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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숙 시인 시조집 『바늘의 필적』

작성자김수환|작성시간26.06.16|조회수42 목록 댓글 0

시인의 말 

 

 

 풍전등화 앞에서 시를 쓴 적 없다. 사즉생의 눈으로 세상

을 본 적 없다. 변방의 병사는 시를 쓰는데 시는 왜 전장으

로 나서지 못하는가. 빙충맞은 내 시의 쭉정이들이 하릴없

이 세상을 떠돌게 될 것이다.

 백련재에서 쭉정이 원고들을 읽고 또 읽는다. 슬프다. 

 

 

 

 

"셔?"를 읽으며*

 

 

바람이 난 걸까요 꽃 피고 새 우는 날 

 

봄날의 위미리는 달아나기 좋은 곳인가요 

 

한목숨 이승을 떠돌다 달아나 버린 당신 

 

피 같은 한 편의 시, 밧줄엔 듯 목숨 걸고 

 

크나큰 제주 바람으로 노래하던 한평생 

 

가신 곳 돌담 너머로 불러 봐도 될까요, "셔?"

 

* 고 오승철 시인의 "셔?"를 일부 변용함 

 

 

 

 

경위

 

 

젖가슴을 내주고 얻은 건 무엇일지 

불을 끄고 숨죽이며 잃은 건 무엇일지 

어둠을 파먹은 자리마다 새벽은 돋아났을지 

 

늑대를 팔아서 외로움을 사들이던 

소년의 거짓말을 그토록 사랑했다니 

그토록 사람을 사랑한 양치기가 돌아왔다니 

 

당신은 여태도 바구니를 짜고 있을까

독 오른 쐐기풀을 날로 씨로 달래며 

견고한 주름을 켜고 핏줄들을 엮고 있을까

 

 

 

 

 

 

뒤란에 안겨 놀던 네 몸을 뽑아내 

 

누군가 앞마당에 던지고 사라지자 

 

마음을 발가벗은 채 대낮이 다가왔다

 

붉게 익은 달리아가 여름을 쓸어내리고 

 

간장독이 저릿하게 뙤약볕을 달이는 새 

 

문지방 끓어오르던 고요도 빠져나갔다 

 

 

 

 

심장 부근 

 

 

빗물 괸 어둠을 찍어 빈 종이에 갖다댈 때

 

모서리의 기운은 서늘한 쇠 날 같다 

 

도사린 첫 획이 아연, 자상을 입고 만다 

 

숨 죽이고 죽이며 뒷걸음 칠 수 없는 

 

까칠한 펜촉이 심장 부근을 서성이면

 

한 문장 꿈틀대다가 빗방울에 소스라친다   

 

 

 

- 시조집 『바늘의 필적』 고요아침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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