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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하려면

작성자우야꼬|작성시간20.06.18|조회수77 목록 댓글 0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하려면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째, 강제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 누가 안 하면 안 되도록 강제적으로 만들어서 하다가 보면 새로운 습관이 붙어서 변화하는 거예요. 아이들이 공부를 안 하는 걸 부모가 강제로 시키거나, 일을 안 하는 걸 강제로 시키거나, 군대에서 훈련받는 것이 다 그렇습니다. 외부 환경이 안 할 수 없도록 만들어져서 억지로 하다 보면 결국은 그것도 할 만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럴 때는 심리적인 억압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강제성 vs 자발성

그래도 결과가 좋을 수는 있습니다. 과정은 괴롭지만 결과는 좋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미래를 봐서 강제성을 동원합니다. 아이들이 힘들어해도 부모는 ‘다 너를 위해서 그렇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건 100퍼센트 다 효과가 나는 건 아니에요. 이렇게 강제성을 가질 때는 일시적으로는 변화하는 것 같지만 외부 환경이 바뀌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이런 방식은 효과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자발성에 기초한 방식이 있습니다. 교육의 효과가 가장 높을 때는 자발성에 기초할 때입니다. 자기 스스로 원해서 자발적으로 할 때 변화가 가장 잘 일어나고, 내부적인 스트레스도 없고, 괴로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개인의 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뭘 해야지!’ 하고 각오하고 결심하는 것은 마음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강제성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각오하고 결심하고 애쓰고 노력하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남이 나한테 강제하지 않더라도 내가 나한테 강제하니까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억압을 받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억누르고 있으면 어느 순간 터져버립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 되는 거예요.

그렇게 터뜨리면 속은 시원하지만, 또 정신 작용의 측면에서 보면 ‘내가 이걸 못해냈구나’,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과 후회가 듭니다. 아이들이 부모 말을 안 듣다가 부모가 계속 억압하면 집을 뛰쳐나가거나 사고를 치게 되죠. 그렇게 하면 잠시 속은 시원하지만 또 부모님한테 미안하고, 선생님한테 미안하고, 후회가 되는 것과 같아요.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합니다. 각오하고 결심하면서 그냥 밀고 나가는 거예요. 그러나 이것은 ‘파워’로 하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세상 사람들의 변화를 가져올 때 강제로 하기보다는 각각이 자발적으로 하도록 항상 유도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도 강제성보다는 자발성에 기초한 변화를 중요시합니다.

수행도 마찬가지예요. 대부분은 각오하고 결심하고, 뜻대로 안 되니까 포기하고 쓰러지고, 그러다가 일어나서 또 각오하고 결심하기를 반복해요. 세상에서 볼 때는 이것도 어쨌든 본인의 자발성이에요. 누가 하라고 한 게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심리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강제성에 들어갑니다.

각오와 결심 vs 알아차림

그러면 자발성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화가 나면 ‘아, 내가 지금 화난 상태에 있구나’ 하고, 내가 짜증이 나면 ‘아, 내가 지금 짜증이 나는구나’ 하고, 이렇게 억누르지 않고 알아차리는 겁니다. 알아차림을 한자어로 표현하면 ‘자각(自覺)’이에요. 자발적으로 할 때 변화가 일어나듯이 이 자각이 변화를 가져옵니다.

강제적으로 하면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강제적으로 해도 변화가 일어날 수 있지만 부작용이 많아요. 각오하고 결심해서 변화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고, 중도 포기하게 되면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부작용이 생깁니다.

그런데 알아차림은 부작용이 없어요. 알아차림은 ‘해야지!’ 하는 게 아닙니다. 누워서 ‘일어나야지!’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누워 있다. 일어나기 싫어하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거예요. 그래서 누워 있어도 스트레스를 안 받고, 일어나버려도 괜찮은 거예요. ‘일어나야지!’ 하고 누워있는 게 아니라 이미 벌떡 일어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늘 각오하고 결심합니다. 쓰레기 제로 운동도 자발적으로 하면 괜찮은데, 늘 감시 카메라와 남의 눈치를 보고 하게 되면 무의식 중에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해야지!’ 각오하고 결심했다가, 안 되면 ‘나는 이거밖에 안 되나’하고 후회했다가, 그러다가 또 잘되면 나는 잘났다고 설칩니다. 손끝 하나 건드리는 사람도 없는데 기고만장했다가, 제풀에 수그러들었다가 하는 거예요. 물 먹은 채소마냥 싱싱하게 일어섰다가 또 낮에 햇빛을 본 채소처럼 시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상태를 알아차리는 수행을 꾸준히 해나가면 교만함도 피해 갈 수 있고, 비굴함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이게 ‘중도(中道)’입니다. 알아차림을 통해 저절로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게 됩니다. ‘변해야지!’ 하는 것과는 달라요. 그래서 우리가 수행정진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수행정진도 자꾸 각오하고 결심하고 애써서 하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수행도 자기 욕심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수준은 10밖에 안 되는데 100은 되어야 한다고 정해놓고 죽기 살기로 노력을 하다가 제풀에 꺾여서 포기하는 거예요. 정토회 공동체에 사는 사람을 예로 들면 ‘나는 여기와 안 맞다’ 이러면서 뛰쳐나갔다가, 나가서 살다 보면 또 공동체가 ‘그래도 낫다’하고 다시 들어와요. 이렇게 우리는 인생을 결심하고 포기하기를 반복하면서 인생을 그렇게 살아갑니다.

꾸준히 하기

수행은 꾸준히 해야 합니다. 아침 5시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기로 일단 정했다면 그대로 지켜보세요. 지금까지는 5시에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5시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몸과 마음에서 저항이 생기는 겁니다. 그동안 안 하던 일을 하면 거기에 따르는 저항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니 그 저항을 극복해야 합니다. 저항을 극복해서 5시에 일어나는 것이 일정한 횟수를 넘겨버리면 저절로 5시에 눈이 떠지고, 절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더 좋아져요. 하고 나면 몸이 더 개운하고 좋아집니다. 그러나 그런 시기가 올 때까지는 기존의 습관 때문에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5시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그냥 하는 거예요. 절하기 싫으면 ‘음, 내 마음이 절하기를 지금 싫어하는구나’ 이렇게 다만 알아차리고 절을 하는 거예요. 싫어할 때 그만두는 것은 내 원래 업식에 따라가는 겁니다. 지금 내가 이걸 극복하는 게 과제이니까 그냥 하되, 각오하고 결심해서 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하는 거예요. 산에 올라갈 때 땀이 나고 다리가 아프면 각오하고 결심해서 한 발 한 발 힘들게 가는 게 아니잖아요. 올라가다 보면 다리가 아파지는 건 당연하다고 그냥 받아들이고,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겁니다. 너무 피곤하면 좀 쉬었다 올라가면 돼요. ‘빨리 올라가야지’, ‘죽기 살기로 올라가야지’, ‘포기해야지’, ‘내려가야지’ 이렇게 자꾸 각오하는 게 아니라 올라가기로 했으면 속도가 어떻든 한 발 한 발 올라가는 겁니다. 다리가 많이 아프면 속도를 약간 늦추면 되고, 더 많이 아프면 약간 쉬어주면 되고, 또 괜찮으면 다시 올라가면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조금 잘 되면 과욕을 내고, 조금 안 되면 물러나는 마음을 내고 이러잖아요.

하기로 했으면 꾸준히 하면 됩니다. 절을 할 때도 그냥 엎드려보고 안 죽었으면 일어나고, 일어나 보고 안 죽었으면 엎드리고, 엎드려서 안 죽었으면 일어나고, 이렇게 ‘안 죽은 동안은 한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하면 돼요. 각오하거나 결심하지 말고 이렇게 하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백팔 배도 되고, 천 배도 되고, 만 배도 됩니다.

그런 마음으로 5시에 일어나서 해보세요. 5시에 일어나는 것도 수행입니다. 더 자고 싶은 저항에 끌려가지 않는 것이니까요. 누가 싫은 소리를 하면 화가 탁 나죠? 자동으로 반응이 일어납니다. 거기에 끌려가지 않는 게 알아차림이고 수행이에요. 화가 난다고 바로 화를 팍 내버리는 것도 아니고, 이를 악물고 참는 것도 아니고, 화가 일어나는 걸 내가 아는 거예요.

‘어, 화가 나는구나. 내 습관이 이런 말에는 이렇게 저항감이 생기도록 형성이 되었구나.’

북채로 북을 때리면 소리가 나듯이 그냥 반응하는 것이니까 여기에는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 게 없어요. 북소리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잖아요. 북소리를 들으면서 ‘아, 저건 때리면 소리가 나도록 되어 있구나’ 하듯이 ‘내 까르마는 이렇게 건드리면 이렇게 반응하도록 되어 있구나’, ‘이런 얘기를 들으면 홱 하는 반응을 하도록 내 까르마가 형성되어 있구나’ 이렇게 아는 거예요. 이런 반응들을 지켜보면서 내 업식을 내가 알 수 있어요.

‘아, 나는 이렇게 반응하도록 프로그램이 짜여져 있구나.’

이런 프로그램은 어릴 때 자란 환경에서 이미 만들어진 거예요. 환경이 어떠했든 자라난 환경에 의해서 이미 형성돼버린 건데, 그걸 가지고 ‘부모님이 어릴 때 그랬다’, ‘아버지가 어릴 때 어떻게 해서 내가 이렇다’ 이런 얘기를 해봐야 지금은 아무런 도움이 안 돼요. 어떻게 형성이 됐든 지금 형성이 되어 있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반응하는 겁니다.

여기에 얽매인 노예 생활을 안 하려면 꾸준히 알아차림을 연습해야 합니다. 지금은 반응하더라도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기를 계속하면, 그 반응이 나오더라도 말이나 행동으로 격렬하게 튀어나올 정도까지는 안 가게 돼요. 그렇게 되도록 하는 게 수행이에요. 절을 하는 게 수행이 아니에요.

새벽 5시에 수행을 하는 이유

일상에서 이러저러한 소리를 듣고, 이러저러한 걸 보고, 이러저러한 상황에 처하고, 이러저러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까르마가 일어나는 겁니다. 여기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아침 5시에 일어난다는 하나의 형식을 정해놓은 거예요. 5시에 일어나기 싫기 때문에 그게 수행이 되는 겁니다. 5시에 저절로 일어나진다면 5시에 일어나는 것은 수행이라 할 수 없어요. 안 일어나지기 때문에 스트레스 안 받고 일어나기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몸이 저항해도 딱 일어나는 연습을 해봐야 해요. 절하는 것에 저항이 일어나기 때문에 절이 필요한 거예요. ‘절하기가 정말 재미있어요!’ 이러면 오히려 절을 그만해야 해요. 그건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마치 명상할 때 미세한 호흡을 알아차리라는 것과 같아요. 명상을 하면 다리가 칼로 도려내듯이 아픈 것은 안 알아차리려고 해도 알아차려집니다. 그런 걸 알아차리는 연습을 할 필요는 없어요. 그건 저절로 알아차려지는 것이니까요. 깨어있지 않으면 알아차려지지 않는 미세한 감각을 알아차려야 해요. 느낌과 감정도 미세할 때 알아차려야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해소가 되지, 격렬하게 일어났을 때는 이미 거친 말과 거친 행동이 나오게 돼요. 그러면 과보가 따르기 때문에 또 후회를 하게 됩니다.

수행은 알아차림을 연습하는 겁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통해 그걸 연습을 하는 거예요. 밭에 나가서 농사일을 하는 걸로 연습을 하고, 오르막을 올라갈 때는 다리가 아파도 그냥 올라가는 걸로 연습을 하고, 놓치면 ‘어, 내가 놓쳤구나’ 하고 다시 돌아오는 연습을 하고, 이렇게 연습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5시에 일어나는 것과 절하는 것을 연습 삼아 해보세요. 안 하겠다고 하면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5시에 수행을 안 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업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겠다는 목표를 포기하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 성질대로 살면 수행자라고 할 수가 없죠. 그렇게 사는 건 이 세상 사람 누구나 다 그렇게 사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자기감정대로 사는 사람보다 여러분의 얼굴이 더 어두운 건 자꾸 각오하고 결심해서 살기 때문이에요. 내면의 감정을 자꾸 억눌러서 스트레스를 받으니까 얼굴이 어두워지고, 넘어졌다가 일어났다가 또 넘어졌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그래서 절에 10년 살았는데도 ‘아이고, 꼬라지가 저게 뭐냐’ 이런 소리를 듣는 겁니다. 그러면 기분이 나빠졌다가 또 ‘그래, 나도 사람인데 어쩌겠어’ 이렇게 자기 합리화를 했다가, 또 ‘절에 10년 살아도 안 되니까 집에 가야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계속 불안정한 가운데 놓여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알아차림을 꾸준히 연습하면 반석처럼 편안한 상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어려우면 어렵고, 다리가 아프면 아프고, 몸이 아프면 아프고, 그래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아요. 몸이 아프다고 막 불안한 게 아니라, 몸이 아프면 아프구나 하고 지켜보다가, 그래도 더 아프면 병원에 가고, 치료가 가능하면 치료받고, 치료가 안 되면 아픈 대로 살고, 이렇게 아픈 것은 아픈 것이고 마음은 편안해야 해요. 일이 어려운 것은 어려운 것이고, 마음은 마음대로 평온합니다. 어려움이 있으면 연구를 해보고, 진척이 더디면 더딘 대로 하고, 안 되면 기계를 사용해서 해보고, 또 안 되면 남한테 부탁해서 해나가면 돼요. 이걸 갖고 ‘힘들어 죽겠다’, ‘어렵다’, ‘못살겠다’ 이러는 게 문제입니다.

무슨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해야만이 정진이 아니에요. 그 절에서는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정토회는 염불 하자고 정한 게 아니니까 안 해도 되잖아요. 대신 정토회에서는 아침 5시에 일어나기로 했고, 수행은 절을 하는 것으로 했어요. 그래서 절을 하는 거예요. 절하는 대신 명상하기로 했다면 명상을 하면 돼요. 그런데 여러분은 절하면 다리 아프다고 하고, 명상하면 졸리다고 하고, 염불 하라면 목이 아프다고 하고, 그래서 일을 시키면 왜 수행은 안 하고 일만 시키느냐고 불평합니다. 절은 하나의 수단이에요. 다만 우리가 이렇게 정한 거예요.

‘다수의 대중이 공통으로 하려면 어떤 수행이 가장 좋을까? 아, 절이 좋겠다. 힘이 들어서 하기 싫은 마음이 일어나 자꾸 나가떨어지니까 그 싫은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절이 제일 낫겠다. 또 운동도 되고 하심(下心)도 되니까 좋다.’

그래서 우리가 아침 수행은 절하자고 정한 거예요. 절을 빼고 명상을 40분 하자고 정해도 됩니다. 다만 정토회는 공통적으로 절을 하자고 정한 거예요.

시간은 4시로 해도 되고 6시로 해도 되는데, 우리가 공통적으로 6시에 하면 아침 일정이 촉박해지고, 4시에 하면 잠이 부족하다는 점을 고려해서 5시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경우에는 5시가 좀 불편해요. 5시에 일어나서 예불을 마치면 6시가 되고 밥까지 먹으면 7시가 되니까 밖에 나가면 벌써 볕이 뜨거워서 일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더 일찍 일어나서 예불하고 일을 하든지, 반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일부터 한 뒤에 밥을 먹고 예불을 하는 방식도 있을 수 있겠죠. 이렇게 정하기 나름이에요. 다만 절을 하기로 했으면 절을 해야 하고, 5시에 일어나기로 했으면 5시에 일어나는 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출처 스님의 하루 https://www.jungto.org/pomnyun/view/82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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