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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보살이 복덕을 받지 않는 이유

작성자자연|작성시간22.11.04|조회수6 목록 댓글 0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은 복을 받지 않습니까? 수보리여! 보살은 지은 바 복덕에 탐착하지 않으므로 복덕을 받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생은 복을 짓지는 않으면서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현인은 복을 지어 복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보살은 복을 지어 복을 받지 않는다고 하니 수보리가 깜짝 놀라서 부처님께 ‘어떻게 복을 받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복을 받지 않으면 우리는 복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복이 필요 없는데 무엇 때문에 복을 짓느냐’ 하는 물음은 ‘돈이 필요 없는데 무엇 때문에 돈을 버느냐’ 하는 물음과 일맥상통합니다. 복을 짓지만 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복에 탐착 하지 않는다는 의미예요. 복에 탐착 하지 않으니까 복을 받지 않아도 상관이 없고, 복을 받으면 복을 일체중생을 구호하는 데 사용합니다. 그러니 복을 받아도 상관없습니다.


옛말에 ‘똥 누고 뒤도 안 돌아본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똥을 만들려면 진짜 일이 많고 돈도 많이 듭니다. 시장에 가서 음식 사서 요리해야죠. 입으로 씹어야죠. 배에 들어가면 소화를 시켜야죠. 온갖 노력 끝에 노란 똥이 나옵니다. 그런데 왜 똥을 누고 나서 뒤도 안 돌아볼까요? 이 말은 아무런 집착이 없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똥을 만드는 과정에서 다 즐겼기 때문이에요. 공덕에 집착하는 것은 똥에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똥 만드느라 고생했다는 생각을 하면 똥을 천금같이 여겨야 하지요.

30년 전에 홍수로 서울이 물에 잠긴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아는 흙공예 예술가의 집에 물이 잠겨서 20년간 정성 들여 만든 소상 작품이 모두 녹아버렸어요. 자신의 20년 정성이 다 사라져 버렸다며 큰 충격을 받아서 저에게 괴로움을 호소했습니다. 그때 제가 그에게 똥 얘기를 해 줬어요.

‘당신은 지금 똥에 집착하고 있군요. 지난 20년 동안 당신이 만든 소상이라는 작품은 음식을 먹고 난 후 남은 똥과 같습니다.’

똥 누고 뒤도 안 돌아보듯이 이미 그걸 만드는 과정에 내 인생의 기쁨을 누린 겁니다. 그렇게 깨우치고 나서야 그는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어요. 결과물인 똥에만 매여 살기 때문에 음식 만들 때는 음식 만드는 즐거움, 시장 볼 때는 시장 보는 즐거움, 음식 먹을 때는 음식 먹는 즐거움을 모두 놓치고 사는 겁니다. 결과물인 똥에 지금 여러분들은 집착해서 잃었다고 괴로워하고 얻었다고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수행자는 항상 회향(回向)을 합니다. 농사를 지으면 수확물이 생기듯이 우리가 기도하고 봉사하고 보시하면 공덕이 쌓이잖아요. 그 공덕을 마지막에는 고통받는 일체중생에게 회향합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양식이 되고, 병든 이에게 약이 되며, 배우지 못한 아이들에게는 배움의 터가 되고, 가난한 자에게 도움이 되고, 외로운 자에게 위로가 되고, 이렇게 모든 나의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나눠주는 걸 회향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은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먼저 돌아가신 조상 영가님들에게 회향해서 그분들이 왕생극락하게 하옵소서. 저에게 지금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에게 양식이 되게 하시고, 저에게 공덕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저 파키스탄에 홍수로 수해를 입은 이재민들에게 집이 되게 하여 주소서.’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남는 게 없어도 좋습니다. 나는 이미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기쁨을 누렸어요. 이런 자세를 가르치는 것이 불수불탐분(不受不貪分)입니다.

보살은 복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복을 받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범부중생은 복을 짓지도 않고 얻으려고만 합니다. 현인은 복을 지어서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지어서 못 받으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래서 현인은 해탈한 사람은 아닙니다. 보살은 복을 짓지만 복을 받지는 않아요. 오히려 다 나눠줍니다. 이것이 무위의 행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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