한 위로는 내 노력이나 자격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제 됐다, 다 끝났다"고 선언해 주시는 예수님 십자가 구속의 은혜로 이루어진것입니다.
에베소서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잠시 이런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더 위로받을 만한 행동을 해야, 혹은 내 고난의 무게가 채워져야 하나님의 위로가 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은 결코 위로의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이제 됐다, 다 끝났다" 는 선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외치신 말씀 "다 이루었다"라는 성취의 기도에서 응답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치러야 할 죄의 대가, 고난의 무게를 예수님이 대신 100% 치르셨기 때문에,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치유와 위로함을 받은 영적인 선언임을 믿으십시오
주향성도여러분!! 하나님의 위로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고통 속에 있을 때 하나님은 바로 지금 내가 숨 쉬고 아파하는 이 자리에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하늘이 갈라지거나 기적이 일어나는 거대하고 거창한 방식으로만 오지 않습니다.
오늘 문득 나를 찾아온 믿음의 친구의 따뜻한 한마디가 하나님의 위로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지친 내 마음을 달래주는 조용히 흘러 나오는 찬양과 생명의 말씀 한 구절이 위로가 될 것입니다.
바로 옆 창가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같은 소소한 일상 속에서 위로의 하나님이 속삭이고 계심을 믿으십시오
위로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내 곁에 와 있다는 뜻입니다. 다만 내 슬픔과 염려가 너무 커서 그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마음의 시선을 고통에서 하나님께로 조금만 돌리면, 이미 예비되어 있는 위로와 평안을 발견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