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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작성자자연|작성시간22.11.25|조회수52 목록 댓글 0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란 ‘제법이 공한 실제의 세계는 어떠한가’ 이런 뜻입니다. 반야심경에서는 실제의 세계가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이요, 부증불감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

첫째,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생멸이 있습니다. 우주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별들도 생겨나고 사라지고, 사람도 태어나고 죽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생멸의 세계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기뻐하고, 사람이 죽으면 슬퍼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일 뿐입니다. 우리는 ‘해가 뜬다, 해가 진다’라고 말합니다. 지구에 사는 내 눈에는 해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니까 인식한 대로 말하는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태양계를 보면 태양은 늘 그 자리에 있고 지구가 자전하는 겁니다. 실제로는 해가 뜨는 바도 없고, 지는 바도 없어요. 그것처럼 실제의 세계는 생하는 바도 없고 멸하는 바도 없고 여여합니다.

바닷가에서 파도를 보면 파도가 생겨나고 파도가 사라집니다.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이 있어요.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는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물이 출렁출렁할 뿐입니다. 파도 하나만 보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인식이 되는데, 바다 전체를 보면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바도 없습니다. 그냥 변할 뿐이에요. 개별로 볼 때는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인식이 되지만, 전체를 보면 생겨났다고 할 것도 없고 사라졌다고 할 것도 없어요. 이것이 불생불멸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불생불멸이라고 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생불멸의 의미는 생한다고 하지만 생했다고 할 수 없고, 멸했다고 하지만 멸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에요. 생한 것도 아니고 멸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인식과 실제는 항상 일치하지 않아요, 그 이유는...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1차원, 2차원, 3차원, 4차원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1차원은 수직선을 말해요. 수직선은 가운데가 숫자 ‘0’이고, x축만 있는 거예요. 오른쪽으로 갈수록 +1, +2, +3, +4가 되고, 왼쪽으로 갈수록 –1, –2, –3, –4 가 됩니다. 한마디로 파이프와 같은 거예요. 파이프 안에 구슬 하나가 이쪽에서 오고, 다른 하나는 저쪽에서 온다고 합시다. 그러면 구슬이 탁 하고 서로 부딪칩니다. 피할 곳이 없어요. 이것이 1차원이에요.


그러나 2차원은 평면입니다. 그래서 x축과 y축이 있어요. x축의 제로에도 y축으로는 0 콤마 1, 0 콤마 2, 0 콤마 3, 0 콤마 4, 이렇게 y축이 있습니다. 또 밑으로도 0 콤마 –1, 0 콤마 –2, 0 콤마 –3, 이런 식으로 y축이 있습니다. 평면은 표시를 어떻게 할까요? x 콤마 y, 이렇게 점의 위치를 두 숫자로 표시하죠. 우리가 서 있는 여기를 동경 몇 도, 북위 몇 도, 이렇게 표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1차원의 세계에 있는 사람은 두 개의 구슬 중에 하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서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2차원의 세계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에요. 다른 하나의 구슬을 y축으로 옮겨 놓으면 충돌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2차원에서는 ‘옆으로 갔네’ 하고 느끼는데, 1차원에서는 순간적으로 앞에 있던 게 금방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보이면 ‘다시 생겼네’ 이렇게 되는 거예요. 1차원에서는 생기고 사라지는 게 2차원에서는 그냥 이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3차원은 x축, y축, z축이 있습니다. 즉, 가로, 세로, 높이가 있는 세계입니다. 2차원에서는 건물을 1층밖에 지을 수가 없지만, 3차원에서는 같은 면적에 높이로 올라가면서 1층도 짓고, 2층도 짓고, 3층도 짓고, 4층도 지을 수 있습니다. x축 y축은 같은데 z축이 점점 달라지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말하면 개미는 2차원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높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래서 평면에 울타리를 쳐 놓으면 개미는 넘어갈 수가 없죠. 그런데 그 개미를 사람이 손으로 잡아 약간 위로 올리면, 평면의 눈을 가진 사람은 ‘없어져 버렸네’라고 생각할 겁니다.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하다가 막상 다시 내려오면 ‘개미가 나타났다’라고 말하며 귀신같다고 생각할 거예요. 이처럼 2차원에서는 생기고 사라지는 것이 3차원에서는 그냥 이동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4차원은 어떨까요? 4차원은 가로 세로 높이인 xyz에 시간 축인 t가 추가됩니다. 방 안에 내가 갇혀 있으면 3차원에서는 방 안에 벽을 뚫어야만 나갈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4차원에서는 시간 축으로 이동을 하면 됩니다. 4차원에서 보면 그냥 단순히 시간 축의 이동에 불과한데 3차원에서 보면 그냥 연기처럼 사라져 버려요. 그러다 갑자기 연기처럼 탁 나타나는 겁니다. 3차원에서 볼 때는 ‘사람이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4차원에 볼 때는 사람이 시간 이동을 한 거예요.

실제의 세계는 4차원의 세계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4차원의 세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의 속도만큼 빨리 가는 로켓이 있다고 가정하면, 그 로켓 안에서의 시간은 점점 제로에 가깝다는 것이 특수상대성 이론이죠. 이런 것처럼 차원에 따라서 달리 보입니다. 1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2차원적 사고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2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3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고, 3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은 4차원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장벽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탁발을 나갔는데 어느 바라문이 ‘왜 육신도 멀쩡한데 일을 해서 밥을 먹지, 얻어먹느냐?’ 하며 욕을 했어요. 3차원에서는 상대가 나한테 욕을 하면 ‘쟤가 나한테 욕을 했어. 나쁜 놈이야’ 하며 화를 내는 식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는데, 부처님은 욕하는 바라문에 대해서 참는 게 아니라 4차원적으로 대응을 했습니다. ‘그 바라문의 수준에서는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고 이해를 한 거죠. 그 차원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고 이해하니까 부처님께서는 빙긋이 웃었습니다.

부처님이 빙긋이 웃으니까 바라문이 또 ‘왜 웃냐?’ 하고 화를 냈습니다. 욕을 들으면 대응을 해야 하는 게 3차원의 세계인데, 부처님은 욕을 듣고도 웃으니까 바라문은 부처님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바라문에게 물었어요.

‘당신 집에 손님이 가끔 옵니까?’
‘네’

‘선물을 가지고 옵니까?’
‘네’

‘손님이 가져온 선물을 안 받으면 그 선물은 누구 거예요?’
‘가져온 사람 거죠’

이 정도면 알아들어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고 ‘그건 왜 물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금 전에 당신이 저한테 욕을 선물했는데 제가 웃으면서 안 받으면 그 욕이 누구의 것인가요?’

바라문은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고 3차원에 갇혀 있던 자기 생각이 탁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가 인지하는 것이 실제의 세계와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바로 불생불멸의 뜻입니다.

불구부정(不垢不淨)

둘째, 실제의 세계에서는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이것을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해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는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잖아요. 푸세식 화장실에 가보면 더럽죠. 더러운 곳에서 바글바글 사는 구더기가 불쌍해서 채로 건져서 깨끗이 씻은 후 하얀 그릇에 담아놓으면 어떨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깨끗해서 보기 좋잖아요. 그런데 구더기는 다 튀어나와서 다시 똥통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이 그들의 세계예요.


마약을 하는 사람은 마약이 몸을 병들게 해도 마약에 집착되어 있죠.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욕망에 집착하는 것이 자신을 병들게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데도 그 세계에서 기쁨을 느끼고 즐거움을 느끼잖아요. 엄마가 볼 때는 지금 게임에 빠진 아이들이 문제이지만, 아이들은 그 속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사실은 청결하고 불결하다고 말할 때의 위생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정확한 의미는 신성한 것도 없고 천한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신분적으로 브라만은 신성하고, 천민은 천하다고 여겼습니다. 모든 사람이 천민 가까이 가면 부정 탄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브라만이라고 성스럽다 할 것도 없고, 불가촉천민이라고 부정하다 할 것도 없다’

참 굉장한 얘기죠. 당시에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하다고 생각하는 문화도 있잖아요. 가게 첫 손님으로 여자가 오면 재수 없다고 한다거나, 인삼밭에 여자가 오면 재수 없다고 하거나, 배가 출항할 때 여자가 타면 재수 없다고 하거나, 이런 말들은 모두 남자는 성스럽고 여자는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성스러움도 없고 부정함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생긴 모양이 다를 뿐이지 남자라고 해서 우월하다 할 것이 없고, 여자라고 해서 열등하다고 할 것이 없다는 겁니다.

부증불감(不增不減)

셋째, 실제의 세계는 늘어나는 것도 없고 줄어드는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재산이 늘어났다’, ‘재산이 줄어들었다’, ‘몸무게가 늘어났다’, ‘몸무게가 줄어들었다’ 이런 말들을 늘 사용하는데, 왜 늘어나는 게 없고 줄어드는 게 없다고 할까요?

저울대를 놓고 왼쪽에 2kg 저울추를 두고, 오른쪽에 큰 바구니를 뒀어요. 큰 바구니 안에는 작은 바구니 2개를 넣어 두고, 이쪽 바구니에는 사과 5개를 넣고, 저쪽 바구니에는 배 5개를 넣어 두었다고 합시다. 이쪽 바구니에 있는 배를 하나 집어서 저쪽 바구니에 집어넣으면, 배 바구니는 하나가 줄고, 사과 바구니는 하나가 늘었죠. 그런데 저울추는 안 움직입니다. 2개의 작은 바구니 사이에서는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큰 바구니 안에는 사과 5개와 배 5개가 그대로 있잖아요. 좁게 보느냐, 넓게 보느냐, 짧게 보느냐, 길게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인식이 다르게 일어납니다.

비행기에서 기내식을 먹으면 몸무게가 늘어납니다. 그때 비행기가 무거워졌을까요? 탑승객이 먹을 음식물이 가득 실린 비행기에서 그 음식물을 다 나눠줘서 싹 없어졌다고 해서 비행기가 가벼워질까요? 개개인으로 보면 늘었다 줄었다 하지만, 비행기 전체로 보면 늘어난 것도 없고 줄어든 것도 없습니다.

부모와 두 명의 자식들이 명절에 카드놀이를 하면서 돈내기를 했다고 합시다. 아빠가 좀 따고, 엄마가 좀 잃고, 큰 애가 좀 따고, 작은 애가 좀 잃었어요. 그러면 애들은 싸웁니다. 돈을 잃었다고 화내고, 돈을 땄다고 좋아해요. 자기 돈 가져간 것 좀 달라고 하고, 자기가 땄는데 왜 돌려줘야 하냐면서 막 울고 싸우면, 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애들아, 그만 싸워라. 그 돈이 그 돈이잖니? 그게 어디 간 것도 아니고, 그 자리에 있는데 싸우기는 왜 싸워’

엄마는 집안 전체를 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가 있는 거예요. 자식들은 자기만 보니까 절대로 그 돈이 그 돈이 아닌 거죠. 이런 경험은 종종 생활 속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 돈이 그 돈인 줄 아는 사람은 그 일로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너의 것과 나의 것이 따로 있는 사람은 땄느니 잃었느니 하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자신만 보거나 자기 가족만 보거나 자기 지역만 보거나 자기 나라만 보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을 하나로 봅니다. 만약에 한국과 일본이 싸웠다고 가정해봅시다. 우리는 부처님께 한국이 이기게 해달라고 빕니다. 그 말은 일본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거잖아요. 일본 사람들도 자기 나라가 이기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빌어요. 그것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죽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이 이 사람 말 듣고 저 사람 죽이고, 저 사람 말 듣고 이 사람 죽이고, 이런 일을 하는 존재일까요? 이런 신앙이 어떻게 진리겠어요?

그러니 여러분들이 눈을 조금 크게 떠야 합니다. 작게 보면 이기고 지는 것이 있지만, 크게 보면 이기고 지는 개념이 없어집니다. 늘어나고 줄어드는 게 없는 줄 알아야 해요. 본질의 세계에서는 부증불감이 진실입니다.

오늘 강의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세 가지를 공부했습니다. 진리의 세계에는 세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것을 ‘불일불이’라고 합니다. 이 세계는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정지한 것도 아닙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습니다. 이것을 ‘무시무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창조론이 나오고 종말론이 나오는 거예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줄 알면 창조도 없고 종말도 없어요. 변화만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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