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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아서 괴로워요, 어떡하죠?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1.29|조회수13 목록 댓글 0


“불교대학 수업을 들으면서 내 마음이 시끄럽고 번잡한 것은 다 내 마음이 지어낸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은 여전히 시끄러울 때가 많습니다. 수업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나누기 시간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고 말씀해 주시는 도반님들이 있습니다. 표정이 환해지는 도반님들을 보면서 기쁘고 행복한 마음이 드는 한편 조급한 마음이 일어납니다. 나는 왜 알면서도 마음을 비워내지 못하나 싶어 자괴감과 자책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요. 이렇게 아는 것과는 별개로 마음이 따로 놀아 괴로울 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인간의 정신은 한 가지 작용만 있는 게 아니에요. 보고 아는 인지작용, 그때그때 좋음과 싫음 등 어떠한 느낌이 일어나는 작용, 과거를 기억하고 생각하는 작용, 하고 싶다거나 하기 싫다거나 해야 한다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등의 의지 작용이 있어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는 작용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이러한 감각을 통해 받아들인 것을 종합하고 생각하는 작용을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옛날 사람들은 그 존재를 미처 몰랐지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 감정이나 느낌은 무의식에 영향을 직접 받고 있어요. 이처럼 자세히 살펴보면 정신 작용의 역할이 층층이 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어요.

우리가 ‘의식’이라고 말할 때는 보통은 ‘생각’을 가리킵니다. 생각은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해서 ‘생각은 머리에 있다’라고 표현합니다. 마음은 의식 아래 잠재된 무의식적 작용이다 보니 ‘심장에 있다’라고 표현하지만, 실제로 그 작용이 심장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쉽게 말하면 대뇌피질에서 일어나는 작용이 의식이고, 무의식은 그 아래에서 작용해요. 그리고 마음은 무의식의 영향을 받고, 생각은 의식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이 많다’ 이런 말은 쓰지만 ‘마음이 많다’ 이런 말은 안 쓰잖아요. ‘마음이 괴롭다’ 이런 말은 쓰지만 ‘아이고, 요새는 생각이 괴로워 죽겠어’ 이렇게 표현하지는 않습니다. 생각과 마음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단정 지어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통상적으로 그렇게 용어를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로 느낌과 감정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마음’이라고 하고, 이성적이고 사유적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이라는 말을 쓴다는 거예요.

우리가 사실을 잘 모른다고 할 경우 이것은 의식의 문제예요. 이건 배우고 수정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작용은 찰나, 즉 그 순간에 딱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배우고 수정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오랫동안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건강 관련 강의를 듣다가 술과 담배가 몸에 안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위와 폐 사진도 보고 설명도 들으니까 이해가 잘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 술은 안 마셔야겠구나. 담배도 이제 안 피워야지’ 이렇게 결심했어요. 몰랐던 것을 이제 알게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알게 되었다고 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이 한순간에 바뀌는 건 아닙니다. 습관은 그냥 남아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술을 보면 그냥 마시고 싶은 마음이 팍 일어나 버려요. 담배를 보면 피우고 싶은 마음이 팍 일어나 버립니다. 아는 것과 관계없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성적인 작용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충동은 즉각 일어나는 거예요. 이걸 인지하기 전에 순간적으로 바로 행동으로 따라 옮겨버리면 계(戒)를 어기게 돼요. 계를 어겼을 때는 참회를 해야 해요. ‘아이고, 내가 또 감정에 끄달렸구나. 업식에 끄달렸구나’ 이렇게 참회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탁 마음이 일어났을 때 바로 알아차리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먹고 싶어 하는구나. 지금 또 끌려가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면 제어가 됩니다. ‘먹으면 안 돼!’ 이렇게 제어하면 보통은 스트레스를 받게 돼요. 하고 싶은데 억지로 안 하는 것이니까요. 이것을 ‘참는다’라고 표현하죠. 참는 것은 순간의 충동을 따르는 것보다는 좋지만 참느라 스트레스를 받으면 괴롭잖아요.

그래서 참기 이전에 알아차릴 필요가 있습니다. 약간의 부정적인 느낌이 일어나거나 호의적인 느낌이 일어날 때 이걸 초기에 딱 알아차리면 그걸 제어하는 데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됩니다. 처음에는 알아도 잘 안 되지만, 자꾸 연습을 하면 조금씩 달라져요. 억지로 참아도 습(習)을 점점 줄여나갈 수는 있지만,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잖아요. 알아차리는 힘을 기르면 억지로 참지 않고도 제어하는 힘이 커집니다. 참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멈출 수 있기 때문에 제어를 할 때 스트레스를 덜 받게 돼요. 그렇기 때문에 ‘알아차려라’라고 하는 거예요.

알아차림에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마음 작용의 원리를 알아야 해요. 모르면 바꿀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안다고 다 되는 건 아니에요. 연습이 필요해요. 운전을 어떻게 하는지 설명을 다 듣고 알았다고 해서 운전을 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운전을 실제로 해보면, 아는 것과는 별개로 몸에 익히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연습이 필요합니다. 그 연습을 할 때 참고 억지로 하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스트레스를 아예 안 받을 수는 없어요. 그러나 알아차림이 조금씩 더 빨라지면 스트레스도 점점 없어집니다. 담배를 안 피우고 술을 안 마셔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돼요.

지금 질문자도 그런 과정에 있어요. 안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에요. 모른다면 아예 변화할 가능성이 없고 알면 변화할 가능성이 있지만, 안다고 변화하는 건 아닙니다. 백낙천과 도림선사 이야기를 해볼게요. 당나라 때 백낙천이라는 유명한 문장가이자 대학자가 살았어요. 세상에 모르는 게 없다고 할 정도로 아주 유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어떤 유명한 선사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봤더니 아무것도 갖지 않고 무소유로 살아가는 사람이어서 집조차 없이 나무 위에 살고 있었어요. 아마 날씨가 따뜻하니 가능한 일이었겠죠.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선사에게 백낙천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불교의 요점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뭐라고 할 수 있소?’

복잡하게 얘기하지 말고 한 마디로 요점을 말하라는 거였어요. 백낙천은 화엄경이며 법화경이며 온갖 불교 경전을 다 읽었습니다. 뭐든지 다 알고 있다는 자만심도 깔린 질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선사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온갖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을 행하라.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지요.’

이 답을 듣고 백낙천이 실소했습니다. 대학자가 듣기에는 얼마나 우스운 말이에요? 모든 악은 멈추고, 모든 선은 다 행하고, 스스로 그 마음을 깨끗이 하라는 건 모르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지 않소?’

그러자 선사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삼척동자도 다 아는 얘기지만 팔십 먹은 노인도 행하기는 어렵소.’

아는 것만 따지면 세 살짜리도 알 수 있지만, 그걸 실천하는 것은 여든 살 된 노인도 못 한다는 거예요. 백낙천은 지금까지 아는 것만 갖고 논한 거죠. 이 말에 백낙천이 자기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귀의했다는 고사(故事)가 있어요.

또 이런 수수께끼 들어봤어요?

‘이 세상에서 두 점 사이에 제일 먼 거리가 무엇인가?’

물어보면 우주 끝이다 뭐다 다양한 답이 나옵니다. 그런데 정답은 생각과 마음의 거리래요. 생각과 마음, 즉 머리와 심장 사이의 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멀다는 거죠. 이처럼 우리는 알긴 아는데 행하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해야 합니다. 지행합일(知行 合一)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런데 깨달음은 달라요. 지식은 깨달음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깨달음이란 체험으로 확연히 알아버리는 거예요. 확연히 알면 바로 행위가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깨쳤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각을 깨쳤다’라고 하지는 않잖아요. 내 마음에서 ‘이렇구나!’ 하고 깨쳐버렸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행위가 바로 따를 수밖에 없어요. 이걸 두고 ‘업장(業障)이 소멸됐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습관이 사라져 버렸다는 얘기예요. 사람이 죽을 고비를 한번 넘기면 이렇게 한순간에 변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옆에서 나쁘다고 말려도 본인은 그게 좋은 줄 알고 계속 깔짝거리다가, 한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 그 습에서 송두리째 벗어나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웃음)

질문자는 어떻게 할래요?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겨볼래요? 잘 안 되면 지옥에 한번 빠졌다 오든지 죽었다가 살아나 봐도 괜찮아요. 그래서 지금과 같은 생각을 자꾸 하면 재앙이 닥친다고 하는 거예요. 독약을 먹어보고서야 ‘이 약이 독약이구나’ 하고 알 필요는 없잖아요. 미리 알고 연습한 뒤에 체험하는 게 좋겠죠.”

“스님 말씀 듣고 앞으로도 계속 수행자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항상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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