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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나를 버리는 수행과 내가 주체가 되는 삶은 모순이 아닐까요?

작성자자연|작성시간22.12.20|조회수26 목록 댓글 0


“수행문에는 무아, 무소유, 무아집이 수행의 목표라고 하면서 나를 버리고, 내 것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의 주인으로 당당하게 살라는 법문도 하셨습니다. 내 삶의 주인으로 살려면 내가 주체적이어야 하는데 나를 버리는 것과 모순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공부하면서 충분히 궁금증이 들 만한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돈에 집착하면, 우선 원하는 만큼 돈을 얻지 못할 때 껄덕거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보다 돈이 많은 사람 앞에 서면 비굴해집니다. 반대로 나보다 돈이 적은 사람 앞에서는 나도 모르게 괜히 목에 힘을 주고 교만을 부리게 됩니다. 또, 무언가 돈이 된다 싶으면 거기에 마음을 확 빼앗겨 버립니다. 그에 따른 위험도 눈에 잘 안 들어옵니다. 돈을 빨리 손에 쥐려고 하니까 그만큼 윤리나 도덕도 잘 안 보이게 됩니다.


반면, 돈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면 우선 돈에 덜 껄덕거리게 되고, 누가 돈이 많다고 해도 비굴해지지 않고, 누가 돈이 적다고 해도 그 앞에서 거만해지지 않고, 어디 돈이 되는 일이 있다고 해도 혹해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일도 적어집니다. 그 일이 어떤지 살펴보고 필요하면 하고, 필요하지 않으면 안 하게 됩니다. 그러니 돈에 대한 집착을 놓아야 내가 자유로워지는 겁니다. 돈에 집착하게 되면 그만큼 내가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내 생각을 고집하게 되면, 내 생각에 반대하는 사람과 마주했을 때 기분이 나빠지고 갈등하는 일이 생깁니다. 그런데 내가 내 생각을 고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그냥 들을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네, 그것도 한 방법이겠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으니, 우선 화가 나지 않고, 그 사람과의 관계도 나빠지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지만 나는 이렇게 가겠습니다’ 하고 내 길을 가도 됩니다. 그때도 그 사람과는 갈등 없이 그냥 내 길을 갈 수 있습니다. 또, 그 사람의 방법이 괜찮겠다 싶으면 기존의 생각을 내려놓고 같이 가도 괜찮습니다. 그만큼 내 의견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나에게 자유가 많아집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할수록 자유가 없어지는 거예요.

‘이것이 내 것이다’ 하고 고집할수록 자유가 없어집니다. ‘이건 그 누구의 것도 아니기 때문에 누가 써도 좋다’ 이런 관점을 가질수록 자유의 영역이 훨씬 더 넓어집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중심을 잘 잡고 자기 삶을 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신체의 감촉과 생각에 끄달리기가 쉽습니다. 이리 끌면 이리 가고, 저리 끌면 저리 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즉, 누군가 나의 이런 카르마를 알면 나를 조종할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뭐라고 하면 화낸다’, ‘저 사람은 뭐라고 하면 웃는다’, ‘저 사람을 유혹하려면 어떻게 하면 된다’, ‘저 사람은 돈을 주면 유혹이 된다’, ‘저 사람은 잘생긴 사람에게 쉽게 유혹된다’ 이렇게 내 카르마에 끄달리면 자유가 없는 삶을 살게 됩니다.

여러분도 자기가 중심이 돼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 그렇지 않습니다. 늘 카르마에 끄달려 살아갑니다. 그 모습은 마치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습니다. 자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 바람이 멈추면 어느 골짜기에 떨어질지 모르죠.

그런데 나를 고집하지 않고, 내 것을 고집하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사람의 말에 덜 끄달리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하고 판단이 되면 그 방법으로 하면 되고, 듣고 나서 ‘그럴 수도 있지만 나는 내 길을 가고 싶다’ 하면 내가 생각한 대로 하면 됩니다. 그래서 내 생각을 버릴수록 자기중심이 잡히게 됩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된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끌려 다니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세상에 끌려 다닙니다. 여러분이 웃고, 여러분이 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분위기에 따라 웃고, 분위기에 따라 우는 거예요. 자신의 감정 조절이 마음대로 안 되는 거죠.

앞으로 빅데이터 기술과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점점 발달하면 여러분들을 거의 로봇처럼 조종할 수 있을 겁니다. 여러분들의 생활습관을 관찰하면 여러분의 생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평소 생각을 읽어서 거기에 딱 맞는 광고를 하면, 여러분들이 선거에서 누구를 투표할지 선택도 유도할 수 있고, 물건을 팔 때도 여러분들이 끌릴 만한 맞춤형 광고를 탁 보여줘서 구매하도록 할 수도 있죠.

그런데 내 생각을 놓아버리면 내 눈에 보이는 것에 끄달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내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 의견이 옳다는 고집을 내려놓아야 하고, 내 것이라는 고집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고집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은 한 번에 이해되기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러니 공부를 조금 더 하셔야 해요. 여러분들은 자유를 생각할 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자유다’라고 생각할 거예요. 내 마음대로 하는 게 자유라고 생각하니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그만큼 속박을 받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는 건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뜻하죠? 그런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게 되면 곧바로 불행으로 바뀌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는 걸 행복으로 삼으면 늘 행복과 불행이 되풀이되는 윤회에 빠지게 됩니다. 그건 진정한 행복이 아닙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놓아버리면 속박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기 때문에 속박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졌을 때의 기분 좋음을 행복으로 삼기 때문에 불행은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원하는 대로 하고자 하는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괴로움이 사라져 버립니다. 설령 한 순간 놓쳐서 그런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알아차리면 욕망이 사라져 버립니다.

해탈과 열반이라는 용어를 자유와 행복으로 번역할 때가 많은데, 정확하게 말하면 여러분이 평소 생각하는 ‘내 마음대로 하는 자유’, ‘내가 원하는 것이 이뤄져서 느끼는 행복’ 이런 개념이 아닙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하는 자유는 투쟁에서 필요했지만, 수행적 관점에서는 결국 자기 성질대로 안 되면 죽겠다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건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인간의 권리는 하늘이 부여한 천부적 인권이라는 생각도 인권 신장 면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결국 하늘의 생각이 바뀌면 인권은 침해해도 된다는 뜻으로 악용될 수 있습니다. 자칫하면 신의 이름으로는 인간을 차별하고 탄압해도 된다는 뜻이 받아들여질 수 있어요.

불교에서는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권리는 하늘도, 신도, 인간도,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 관점에서는 하늘의 이름으로도, 신의 이름으로도 인간의 권리를 함부로 할 수가 없어요. 앞에서 이야기한 자유나 인권과는 차원이 다른 개념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물질적 풍요가 일어나고 많은 민주주의적 발전을 해왔는데도 삶의 고뇌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학교 교육을 통해서 서양식 사고에 젖어 있고, 또 자본주의적 사회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는 거예요. 만약 우리 사회가 아직도 배가 고프고, 독재 체제 하에서 많은 억압을 받고 있다면, 지금까지 배운 서양적 가치가 여전히 중요했을 겁니다. 우선 배고픔을 해결해야 하고, 독재 탄압 문제를 해결해야 하니까요. 그때는 서양적 자유와 인권이 중요해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러한 문제가 해결되었는데도 여전히 삶의 고뇌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이 근본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는 앞으로 불교적 가치가 더욱 중요해질 거예요.

부처님은 왕이 될 수 있었는데도 삶의 고뇌가 있었기 때문에 ‘왜 그런가’ 하고 탐구를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2,600년의 시간이 지난 오늘날 우리가 갖는 문제의식에 가장 근접해 있으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약 못 먹어서 헐떡거리고, 못 입어서 헐떡거리고, 하고 싶은 걸 못 해봐서 헐떡거린다면, 일단 누군가 먹게 해 주고 입게 해 주면 해결됩니다. 이런 방식의 문제 해결이 통할 때 누군가에게 비는 종교가 나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삶의 고뇌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인간 고뇌의 근본이 뭘까?’ 하고 탐구를 하신 거예요. 오늘날 우리들은 먹고, 입고, 자는 것이 해결되었는데도 여전히 고뇌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문제의식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네, 말씀 감사합니다. 아직 저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생각이 너무 앞서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제 생각을 더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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