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님의Q&A 게시판

상대방이 더 이상 사과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떡하죠?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1.18|조회수7 목록 댓글 0

상대방이 더 이상 사과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떡하죠?

“Because of our Karma and the practice of repentance, often requiring further practice and repeated effort until new habits are gained can you please speak to the harm that comes to others as we are gaining the new habits and insight? What do you recommend when someone tells us that they don't want to hear any more apologies? Or similarly, for us, what do you recommend, when we don't want to hear any more apologies after being hurt repeatedly especially when it is like family members that it's hard to get distance from?”

(우리는 업식을 갖고 있고, 습관을 고치는 데는 반복적인 노력이 들고, 끊임없는 참회 정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습관과 통찰력을 얻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데, 이것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상대방이 더 이상 사과를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비슷하게 저도 상대방에게 반복적으로 상처를 받았고, 더 이상 사과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특히 그 사람이 가족이어서 거리를 두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대가 사과하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으면 됩니다. 참회란 상대에게 사과하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잘못을 뉘우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내가 잘못 행동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것이 참회입니다. 그러고 나서 ‘이런 행동, 이런 생각, 이런 말은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좋겠다’ 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잘못이 반복된다면 또다시 그렇게 생각하거나, 그것이 이미 습관화되어 있어서 때론 알더라도 개선되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에 내가 사과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사과를 해야 하고,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사과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똑같은 행위가 개선되지 않고 반복되면서 말로만 사과하는 걸 상대가 바라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상대에게 사과의 말을 한 번 했더니 상대가 더 이상 사과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 행위를 개선해 주는 게 진정한 사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잘못을 사과 한 마디로 없애려는 것은 자기중심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과라는 것은 상대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야 합니다. 20번을 사과했는데도 상대가 부족하다고 하면 더 사과를 해야 되고요. 반대로 사과를 두 번 하는 것도 싫어한다면 사과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양식이 다릅니다. 까르마란 사람마다 가진 특성을 말합니다. ‘까르마는 왜 사람마다 다를까’ 하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같은 집안에서 같은 부모를 두고 태어난 자식들도 서로 다르잖아요. 그래서 이런 서로 다른 특성은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태어나는 생년월일시, 즉 몇 년도 몇 월 며칠 몇 시에 태어났느냐 하는 네 가지 조건에 의해서 인간의 까르마가 정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인도에서는 전생에 지은 행위에 의해서 까르마가 결정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는 까르마는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운명론’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를 깊이 탐구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까르마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까르마는 형성된 것이다.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까르마는 소멸될 수 있다.’

물론 까르마는 오랫동안의 습관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화시키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변화시키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까르마는 본래 타고났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운명론을 부정하셨습니다. 까르마는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변화시키기가 어렵긴 하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어려운 것과 불가능한 것은 다릅니다.


주로 3살 이전에 형성된 자아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변화시키기가 어렵습니다. ‘나’라고 인지되는 자의식은 3살 이전에 주로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다음으로 어린 시절에 형성된 까르마는 두 번째로 변화시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변화시키기 어렵다는 것과 본래부터 그렇다는 것은 그 의미가 다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입니다.

첫째, 그냥 습관을 인정하고 거기에 따르는 어떤 비난, 손실, 과보도 모두 받아들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둘째, 비난과 손실이 너무 크면 조금 힘들더라도 큰 손실을 막기 위해서 일부 변화를 시켜야 합니다. 거기에는 그만큼 저항이 따릅니다. 그 저항을 이겨내야 합니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잡으면 됩니다. 그러나 이미 무의식적으로 습관화되어 있을 때는 머리로 잘못된 것을 알고 있어도 찰나에 즉각적으로 반응해 버리기 때문에 아는 것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작용하고 반응하는 마음을 알아차리고 멈추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미 습관이 되어버려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개선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바꾸려고 하는데 바꿔지지 않으면 또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럴 때는 현실적으로 과보를 받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변화하고자 하는 목표 의식이 얼마나 강하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즉문즉설을 할 때 여러분이 어느 정도로 자신의 변화에 대한 각오가 있느냐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바꾸려고 하지 말고 그냥 생긴 대로 사세요’ 하고 말할 때도 있고, ‘한번 도전해 보세요’ 하고 말할 때도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바꾸는 것도 욕심을 내서 한꺼번에 다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면 바꿔지지 않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 실망하고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러면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행을 한 것이 더욱더 괴로움을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돼요. 그 괴로움은 내가 바뀌지 않는 데서 오는 게 아니고, 바꾸려고 하는 노력은 적게 하면서 변화는 많이 일어나길 바라는 욕심에서 발생하는 겁니다.”

“Thank you.”
(감사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