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으로 나타나는 예배(로마서 12장 1~2절)
핵심 주제: 참된 예배는 주일의 제단을 넘어, 일상의 삶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금그릇이나 은그릇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깨뜨리셨습니다.
"하나님, 왜 저를 깨뜨리십니까?"
"네 안에 담긴 세상의 찌꺼기를 비워내야 내 생수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깨져야 그 틈으로 생수가 흘러나와 목마른 이웃을 적실 수 있다."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은 내가 깨지고 부서져서,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향기가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일에는 뜨겁게 찬양하고 눈물로 기도하지만, 월요일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순간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예배의 감격이 문지방을 넘지 못하는 현상입니다.
1.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몸'은 단순히 육체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발이 닿는 삶의 현장, 손으로 하는 일, 입으로 뱉는 모든 언어생활을 포함한 '삶의 실체'를 의미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거나 종교적인 행위에만 머무는 신앙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 전체를 하나님께 내어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양이나 소 같은 동물을 죽여서 피를 흘리는 '죽은 제물'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제 '산 제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일매일 숨 쉬고 살아가는 나의 일상 속에서 순종하는 삶을 뜻합니다. 거룩한 산제물로 드리라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유혹에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구별되게 살아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마땅하고 당연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영적 예배'에서 '영적(Logikos)'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합당한, 이성적인, 본질적인'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자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가장 '마땅하고 당연한 예배'라는 의미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단순히 예배당에 앉아 의식에 참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나의 일상(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미국의 한 대형 교회에 매주 거르지 않고 예배에 참석하지만, 설교 시간만 되면 고개를 숙이고 깊은 잠에 빠지는 한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주변 교인들은 "예배 태도가 저게 뭐냐", "은혜를 못 받나 보다"라며 수군거리기 일쑤였습니다.
하루는 담임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예배가 끝난 후 조용히 불러 상담을 청했습니다.
"집사님,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으신가요? 매주 설교 시간에 너무 깊이 주무셔서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러자 집사님은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인 채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 직업이 시청 청소부입니다. 매주 토요일 밤만 되면 시내 중심가에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와 오물이 가득 쌓입니다. 저는 밤새도록 땀을 흘리며 그 거리를 청소합니다.
청소를 하면서 제 마음속으로 늘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주일 아침에 수많은 주의 자녀들이 깨끗해진 이 길을 걸으며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게 해 주세요. 제가 이 길을 깨끗하게 닦아놓겠습니다.'
밤샘 작업이 끝나고 주일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옷을 갈아입고 교회로 허겁지겁 달려옵니다. 찬양할 때까지는 정신이 나는데, 목사님 말씀이 시작되면 안심이 되어서 그런지 저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어버립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목사님은 집사님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집사님, 죄송해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집사님은 이미 토요일 밤 거리 위에서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최고의 예배를 몸으로 드리고 오신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로새서 3:23)
구약 시대에는 제단 위에서 죽은 동물을 태우는 것만 제사(예배)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우리가 하는 "무슨 일(직장, 가사, 공부, 봉사 등)"이든 그것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될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할 때, 혹은 나에게 맡겨진 일을 할 때 '사람의 눈치'를 보거나 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하듯이' 최선을 다하는 그 태도가 바로 내 몸을 산 제물로 드리는 과정입니다.
청소부 집사님이 거리의 쓰레기를 쓸면서 주님을 생각했던 것처럼, 우리가 직장에서 보고서를 쓸 때, 가정에서 설거지를 할 때, 이웃과 대화할 때 "주께 하듯" 정성을 다한다면, 그 시간이 흐르는 삶의 현장 전체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영적 예배의 처소'가 됩니다.
2.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경에서 말하는 '이 세대'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하나님 없이 스스로 주인 되어 살아가는 세상의 타락한 가치관, 유행, 풍조를 뜻합니다. 물질만능주의, 이기주의, 쾌락주의, 그리고 "내 뜻대로, 내 느낌대로 살라"고 부추기는 인본주의가 이 세대의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본받지 말고"의 원어적 의미는 틀에 맞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받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수스케마티조)는 '외형적인 틀이나 모형에 자신을 뜯어 맞추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거대한 거푸집(틀)을 만들어 놓고, 우리에게 그 틀 속으로 들어오라고 압박합니다. "남들처럼 돈을 쫓아야 해", "성공하려면 이 정도 타협은 해야 해"라며 세상의 표준에 맞추어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세상이 만든 틀에 너희 자신을 밀어 넣어 똑같은 모양으로 찍혀 나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장 15~16절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지으신 아름다운 자연계나 사랑해야 할 이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부추기는 타락한 가치관과 영적 체계를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성경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하는 ‘양다리 신앙’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선포합니다. 마치 마음이라는 그릇의 크기가 정해져 있어서, 세상에 대한 탐욕과 사랑으로 채우면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설 자리가 없고,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면 세상의 유혹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식게 만드는 영적 독소입니다.
사탄이 인류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바꾸지 않고 써먹는 가장 강력한 세 가지 유혹의 무기를 폭로합니다.
① 육신의 정욕 : 우리 몸의 통제되지 않은 죄성, 감각적인 쾌락, 성적인 타락, 육체적 편안함만을 추구하는 욕망입니다.
② 안목의 정욕 : 눈으로 보는 것에서 시작되는 탐욕입니다. 시각적인 자극에 이끌려 남의 것을 부러워하고, 끊임없이 소유하려는 끝없는 물질적 탐심을 뜻합니다.
③ 이생의 자랑 : 이 세상 살아가면서 가지는 세상적인 명예욕, 권력욕, 지위, 그리고 "내가 이만큼 성공했다"는 것을 남들에게 과시하고 자랑하고 싶어 하는 교만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 가지 정욕과 자랑의 출처가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사탄)’이라고 명확히 선을 긋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순수한 욕구(예컨대 식욕이나 아름다움을 즐기는 마음)는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이 순수한 욕구를 뒤틀어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게 만들고, 통제 불가능한 ‘정욕’과 ‘교만’으로 변질시킵니다. 이것들은 결국 우리를 영적 파멸로 이끌기 때문에 아버지가 아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2절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세상 풍조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문화, 사상, 가치관, 유행을 뜻합니다.
물에 떠내려가는 죽은 물고기처럼, 세상 사람들이 "이게 성공이다", "이렇게 살아야 행복하다"라고 말하는 기준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좇아갔던 우리의 옛 모습을 지적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구절에서 아주 놀라운 영적 비밀을 폭로합니다. 우리가 세상 유행과 풍조를 따랐던 것이 단순히 '남들 다 하니까' 했던 행동이 아니라, 그 배후에 거대한 영적 세력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이 세상의 공중, 즉 인간의 사상, 문화, 미디어, 가치관을 장악하여 보이지 않는 영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풍조를 분별없이 따라가는 것은 단순히 트렌디(최신 유행을 따르는)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세상 풍조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빛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강력한 영적 경고입니다.
3.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변화의 시작은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부터 입니다.
성경에서 '마음'은 단순히 감정을 느끼는 곳을 넘어 인간의 지성, 의지, 가치관, 세상을 바라보는 눈(세계관)을 총칭합니다. 우리의 행동과 삶이 바뀌려면 겉모습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마음'부터 고쳐져야 합니다.
'새롭게 함'은 컴퓨터의 운영체제(OS)를 완전히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받기 전 세상 풍조로 가득 차 있던 우리의 옛 생각의 구조를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마음의 체질을 날마다 새롭게 갱신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변화'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모르포오’는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아름다운 나비로 완전히 탈바꿈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형되셨을 때도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성경 원문에는 이 단어가 '변화를 받아라'라는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변화는 내 의지나 수양으로 스스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성령님과 말씀에 내어드릴 때 위로부터 임하는 초자연적인 영적 변화임을 뜻합니다. 겉만 흉내 내는 연기가 아니라, 존재 자체가 속에서부터 완전히 바뀌는 변화입니다.
변화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되어 존재가 변화된 성도가 삶에서 맺어야 할 최종 열매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하나님의 뜻을 3가지 성품으로 묘사합니다.
먼저 선하신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완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선한 뜻입니다. 다음으로 기뻐하신 뜻입니다. 하나님을 미소 짓게 해 드리는 뜻이며, 동시에 우리 영혼에도 참된 기쁨을 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온전하신 뜻입니다. 단 하나의 오차나 부족함도 없이 완벽하며, 우리를 성숙으로 이끄시는 뜻입니다.
'분별'은 금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제련하여 엄격하게 구별해 내듯, 수많은 세상의 목소리 속에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날마다 삶 속에서 증명해 내고 선택하는 삶의 지혜를 의미합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들은 평생 엄청난 염분이 가득한 짠물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물고기를 잡아 요리해 보면 살이 전혀 짜지 않습니다. 물고기 몸 안에는 바닷물의 소금기를 걸러내고 일정한 염도를 유지하는 특별한 '삼투압 조절 능력(내부 기관)'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죽은 물고기는 바다에 던져지면 금방 썩고 소금기가 배어 짠 소금구이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짠물 속에 살아갑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고 거룩함을 유지하는 비결은, 세상을 피해 도망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과 성령으로 ‘마음이 새롭게 되는 내부의 영적 능력’을 매일 공급받는 것입니다. 우리 속사람이 새로워질 때, 세상의 짠 가치관이 우리 마음속으로 침투하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 속에서 온전한 분별력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영적 승리 공식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좋은 예배, 참된 예배는 근사한 예배당 건물이나 화려한 음악에 있지 않습니다. 주일에 받은 은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나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리고, 세상의 가치관을 거부하며,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뜻 순종하는 삶이 진짜 영적 예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