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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작성자우야꼬|작성시간20.06.18|조회수114 목록 댓글 0

수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

“저희 정토행자들은 매일 아침 눈 뜨고 일어나자마자 1시간은 오롯이 나를 위해서 정진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지난주 수행 법회에서 어느 분이 ‘보시와 봉사는 즐겁게 할 수 있는데, 매일 아침에 일어나서 수행하는 것이 어렵습니다’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수행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수행을 하나의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수행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런 관점을 지니기 때문에 ‘수행을 잘한다’, ‘수행을 못한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수행을 잘한다’
‘수행을 못한다’
‘수행이 안 된다’
‘수행이 힘들다’
‘수행이 어렵다’

이런 말이 나오는 이유는 수행을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일을 잘한다’
‘일을 못한다’
‘일이 안 된다’
‘일이 힘들다’
‘일이 어렵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수행은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절하는 것을 일로 삼고, 명상을 일로 삼고, 염불을 일로 삼고, 모든 것을 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 ‘된다’, ‘안 된다’, ‘잘한다’, ‘못한다’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겁니다. 수행은 그런 말들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은 긍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고,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할 때는 괴로워집니다.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미워지고, 원망하게 되고, 슬픔이 일어나고,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은 괴롭다는 겁니다. 마음이 괴로워지는 것은 육체로 말하면 병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에 병이 생기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몸이 아프지 않기를 원할 겁니다.

인간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건강하게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몸을 무리해서 사용하거나, 잘못 사용하거나, 병균에 감염이 되거나 하면 병이 납니다. 병이 난다는 것은 몸의 어딘가가 고장이 났다는 뜻입니다. 과거에는 병이 생긴 원인을 몰랐기 때문에 벌을 받아서 병이 생겼다고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의술이 발달하면서 몸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원리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몸에 무리가 가서 병이 생겼습니다’, ‘어떤 영양분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의사의 진단을 받고 그 문제점을 고치면 다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의 괴로움도 신의 벌 때문에 생긴 것도 아니고, 전생의 죄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왜 부정적으로 작용하게 되는지 그 원리를 알아서 ‘아, 이래서 부정적으로 작용했구나’ 하고 파악한 후 문제점을 고치면, 마치 몸이 건강을 회복하는 것처럼 마음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막 기쁘거나 즐겁거나 기분이 좋은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마음이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마음이 편안한 상태인 것을 뜻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여기 꽃이 한 송이 있습니다. 그 옆에 돌멩이 하나와 나뭇잎 하나가 있습니다. 이때 마음의 긍정적 작용은 꽃이 피어있을 때 꽃이 피어있는 줄 알고, 돌멩이가 있을 때 돌멩이가 있는 줄 알고, 나뭇잎이 하나 있을 때 나뭇잎이 하나 있는 줄 아는 거예요.

‘꽃이 피어있구나, 돌멩이가 있구나, 나뭇잎이 있구나’

이것이 정상적인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과거의 습관과 까르마가 반영되면 ‘꽃이 예뻐!’ 하고 들뜨거나, ‘왜 이 꽃은 아직 안 피지?’ 하고 싫은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이건 좋다’가 긍정적인 마음이고 ‘이건 싫다’가 부정적인 마음이 아닙니다. 대개 ‘싫다’는 것은 나쁜 마음이고, ‘좋다’는 것은 좋은 마음이라고 생각하지만, ‘좋다’는 마음과 ‘싫다’는 마음은 별개의 감정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는 같은 마음입니다.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좋다’, ‘싫다’ 하는 마음은 늘 같이 붙어 다닙니다. 그런데 이 중 하나만 떼어내서 좋은 마음만 가질 수 있다고 착각한 채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노력만 많이 했을 뿐 실제로 그것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부처님은 ‘좋다’, ‘싫다’는 감정이 일어날 때 이러한 작용 자체가 마음의 부정적 작용이라는 것을 간파하셨습니다. 마음이 안정된 상태에서 바라볼 때는 ‘꽃은 꽃이구나’, ‘돌멩이는 돌멩이구나’ 할 뿐입니다. 꽃을 봐서 약간 기분이 좋아져도 거기에 흥분되지 않고, 잎이라고 해서 약간 싫은 마음이 들더라도 미워하는 마음으로 증폭시키지 않는 상태를 유지할 때 우리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좋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를 자기가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 감정에 휘둘려서 자기 스스로 어떤 감정 상태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약간 들떠있구나’, ‘내가 조금 가라앉아 있구나’, ‘약간 싫어하는 마음이 올라오는구나’ 하고 자기 상태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공부를 해보면, 어떤 물건을 접하여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 그것은 그 물건 또는 경계(境界, 인식의 대상)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나의 까르마가 그 경계에 부딪혔을 때 부정적으로 작용할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언가를 보고 좋은 감정이 막 일어날 때도 그 대상 자체에 좋은 성질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의 까르마가 그 경계를 보고 호의적으로 반응할 뿐입니다.

내가 내 마음의 상태를 안다는 것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내가 나의 까르마를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까르마를 잘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까르마를 잘 모르기 때문에 까르마를 자기로 삼습니다. 까르마는 내가 아닙니다. 까르마는 나의 업식(業識)일 뿐입니다. 나에게 왜 그러한 까르마가 생겼는지는 알아차림을 통해 연구를 계속해봐야 알 수 있습니다. 자라나는 환경, 배운 교육 등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나의 까르마가 형성되었고, 그렇게 생겨난 까르마가 다시 현재의 환경에 부딪치면 자동으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응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는데, 우리는 그 반응에 푹 빠져서 허우적댑니다. 그래서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항상 괴로운 감정만 느끼는 것은 아닙니다. 괴로움이 큰 사람일수록 조금만 좋으면 얼굴이 밝아지고 난리를 피웁니다. 또 그런 사람은 조금 전만 해도 얼굴이 환하고 천사 같다가도, 조금만 안 좋아지면 죽는다고 난리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마음

그래서 수행에 장애가 되는 다섯 가지 마음 중에 첫 번째가 ‘좋다’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욕망이라고 합니다. 감각적 즐거움 또는 탐욕이라고도 합니다. 탐욕은 식욕, 수면욕, 성욕, 재물욕을 모두 포함할 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는 어떤 것을 보고 ‘야, 좋다!’ 하고 일으키는 마음 모두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는 욕망에 사로잡힌 상태를 뜻합니다. 이것이 수행하는데 커다란 장애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두 번째 마음은 첫 번째와 반대인 ‘싫다’ 하는 마음입니다. ‘싫다’는 것에 사로잡히면 짜증이 나고 화가 납니다. 흔히 첫 번째 마음을 탐욕이라고 하는 반면, 두 번째 마음을 성냄이라고 합니다. 이 둘을 붙여서 탐진(貪瞋)이라고 합니다. 탐진의 뿌리는 좋고 싫음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세 번째 마음은 무언가 내 뜻대로 되었을 때 일어나는 들뜨는 마음입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네 번째 마음은 이와 반대로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일어나는 가라앉은 마음입니다. 만사가 귀찮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상태로 법문을 듣거나 명상을 하거나 무언가를 하면 만사가 귀찮으니까 졸리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상태를 다른 말로 해태(懈怠), 태만, 게으름, 졸음이라고 표현합니다.

수행에 장애가 되는 다섯 번째 마음은 의심하는 마음입니다. ‘그게 정말 그런가?’ 하고 묻는 탐구적 의심이 아니라 ‘그렇게 한다고 깨달을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 의심입니다. ‘그런다고 될까?’ 하고 매사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은 수행에 큰 장애가 됩니다.

이를 수행에 방해되는 다섯 가지 장애라고 합니다. 이런 마음의 장애에 휘둘리면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마음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방법

평화로운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내 마음의 상태가 이렇구나’ 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내가 지금 이런 장애에 사로잡혀서 이렇게 되었구나’ 하고 자신의 상태를 알아가는 거예요. 자기 마음에 깨어있으면 장애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사로잡히게 됩니다. 놓쳐서 사로잡히게 되어도 ‘아, 놓쳐서 사로잡혔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거기서 멈추게 됩니다. 거기서도 못 알아차리게 되면 말이나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말이나 행동이 나온 뒤에도 그 즉시 ‘이렇게 말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참회를 할 수 있게 되고 더 이상 반복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일이든 미리 예방을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미리 예방을 하지 못했으면 병에 걸린 다음에라도 치료를 해야 하고, 치료도 늦었으면 죽지 않고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선 안 다치도록 조심하고, 다치게 되었으면 치료를 하고, 치료가 불가능하면 다리를 잘라내고 목발을 짚고서라도 다녀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이것 때문에 괴로울 일은 없습니다. 일이 일어난 다음에 우리는 늘 괴로워합니다.

‘내가 미리 대비하지 못했구나’
‘내가 치료를 제대로 안 했구나’
‘나는 왜 다친 다리로 평생 살아야 하나’

이렇게 후회하는 건 괴로운 상태에 빠지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가버린 일입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두고 후회하는 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가 많이 올 것으로 예상되면 둑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측보다 비가 더 많이 오면 비가 오는 중에도 둑을 쌓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많은 비가 오면 우선 몸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논밭이 떠내려가지 않습니까?’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 수는 있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일단 그렇게 비를 피하고, 비가 지나간 다음에 축대를 더 높이 쌓고 집을 다시 지어야 합니다. 이것 때문에 울고불고할 일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이 된다’, ‘수행이 안 된다’, ‘누구는 수행을 잘한다’, ‘누구는 수행을 못한다’ 이런 말들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자기 까르마에 휘둘린 것입니다. 그럴 때는 ‘저 사람이 지금 넘어졌구나’ 하고 알면 됩니다. 도반이 자주 넘어지는 것 같으면 ‘조심해라’ 이렇게 말을 해줄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 자꾸 넘어진다는 것은 다리가 아프든지, 정신적으로 집중을 안 하든지, 어떤 이유가 있는 겁니다.

여러분도 매일 아침마다 정진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어떤 날은 일어나기 싫을 때도 있고, 어떤 날은 다른 걸 하고 싶을 때도 있을 겁니다. 그런 것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수행을 하는 거예요. 수행이라는 것은 그 일어나기 싫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일어나버리는 것입니다.

108배가 진짜 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절을 하고 예불을 하는 게 수행이 아니라 5시에 일어나기 싫을 때 탁 일어나 보니 ‘별 거 아니네’ 하고 아는 게 수행이에요. 아까 일어나기 전에는 일어나는 게 너무 힘든 줄 알았는데 탁 일어나서 보니까 ‘아무 문제도 아니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게 수행입니다. 일어나서도 수행을 안 하고 있는 사람은 ‘아, 조금만 더 자면 좋겠는데’, ‘지금이라도 자러 갈까?’ 계속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지금 몸만 일어났지 마음은 아직 안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일어나기 싫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되고, 일어나고 싶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되고, 절하기 싫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되고, 절하고 싶은 것도 수행의 과제가 됩니다. 108배를 하기로 했는데 오늘 아침에 힘이 난다며 남보다 빨리 해서 200배 하려고 할 때 그 마음을 딱 보고 마음을 진정시켜서 절을 천천히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럴 때 ‘아, 내가 흥분했구나’ 이렇게 진정시키는 게 수행이에요. 만약 어제 108배를 못했다면 ‘어제 내가 놓쳤으니까 오늘은 200배를 해야 되겠다’ 하고 평정심으로 절을 하는 것과 절을 하다 보니 기분이 좋아져서 ‘오늘은 조금 더 해야지’ 하는 것은 다릅니다. 그럴 때 흥분된 마음을 알아차리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게 수행입니다. 오늘은 200배를 했으니까 수행을 두 배로 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건 욕망에 끌려간 것에 속합니다.

자기가 108배를 할 수 있는데도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천천히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것은 게으름입니다.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어서 다른 사람처럼 절을 하면 숨이 차는데도 ‘주어진 시간 안에 108배를 다 해야지’ 하는 것은 욕심입니다. 자기 몸 상태에 맞춰서 적절한 속도로 하면 됩니다.

다리가 부러진 게 아니면 나이가 여든이 되어도 천천히 절을 하면 108배를 다 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안 좋아서 아주 천천히 절을 해야 되면 다른 사람이 15분 만에 하는 걸 나는 1시간, 2시간 동안 하면 됩니다.

‘게으르지도 말고, 애쓰지도 말라.’

상황에 맞게 하면 됩니다. 애쓸 필요가 없어요. 애쓰게 되면, 마음이 들뜨게 되거나, 안 된다고 포기하게 됩니다. 아침에 5시에 일어나기로 했는데 눈을 떠보니 일어나기가 싫으면 ‘오늘은 일어나기 싫은 마음이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 싫은 마음에 사로잡힐 것이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일어날 것이냐는 나의 선택입니다. 마찬가지로 절을 하다가 싫은 마음이 일어나면, 그 싫은 마음에 사로잡힐 것이냐 그냥 절을 할 것이냐는 나의 선택이에요. 절하는 것 자체가 수행이 아니라, 그 싫은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냥 하는 게 수행입니다.

이건 등산하는 것과 같아요. 산을 올라가다가 힘들면 중간에 내려와도 됩니다. 그런데 꼭 올라가겠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몸이 건강하면 빨리 올라가고, 다리가 아프면 조금 천천히 가고, 더 아프면 중간에 쉬었다가 가면 됩니다. 올라가는 내내 ‘내가 여길 왜 올라가지?’, ‘위에 올라가면 뭐가 있나?’ 하고 온갖 생각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산에 올라가기로 한 건 내가 정했지 누가 올라가라고 억지로 시킨 게 아니잖아요. 올라간다는 목표를 세웠으면, 어떻게 가는지 그 방식은 형편이 되는 대로 선택하면 됩니다. 올라가면서 계속 후회하거나, 남보다 조금 빨리 간다고 좋아하거나, 남보다 늦었다고 자괴감을 갖는 건 모두 부정적인 마음입니다. 부정적인 마음에 사로잡히지 않는 것이 수행입니다.


출처 스님의 하루 https://www.jungto.org/pomnyun/view/82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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