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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숙 시인 시집 『예문에 대한 예의』

작성자김수환|작성시간26.06.13|조회수46 목록 댓글 0

시인의 말

 

 

말[言]들이

 

저마다의

 

생을

 

살고

 

돌아오고 있다 

 

그 말들을

 

받아 적는다 

 

 

 

 

나물을 무치며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욕을 세워두고 

텃밭에 자라고 있는 시간을 훑어다가 

날것의 숨을 죽여서 저녁 찬을 만든다 

 

잎사귀로 위장한 모호한 욕망이나 

웃자란 가지 끝의 잡념을 떼어내고 

한 자밤 생의 자락을 오늘도 데쳐낸다 

 

한 술의 허기를 묵묵히 다독이는 

하루치 노동으로 또 하루를 덧대며 

온전한 직립을 향해 무릎을 일으킨다 

 

 

 

 

툰드라의 꿈

 - 하당에르 고원

 

시원(始原)이 들려주는 불멸의 노래 들으러 

오래 품은 피안의 땅, 여기까지 나는 왔네 

함께 온 소란한 마음 가만히 내려놓네 

 

한생을 끝낸 말[言]들이 돌아와 눕는 곳

갓 태어난 말들이 먼 길을 떠나는 곳 

고원은 생멸을 거듭하며 세대를 이어왔네

 

북방한계선 너머에서 영역을 넓혀가는 

발굴 안 된 질문들이 신비를 간직한 곳 

내 생의 숱한 의문들 어디쯤 묻혀 있나 

 

수직의 욕심 버리고 수평으로 살고 싶네 

뜬구름 흘려보내고 키 작은 소녀로 돌아가 

석기의 유목민 사내 만나 낮게 낮게 흐르고 싶네 

 

 

 

 

오래된 착각

 

 

멀어서 더 환한 유년의 뜰에 가면  

술래의 소리에 나풀나풀 가시내들

일제히 날아올라서 색깔 찾기 나선다 

 

가슴 총총 여물고 놀이 시들해질 즈음

세상에, 나와 같은 색 저기에 있었네 

눈 맞아 울타리 치고 이마 빛나던 시절 

 

순수는 때 묻고 통속은 집요한데 

연민은 가뭇없이 탐욕만 키워온 세월 

그래도 아름다웠다, 순결한 빨강으로 

 

열정이 바래니 보이는 상대의 색

최소한 분홍이나 주홍은 되겠거니

애초에 녹색이었단다 냉정한 현실 세계

 

울타리 밖 총천연색 고혹적인 눈짓에 

사는데 그렇게 여러 색깔 필요치 않아

여전히 장미의 전쟁 티격태격 빨강과 녹색  

 

 

 

 

감염

 - 詩作

 

 습관적인 사랑은 곤란해 사절이야 당신의 코드로 나

를 읽지 말아요 마음의 지문 닿기 전 살 [肉]냄새 먼저 더

듬는  

 

 당신은 물었다 일탈이 불온한가 마음은 갈대처럼 속임

수에 능하고 살들은 정직한 상인의 저울처럼 순결한데 

 

 슬픔이 날을 세우며 일어서는 밤이면 난도질당한 몸을 

당신에게 보낸다 마침내 몸이 떠난 몸은 물의 집이 된다 

 

 멀리서 울던 새는 전생으로 돌아가고 지금은 없는 내가 

당신을 꺼낸다 암호로 존재하던 당신, 이제는 자유다   

 

 

 

- 시집 『예문에 대한 예의』 시인수첩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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