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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저는 윤회를 확실히 믿습니다, 이것도 집착일까요?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1.19|조회수41 목록 댓글 0


“제 내면에는 윤회에 대한 확신이 강하고 분명합니다. 윤회가 없다고 받아들이자니 제 내면에서 도저히 수용되지 않습니다. 윤회는 믿음의 문제라 믿는 사람에게는 전생이 있고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없다고 하신 스님의 법문을 기억합니다. 또 윤회는 불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힌두교의 문화라고 하셨는데 저는 자꾸 의문이 일어납니다. 티베트 불교 달라이라마의 답변이나 초기 불교 경전인 니까야의 설명에는 윤회가 나옵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윤회를 믿는 린포체의 활동이 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것들로 봐서 윤회가 드러나고 있음에도 정토회는 윤회 사상을 다분히 배제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집착을 하고 있는 걸까요?”

“질문자는 윤회에 대해서 확신이 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확신이라는 게 믿음 아닙니까? 나는 분명히 윤회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겁니다. 목사님, 신부님, 교황님, 이런 분들은 하느님이 있다고 믿을까요, 없다고 믿을까요?”

“있다고 믿습니다.”

“그분들은 신이 있다고 확신하겠죠?”

“네”


“그래서 당신들도 은총을 받으려고 하고, 사람들에게 강복을 주려고 하기도 하죠. 그러면 질문자가 윤회를 있다고 믿으나 그분들이 신이 있다고 믿는 거나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믿음의 문제니까 차이는 없을 것 같습니다.”

“수많은 무슬림들은 신을 위해서 스스로 죽기도 하는데 그것을 성전이라고 하잖아요. 성전을 하는 사람들은 알라신을 믿을까요?”

“믿습니다.”

“인도에 가보면 14억 인구가 대부분 힌두 신전에 가서 아침마다 브라만으로부터 머리에 빨간 물감을 바르고 축복을 받잖아요. 그들은 비슈누, 시바, 브라만, 이런 신들을 믿을까요?”

“믿겠죠.”

“믿음에 대해서는 ‘가짜다’, ‘진짜다’, ‘신은 있다’, ‘신은 없다’ 하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 속에서 신을 믿는 사람들은 ‘어떻게 신을 안 믿느냐! 저 무신론자는 죽여도 된다’ 하고 생각해서 많은 무신론자들을 죽였잖아요.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시대에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유교는 신을 믿는 게 아니라 조상신을 믿습니다. 그래서 조상신을 믿지 않거나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을 죽였습니다. 기독교도 ‘하나님을 믿어야지 무슨 조상신 같은 귀신을 믿느냐, 그런 건 미신이다’ 하면서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믿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을 갖고 서로 옳으니 그르니, 내 것이 더 좋으니 하면서 시비를 했기 때문에 수없는 학살과 그에 따르는 분쟁이 일어났어요.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런 것에 일절 관여를 안 합니다. 신의 존재 여부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저도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관여를 안 합니다. 그런 문제는 개인의 믿음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신은 있어!’, ‘신이란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한 적이 없고, 윤회에 대해서도 ‘한다’, ‘안 한다’ 하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해당하니까 관여하지 말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갖고 다투면 갈등과 분노를 유발하기 때문이에요. 분노를 일으키지 말라는 게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분노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갖고 다른 믿음에 대해서는 비판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관점은 이런 믿고 안 믿고의 관점이 아니라, 내가 지금 분노가 일어나는지 아닌지입니다. 내가 뭘 믿든 안 믿든 그건 관여하지 않고 내가 지금 분노가 일어나면 그 순간 한 생각에 사로잡힌 것이라는 관점이에요. 관점 자체가 다릅니다.

신을 믿는 것도 유일신을 믿는 종교가 있고, 여러 가지 신을 믿는 종교가 있잖아요. 이슬람이나 기독교는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고, 인도의 힌두교와 일본의 신도는 여러 신을 믿습니다. 교육 신, 결혼 신, 재물 신이 따로 있어서 신이 마치 사람의 직업처럼 역할이 분담되어 있어요. 그래서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다신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해서 또 갈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교는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 유일신이냐 다신교이냐, 이런 부분에 일절 관여를 안 합니다. 그것보다는 관점 자체가 ‘내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는지 아닌지’, ‘내 마음에서 욕심이 일어나는지 아닌지’, ‘내 마음이 어리석은지 지혜로운지’ 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이것을 탐진치라고 합니다. 내 마음에 탐진치가 일어나느냐 하는 것을 중요시하는 것이 불교입니다.

붓다의 가르침은 어떤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담마’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현재 대부분의 한국 불교인들은 윤회를 믿으면 불교이고, 안 믿으면 불교가 아니라고 생각하죠. 마치 하느님을 믿으면 기독교이고, 믿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종교로서의 불교에서는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해요. 그러나 ‘담마’로서의 불교는 믿음을 갖고 논하는 것이 아니에요. 관점 자체가 다릅니다.

비유를 들어 설명하면, 옷의 기능은 몸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몸을 가리는 기능도 있고, 몸을 따뜻하게 하는 기능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옷을 무슨 색깔로 하든지, 무슨 모양으로 하든지 하는 것은 상관이 없어요. 옷이 몸을 가릴 수 있느냐, 옷이 몸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느냐, 이것만 보지 나머지는 논하지 않습니다. 옷 색깔이나 모양은 각자 자신들의 문화입니다. 빨간색을 입든, 노란색을 입든, 흰색을 입든, 검은색을 입든, 모양을 이렇게 만들어 입든 저렇게 만들어 입든, 그것은 각자의 문화라는 거죠.


장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이 부처님께 ‘장례를 어떻게 치를까요?’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장례 문제는 너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재가자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화장을 하든, 매장을 하든, 풍장을 하든, 조장을 하든, 수장을 하든, 그들의 풍속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거죠. 죽은 시신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는 문화마다 모두 다르니까요. 그런데 종교에서는 ‘화장을 해야 윤회를 안 한다’, ‘매장을 해야 천국에 간다’ 이렇게 말하면서 장례를 어떻게 치러야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는지 이야기하죠. 그러나 장례는 재가자들이 그들의 문화에 맞게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두라는 것이 ‘담마’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라는 것입니다. 인류 문화사로 보면 종교도 문화에 속합니다. 무엇을 믿고, 제사를 어떻게 지내고, 옷을 어떻게 입고, 기도를 어떻게 하고, 이런 것들은 다 그들의 사회 풍속이기 때문에 존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담마’는 그런 문화와는 관계가 없다는 거죠.

사람이 살려면 문화가 있어야 하잖아요. 옷 문화, 음식 문화, 의복 문화, 언어문화도 모두 필요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담마’만 딱 가르쳤기 때문에, 내용물만 주고 그릇을 안 주었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딘가에 담기는 담아야 한다는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에서 또는 어느 종파에서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게 된 거예요. 그 내용물만 보고 그릇을 안 보면 되는데, 그릇을 자꾸 보니까 불교가 서로 다르게 느껴지는 겁니다. 그릇에 따라 이런 불교, 저런 불교가 생기는 거예요.

부처님은 내용물만 딱 주었습니다. 대신 부처님은 그 당시 브라만의 형식이 아닌 출가 사문의 형식을 빌었어요. 그렇다고 출가 사문이 하는 일이 다 옳다고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출가 수행자들이 생활하는 형식은 출가 사문의 문화를 따른 겁니다. 머리를 깎고, 분소의를 걸치고, 걸식하는 출가 사문의 문화를 받아들인 거예요. 그러다 보니 출가 사문의 문화가 불교문화가 되어 버린 거죠. 대부분의 사람은 겉모양을 보고 무엇인지 알지, 그 내용물은 잘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내용물이 아니라 그릇이 불교가 된 거예요.

불교가 인도에서 생겼으니까 인도의 옷을 입은 겁니다. 인도 옷이라는 게 힌두교를 말하잖아요. 힌두교에는 윤회와 신을 믿는 내용이 나옵니다. 특히 소승불교보다 대승불교에는 힌두신이 더 많이 등장하는데, 화엄경을 읽어보면 정말 많은 신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불교가 인도의 옷만 입은 게 아니라 중국으로 건너가서는 또 도교의 옷을 입었고, 한국으로 건너와서는 산신각과 칠성각이라는 전통문화의 옷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이 보기에는 ‘산신각과 칠성각이 왜 한국 불교에만 있지? 아! 이건 한국에서 생겼구나!’ 이렇게 생각할 텐데, 한국 사람이 보기에는 ‘산신각과 칠성각이 원래 불교이구나!’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것처럼 그것이 문화이냐 진실이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예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건 좋은 종교 문화지만, 그것이 진실이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믿음과 문화에 대해서는 진실인지 아닌지 논쟁을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믿음에 대해서는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일절 얘기하지 않습니다. 저는 달라이라마도 직접 만나 뵙고 그들의 문화를 존중합니다. 힌두 신앙도 존중하고, 기독교 신앙도 존중하고, 한국의 다른 각 종파의 종교의식도 모두 존중합니다.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저는 언급을 하지 않아요. 죽음이 두려우니까 죽은 뒤의 일을 걱정하는 겁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은 죽은 뒤에 어디로 가는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어딘가로 가도 좋고, 안 가도 좋고, 상관이 없습니다. 윤회해도 괜찮고, 안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이 계셔도 괜찮고, 안 계셔도 괜찮아요. 만약 하느님이 계시다면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을 그분이 도와주실 거잖아요. 그러니 내가 지금 바른 길로 가면 되지, 하느님을 믿고 안 믿는 게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그러니 질문자의 마음에 윤회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사람이 하느님이 확실히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그냥 사셔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잘못된 게 아니니까요. ‘아! 그들은 그렇게 믿고 살았구나’, ‘아! 우리 부모님은 그렇게 믿고 사셨구나!’, ‘우리 스님은 그렇게 알고 지내시는구나!’ 하고 존중할 일이지 틀렸다고 얘기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네, 내용과 그릇을 구분하는 눈을 갖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물은 무슨 그릇에라도 담긴 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그릇에 담아 놓으면 시간이 흐른 후 ‘그릇 때문에 이렇다’ 하면서 또 문제가 생기겠죠. 내용물이 더 중요하고 그릇은 단지 포장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용물에는 관심이 없고 포장을 갖고 서로 싸우다 보면 포장이 불교가 되어버려요.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늘 경계하라고 ‘자등명 법등명’을 얘기하신 겁니다. 그런데 아무리 경계하라고 얘기해도 잘 안 되는 게 현실입니다. 인간은 결국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손으로 만지고, 자기 생각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있느니, 없느니, 맞느니, 틀리느니’ 하고 서로 갈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안이비설신의, 여섯 가지 경계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릇을 갖고 논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을 지은 겁니다. 그런데 ‘상을 짓지 마라’ 하고 말하면 중생은 또 ‘상을 짓지 마라’ 하는 상을 짓거든요.

가령 ‘알맹이만 보지, 껍데기는 보지 마라’ 하고 말하면 중생은 ‘껍데기는 필요 없다’ 하고 상을 짓습니다. 그런데 알맹이를 담으려면 껍데기가 있어야 담기는 거예요. 그릇이 있어야 내용물이 담깁니다. ‘손에 담았다’라고 해도 손이 그릇이잖아요. 그러니 ‘손가락 끝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 하는 것처럼 그 내용물을 봐야지 그릇에 너무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윤회에 대한 이야기도 모두 그릇에 속하는 거예요. 그릇은 각 나라마다 서로 다릅니다. 그래서 앞으로 서양에 불교가 전해진다면 서양 그릇에 불교가 담길 거예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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