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말
풍전등화 앞에서 시를 쓴 적 없다. 사즉생의 눈으로 세상
을 본 적 없다. 변방의 병사는 시를 쓰는데 시는 왜 전장으
로 나서지 못하는가. 빙충맞은 내 시의 쭉정이들이 하릴없
이 세상을 떠돌게 될 것이다.
백련재에서 쭉정이 원고들을 읽고 또 읽는다. 슬프다.
"셔?"를 읽으며*
바람이 난 걸까요 꽃 피고 새 우는 날
봄날의 위미리는 달아나기 좋은 곳인가요
한목숨 이승을 떠돌다 달아나 버린 당신
피 같은 한 편의 시, 밧줄엔 듯 목숨 걸고
크나큰 제주 바람으로 노래하던 한평생
가신 곳 돌담 너머로 불러 봐도 될까요, "셔?"
* 고 오승철 시인의 "셔?"를 일부 변용함
경위
젖가슴을 내주고 얻은 건 무엇일지
불을 끄고 숨죽이며 잃은 건 무엇일지
어둠을 파먹은 자리마다 새벽은 돋아났을지
늑대를 팔아서 외로움을 사들이던
소년의 거짓말을 그토록 사랑했다니
그토록 사람을 사랑한 양치기가 돌아왔다니
당신은 여태도 바구니를 짜고 있을까
독 오른 쐐기풀을 날로 씨로 달래며
견고한 주름을 켜고 핏줄들을 엮고 있을까
숨
뒤란에 안겨 놀던 네 몸을 뽑아내
누군가 앞마당에 던지고 사라지자
마음을 발가벗은 채 대낮이 다가왔다
붉게 익은 달리아가 여름을 쓸어내리고
간장독이 저릿하게 뙤약볕을 달이는 새
문지방 끓어오르던 고요도 빠져나갔다
심장 부근
빗물 괸 어둠을 찍어 빈 종이에 갖다댈 때
모서리의 기운은 서늘한 쇠 날 같다
도사린 첫 획이 아연, 자상을 입고 만다
숨 죽이고 죽이며 뒷걸음 칠 수 없는
까칠한 펜촉이 심장 부근을 서성이면
한 문장 꿈틀대다가 빗방울에 소스라친다
- 시조집 『바늘의 필적』 고요아침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