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령산(祝靈山)
산행일자는 2025년 1월 19일(일요일)이다.
이 산은 경기도 남양주와 가평 경계에 우뚝솟은 해발고도 887m의 명산으로
한국의 산하 인기순위 47位요 산림청 선정 명산이기도 하다.
작년 2024년 1월 1일날 아내와 이 산을 등산하려고 왔다가 서리산을 찍고 축령산을 올려다 보니
약 1.2km 정도 앞두고 포기하고 내려간적이 있다.
그때는 눈이 많이 와서 푹푹빠지고 힘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쨋거나 그때 눈꽃은 한껏보았으니 여한은 없었다.
이제 그때 오르지 못했던 축령산을 간다.
고려말에 이성계가 이 산에 사냥을 왔다가 한마리도 못잡자 몰이꾼들 말이
이 산은 신령한 산이니 산제(山祭)를 올려야 한다고 하자
이튿날 정상에서 산제를 지낸후 멧돼지를 잡았다 한다.
이때부터 고사(告祀)를 올린 산이라하여 축령산(祝靈山)이라 불렀다 한다.
이러한 연유로 현대에도 허다한 산악회 단체들이 연초가 되면
이 산에서 시산제(始山祭)를 지낸다 한다.
오늘의 산행코스는 제2주차장에 파킹하고 시작했다.
제1주차장 - 암벽약수 - 수리바위 - 남이바위 - 정상 - 절골 - 오가연못 - 임도3거리 - 제2주차장
대략 6km 정도 되리라 ~
수리바위에서 장쾌한 산너울을 바라보고
가져간 간식도 먹었다.
남이바위에서 탁트인 산하를 바라본다.
그냥 절벽일뿐 이렇다할 경관은 없다.
남이장군이 무예를 닦앗다는 전설의 바위인듯 하다.
남이(南怡)는 17세에 무과장원급제하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했다.
20대 젊은 나이에 병판(兵判)에 올랐다 해임되어 불만을 품은 대실수
여진족 토벌에도 큰 공을 세운 장군은 예종때 유자광(柳子光)의 모함을 받고 한명회(韓明澮)
신숙주(申叔舟)등의 공격을 받아 역적으로 몰려 참형당한
비운의 영웅이었다.
장군의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태종(太宗)의 외손이며 권람(權擥)의 사위다.
그의 묘소(墓所)는 경기화성 비봉면에 있으며 순조때 신원(伸寃)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다.
숙종때 소론의 거두 남구만(南九萬)은 그의 6대 재종손이라 한다.
다른 내용은 다 접어두고 장군이 여진을 호령할때 지었다는 호쾌한
시 한수를 소개하고 넘기고자 한다.
白頭山石磨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하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사내 이십에 나라를 평정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그누가 대장부라 칭하랴
싯귀절 平을 得으로 고처 음해를 했다니 웃기는 인간들이다
고작 27세에 무슨 역적질을 한다구 ... 죽이려니 별짖 다한거겠지
꽃다운 나이에 요절한 장군의 넋을 기리며 천하에 더러운건 정치란걸 한탄하며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이 나라 ~
원인없는 결과 없듯 전라도 남원출신 얼자출신 유자광을 그토록
못된인간으로 출세시킨 세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문과낙제자를 장원으로 둔갑시킨게 세조다.
역사상 유자광이놈 처럼 악질적 간신은 손에 꼽힐정도로 드물기에.
축령산(祝靈山) 887m
이제 생각해 보니 이 명산을 오늘에서야 올랐음을 알았다.
이제껏 친구들과 왔던걸로 착각했던 것이다.^^
오가네 연못가에서 점심으로 도시락을 먹고왔다.
이곳은 아마도 추측하건대 천주교도들이 박해받을때 숨어들어온 사람들 아닐까 한다.
우리 고향에도 그렇게 도망와서 산 사람들이 여러호 있었으니까.~
잡히면 죽이니까.
아니면 동학때 관련된 사람이거나 ....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험하고 깊은 산속에
사람이 산다는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아래 다리를 건너면 산림휴양관이 나오고 더 가면 제2주차장이 나온다.
둘레길을 매우 잘 조성해 놓았다.
엊그제 규슈여행(1/13 ~ 1/16) 귀국하고 오늘 또 산행을 하자니
조금은 힘들지 않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거뜬하다.
오늘도 무사히 산행을 마칠수 있게 도와주신 日月星辰께 감사드리며 산행기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