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예상했던 충격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았다. 급격하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얼굴을 가렸던 팔을 천천히 치웠다.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물의 장막이었다. 마치 나를 보호하려는 듯이 둘러싸고 있는 물의 장막이 저 싸늘한 남자의 공격을 막아줬음을 알아차린 내 머리는 의문으로 가득 찼다. 내 몸에 흐르는 물의 기운이 이 장막을 만들었을까, 라고 생각했지만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물의 기운은 자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럼 누가 이 장막을… 혹시! 순간 눈앞에 일렁이는 물의 세계를 떠올렸고, 내 짐작이 맞았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물의 세계가 부드럽게 물결쳤다.
“…허.”
허탈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
“…넌 누구냐?”
물의 세계의 물결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나는 들려오는 싸늘한 음성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눈동자를 조심스레 굴리자, 나 못지않게 허탈한 표정을 짓는 금발의 미남자가 보였다. 남자의 싸늘함만큼은 여전했지만.
“에, 저는 해인이라고 합니다.”
“난 이름 따윌 듣고 싶은 게 아니다.”
일언지하에 말을 자르는 남자의 행동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어색한 웃음을 짓는 날 보던 남자의 고운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 정체가 뭐 길래 물의 영역을 지배할 수 있는 거지? 아니, 그것보다도 네게 느껴지는 거대한 물의 기운은 뭐지?”
“저, 설명하자면 많이 긴데…….”
쭈뼛거리는 날 보며 남자는 턱을 들어 나를 보았다. 그 오만함조차 잘 어울리는 것이, 타고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다. 하나도 빠짐없이 말해보도록.”
“그러니깐…….”
남자의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나는 오래전, 수영장에서 아버지에게 의해 차원이동이 되는 순간부터 아버지와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을 털었다. 그것은 결코 무시할 수없는 긴 이야기였지만, 남자는 묵묵히 내 말을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사람이냐!?’
어떻게 사람이, 그 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손가락하나 움직이질 않냐! 이야기를 끝마친 나는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석상처럼 미동 없이 있더니, 별안간 전신에 살기를 피우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살기에 뒤로 물러선 나는 그 살기가 나에게 향해있지 않음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이것 때문에 이런 거군… 제길!”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감당하기 힘든 저 어마어마한 살기가 향할 이에게 잠시 명복을 빌어주었다. 한참을 살기를 내뿜어대던 남자는 분풀이를 다했는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몸을 절로 움츠러들게 하는 살기를 피해 잠들어있는 이 세계의 물의 정령왕의 뒤에 쪼그려 앉아있던 나를 바라보는 남자의 모습은 깔끔함, 그 자체였다.
“해인이라고 했나?”
“에에… 네.”
삐죽거리며 대답하자, 그의 고운 얼굴이 살포시 일그러졌다.
“거기서 뭐하는 거지?”
‘좋은 말할 때 나와라’라는 말이 뒤에 무언으로 달려있음을 본능적으로 눈치 챈 나는 재빨리 그의 앞에 섰다. 쭈뼛거리는 날 보며 그는 뒤늦게 자신을 소개했다.
“소개가 늦었군. 나는 엘뤼엔 크리노 루사테. 형벌의 신이다.”
“…신이세요?”
‘뭐 저런 사람이 신이야!’ 라는 절규를 속으로 외쳤다. 내 되물음에 그는 약간 짜증난다는 기색을 풍겼다.
“불만인가?”
“…아뇨. 엘뤼엔 크리…….”
“그만. 그냥 ‘엘뤼엔’이라고 불러라.”
풀 네임을 말하는 내 말을 가로막은 형벌의 신 엘뤼엔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닮았군.”
“…네?”
“처음에 봐선 몰랐는데, 닮았군.”
앞뒤를 잘라 말하는 엘뤼엔을 보며 어이없어 하던 나는 내 뒤에 있는 물의 정령왕에게 다가가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물의 정령왕의 곁에 앉은 엘뤼엔은 물의 정령왕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는데, 믿을 수 없게도 엘뤼엔의 시선은 깊은 애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쉽게 만들 수없는 그 깊고도 깊은 애정 어린 시선에 나도 모르게 말문을 열었다.
“물의 정령왕과 굉장히 친하신가 봐요?”
“아아, 당연하지. 내 아들이니깐.”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 엘뤼엔이었지만, 그의 말은 꽤 큰 충격을 주었다. 정령왕이 신의 아들이라고?! 경악어린 내 시선을 알아차렸는지, 엘뤼엔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친아들은 아니다. 양자지.”
그럼 그렇지, 나 같은 경우가 또 있으려고.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린 나는 엘뤼엔이 물의 정령왕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는 것을 보았다.
“어서 돌아와라, 아들.”
왠지 부럽다, 라는 생각에 애정으로 철철 넘치는 그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몸을 일으켜 내게로 다가오는 엘뤼엔의 모습에 몸이 경직되었다. 내 앞에 멈춰선 그는 나를 위아래로 쭉 훑어보며 긴 검지로 턱을 괴고 있었다. 가끔씩 흐음, 거리면서 고개도 주억거리는 폼이 예사롭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고요히 잠들어있는 물의 정령왕-혹은 엘뤼엔의 아들-을 바라보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엘뤼엔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흐음, 뭐. 이 정도면.”
아니, 뭐가 이정도면입니까. 치밀어 오르는 의문을 애써 삼킨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는 그의 모습에 순간 당황했다. 갑자기 웃는 것도 당황하긴 했지만, 눈에 확 띄는 보기 드문 미모의 그가 웃자 주변이 환해지는 듯했다. 괜히 가슴이 두근거려오는 것이, 날 죽이려던 사람을 보고 이러는 내가 한심스럽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좋다, 결정했다.”
뭘 결정했다는 겁니까, 라는 말을 삼키며 그의 청명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왠지 무시무시한 말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자고로, 여자의 예감은 무시할 게 못 된다는 옛 말도 있지 않는가.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했다. 씩 웃은 그는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리곤 그 어느 때보다 상큼하게 말했다.
“너, 내 딸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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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입니다.
아이쿠, 우리 뤼엔파파. 사고 치셨군요 <-
엘라임군이 찾아오면 엘라임군vs뤼엔파파 의 불꽃튀는 대결이 펼쳐지는건가?<-틀려
그러고보니 해인이 뤼엔파파의 딸이 되면, 엘이랑 해인이는 남매네? <-
랄라라< 다음편도 조만간 올리도록 할게요오~
참, 제목은 ' +정령왕엘퀴네스] 잊혀진 이야기 - 숫자' 로 바꼈으니, 양해부탁드려요 >ㅅㅇ)r
돌은 항상 그랬듯이 10g만 받아요 ;ㅁ;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박가영 작성시간 07.07.07 으앗!!엘뤼엔에게딸이생긴건가요?!해인이는사랑많이받아서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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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氷水〃 작성시간 07.07.18 엘라임이 알면 신이든 뭐든 일단 한번 덤볐다가 엘라임까지 아들하라고 하면...재미껬당~♡<-혼자만의미친짓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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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aniel 작성시간 07.07.28 낄낄낄~~~ 엘라임이 알면 난리 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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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엘퀴네스。♡ 작성시간 07.08.10 따알? 엘이 무지 섭섭해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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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memoria2 작성시간 07.09.02 그럼...해인이는 아버지가 둘인가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