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607 / 99세 때 찾아오신 하나님 (창17:1-4)
한 남자가 이발소에서 면도를 하는데 이발사가 갑자기 얼굴에 뜨거운 수건을 던져 올렸습니다. 깜짝 놀란 손님이 수건을 떨쳐내며 “아니 이렇게 뜨거운 수건을 얼굴에 올리면 어쩌자는 거요?”라며 화를 내자 이발사가 하는 말이 “죄송합니다. 들고 있자니 너무 뜨거워서요.”라고 하더랍니다.
현실에서도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짐이나 문제를 내려놓을 만한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피곤한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고민이 되곤 합니다. 그런데 이럴 때면 생각해 봄 직한 신앙 격언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끝은 하나님의 시작이다!”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나의 모든 가능성이 끝난 자리에서는 언제나 하나님만이 유일한 길이 되어 주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입니다.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는데 보면 1절 첫 마디가 “아브라함이 구십구 세 때에”라는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굳이 나이를 거론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는 건 뭔가 그 나이가 가지는 의미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구세가 왜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니 이전에 어떤 얘기가 있었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16장 16절을 보니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역시나 나이가 언급되고 있는데, 16:16절과 17:1절은 장으로 치면 한 장 차이고 절로 치면 연속으로 이어지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둘 사이에는 무려 13년이란 세월의 공백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13년의 공백!’. 본문은 이걸 말하기 위해 첫 시작을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라고 언급했던 겁니다.
우선 성경에서 아브라함 얘기를 보자면 창세기 12:4절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때의 나이가 75세였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순종의 길을 나선 아브라함을 향해 하나님이 약속하시기를 ‘자식을 주겠다. 번성케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아브라함은 여전히 자식을 얻지 못한 채였고 약속하신 하나님도 자식을 준다든지 안 준다든지, 또는 언제 준다는지에 대한 일절의 언급이 없은 채 세월만 흘러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브라함이 더는 안되겠다 해서 세상 방법을 통해 아들을 얻게 되는데 그 아들이 이스마엘이었고 그때 아브람의 나이가 86세였다는 겁니다.
일단 여기까지를 기록한 것이 창세기 16:16절입니다. 그리곤 하나님에 대해서건 아브라함에 대해서건 아무런 언급이 없다가 17:1절로 연결되면서 아브라함의 나이가 99세더라는 겁니다.
그 사이에 13년의 공백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신학자들은 이 공백을 일컬어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침묵’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13년의 공백을 이런 식으로 정의해 버리면 이후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침묵하셨는가?’를 놓고 중구난방의 해석이 있을 수가 있게 됩니다. 누군가는 하나님이 약속을 믿지 못한 아브라함에게 실망해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고, 혹은 아브라함의 불신이 괘씸해서 하나님이 등을 돌렸다는 식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린 압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보통의 사람처럼 실망하신다거나 노여워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그래서 우린 ‘13년의 침묵’에 대한 다른 정의를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침묵하신 13년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요?
용어를 정의하기 전에 전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한 자를 위해 하시는 일은 하나도 허투루 하시거나 불이익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13년간 침묵하셨다면 그 침묵 역시 아브라함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으셨을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본다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의 ‘13년의 공백’ 즉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13년의 침묵’은 원인이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위해 그리하신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알아야 할 것이, 하나님의 13년의 침묵이 아브라함에게 뭔 유익이 될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리하신 걸까요?
이쯤에서 먼저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그간 여러분이 알고 계신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응답은 우리의 무엇으로 받는다고 했습니까?
‘믿음으로’ 받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의 ‘믿음대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의 13년의 침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방치하셨거나 외면하셔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제대로 성숙시켜 주시는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한 믿음의 훈련 과정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본문의 ‘13년의 공백’은 ‘하나님의 침묵 기간’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 훈련 기간’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13년의 훈련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이 과연 제대로 성숙됐을까요?
아닙니다. 1절 전체를 보세요.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전히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있음과 그의 믿음이 아직까지도 완전치 못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랬기에 13년의 침묵을 깨시며 나타나신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하신 첫 마디가 무엇이었습니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였습니다.
왜일까요? 자기가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13년간 키우며 살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느닷없이 나타나신 하나님이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신 이유가?
사전에서 ‘전능’이란 말은 ‘어떤 일이든 못 하는 것이 없이 모두 능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13년 만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신 이유는 두 가지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첫째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왜 내가 못 하거나 안 해주리라고 생각했느냐?’는 물음이고 둘째는 ‘내가 너에게 약속한 건 내가 다 해줄 것이다.’라는 다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아브라함의 믿음에서 중대한 분기점이 되고 있습니다.
이전까지 아브라함은 ‘내가 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이 복이 되게 하신다.’는 게 그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전능한 하나님’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고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어떤가요? 뭔가 다른 듯하면서도 같은 말 같지 않나요?
그러나 분명 다릅니다. 뭐가 다른고 하니 순서가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이전 믿음에서는 ‘내가 하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이 그 일을 복되게 하실 거다.’가 따라붙습니다. 그런데 만약 내가 열심히 한 일에 복이 따라오지 않는다면요?
그럴 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왜 복을 안 주시지?’라고 의아해하며 곧이어 서운해하거나 심하면 시험에 듭니다.
또 하나, 만약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어떨까요?
내가 할 게 없으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내가 한 게 없으니 하나님의 복도 따라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 닥치면 낙심부터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그랬다는 겁니다. 약속을 믿고 열심히 살고 있는데 하나님이 왜 자식을 안 주시지라는 생각이 앞섰고, 나이가 들면서는 이제 곧 내 힘으론 아이를 가질 능력이 없게 될 텐데 그리되면 자식을 준다는 하나님의 복도 영영 없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내가 할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걸 하자 했던 게 후처를 얻어 자식을 얻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침묵을 깨고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즉 ‘왜 내가 안 해주리라고 생각했느냐?’입니다.
이 한마디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간의 믿음에서 순서를 바꾸라고 하신 겁니다. 즉 하나님께는 내가 할 수 있고 없고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겁니다. 내가 뭘 하든 못하든 우리에겐 항상 ‘하나님이 복 주신다.’가 부동의 일 순위여야 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당장에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을 믿고 그 일을 하라는 거고, 그러다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라는 믿음만은 절대 놓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겁니다.
돌이켜 보면 13년 전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만 해도 그의 믿음은 ‘나의 가능성’과 ‘나의 능력’을 ‘하나님의 복 주심’과 같은 선상에 놓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 17:17절과 18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한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애 낳을 가능성이 있고 능력이 있을 때 애를 낳자 해서 이스마엘을 얻었던 거고, 나의 가능성과 능력이 없게 되면 하나님의 복 주심도 없으리라 생각했던 겁니다. 그랬기에 자기가 능력 있을 때 얻은 이스마엘을 거론하며 하나님이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는 복을 그 아들에게 이어주시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일단 아브라함 생각이 그랬다는 거고. 이어지는 19절을 보면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가졌던 믿음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오해한 부분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아니라. 나는 네가 낳은 아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한 적이 없다. 나는 내가 너에게 준 아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각자가 돌이켜 보세요. 당시 왜곡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아니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오늘 나의 믿음에 대해서도 ‘아니라’고 하시지는 않을는지요?
혹여 우리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능력과 하나님의 복 주심을 같은 선상에 놓고 믿어오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다가 나의 능력이 없게 되면, ‘나는 돈이 없는데’, ‘나는 실력이 없는데’, ‘나는 못생겼는데’, ‘나는 소심하고 나약한데’라고 하며 나의 약함과 불안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복 주실 것이라는 믿음까지 흔들리지는 않았는지요?
그러나 기억하세요. 그리고 믿으세요. 지금의 내 사정이나 형편이 어떠하든 나를 향해 ‘하나님이 복 주시겠다.’는 약속은 불변입니다. 그런 하나님이시기에 구약의 아브라함에게나 오늘의 저나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는 불가능하지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못하고 안 되지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갓난 아기에겐 불가능한 일도 어머니의 품에선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아기에겐 ‘나에겐 엄마가 있다.’는 본능적이 믿음이 있습니다. 그랬기에 불가능한 일이라 해서 아기는 좌절하지 않습니다. 안 되고 못 한다고 해서 아기가 실망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불가능 앞에서든 안 되는 일 앞에서든 아이의 행동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엄마를 찾으며 우는 것.
이렇듯 아기의 엄마를 향한 믿음처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을 부르며 기도하는 것.
그러면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나에게도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들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고, 하나님 앞에서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했고, 예수님 앞에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 앞에와 그런 예수님 앞에 오늘 우리가 서 있습니다.
홍해 앞에서 모세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다음 한 일이 바다를 향해 걸어 들어갔습니다.
여리고 성 앞에서 여호수아가 한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다음 한 일이 성벽을 돌며 걸었습니다.
언제든 하나님의 응답의 현장에선 항상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믿음이 먼저였습니다. 그다음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믿음으로 했고 할 수 없는 일 앞에서는 믿음으로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가 물이 포도주가 되는 거였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거였습니다.
행여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침묵 앞에서 믿음이 흔들리거나 혹은 나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억지로라도 신앙으로 포장하며 살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오늘 우리에게도 13년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침묵하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이 없거나 되는 일이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모든 가능성이 사라지고, 있던 능력마저 막혀버린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이삭이라고 하는 아들 곧 ‘웃게 하시는 복’을 주셨습니다.
믿으세요! 그때 아브라함에게 그리하셨다면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도 그리하시리라는 것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당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물으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런데 너는 왜 내가 너를 위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생각했느냐?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그런데 너는 왜 네가 원하는 걸 내가 못 하리라고 생각했느냐?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는 물음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우리에게도 믿음이 있기에 이젠 내가 못 한다고 하나님도 못하실 거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한 하나님이다.’
이를 믿으신다면 이제부턴 뭘 하든 하나님이 복 주신다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하는 일’에 복 주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믿고 하는 일’에 복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매일이 같은 일의 반복일지라도 그 일을 함에 있어서 ‘믿고’가 빠져서는 안됩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보면 내가 하는 일에 복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건 맞습니다. 다만 ‘열심히만’ 하느냐, ‘믿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침묵이냐, 응답이냐가 결정된다는 걸 아셔서 이후론 뭘 하든 하나님이 나에게도 복 주신다는 믿음으로 해서 복 받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