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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3.05|조회수10 목록 댓글 0

욕망을 억압하지도 않고, 따라가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죠?

욕망을 따라가서 즐거움을 느끼는 끝까지 가봤지만 거기에는 평화와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것처럼 욕망을 억압하고 억제하고 싸우는 것도 끝까지 가봤지만 거기에는 평화나 평안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돌아보니, 어릴 때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염부수 아래에서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죽어야 할까? 함께 사는 길은 없을까?’ 하고 사색했던 그때보다도 명상이 깊지 못하고 마음이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골똘히 탐구하는 자세였지 이를 악다물고 싸우는 자세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고통을 이겨내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온통 긴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깨달음이 이루어지지 않자 고타마는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출가하기 전에는 욕망을 따라갔는데 고뇌가 사라지지 않았고, 출가 후에는 욕망을 억제했는데 역시 고뇌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정반대의 길인데, 다시 살펴보니 또한 같은 길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같은 길일까요? 욕망이나 욕구에 대응하는 방식은 정반대였지만, ‘대응한다’ 하는 점에서는 똑같았습니다. 누가 나를 잡아당기면 거기에 끌려가거나,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저항을 하게 되는데, 대응 방식은 정반대이지만 바깥 경계에 반응한다는 면에서는 같습니다.

‘아, 내가 욕망에 반응하고 있구나’

이렇게 자기 수행을 살펴보고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에 반응하지 말자’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당연히 대응할 것이 없지만, 욕망이 일어나더라도 욕망을 욕망인 줄 알 뿐 그걸 따라가거나 억제하지 않는 겁니다. 욕망을 따라가거나 저항하지 않고 모든 의도를 놓아버리는 거예요. 좋고 싫고 하는 마음이 일어나도, 그걸 ‘하겠다’ 하든지 ‘하지 않겠다’ 하든지, ‘하고 싶다’ 하든지 ‘하기 싫다’ 하든지, 이런 대응을 일절 하지 않고 그냥 ‘욕망이 일어나구나’ 하고 알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치 바람이 그물에 걸리지 않듯이 욕망이 일어나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으니까 욕망에 구애를 받지 않게 되는 거예요.

고타마는 이 새로운 길을 발견하자 욕망과 싸우는데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는 편안한 상태에 이르게 됐습니다. 편안한 상태에서 다만 그것을 그것으로 알아차릴 뿐이었습니다. 밖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끌려가지 않고 그런 줄 알 뿐이고, 자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에도 끌려가지 않고 그냥 그런 줄 알 뿐이었습니다.

육체에 집착해서 육체의 요구에 끌려갈 필요도 없고, 또 육신을 특별히 학대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육신은 성스러운 것도 아니고, 부정한 것도 아니고, 그냥 육신일 뿐입니다. 육신은 숨을 쉬고 먹어야 살 뿐입니다. 육신을 잘 먹이려고 할 필요도 없고, 굶기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일부러 숨을 막고 죽을 필요도 없고, 일부러 숨을 과도하게 쉴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쉬어지는 대로 있으면 됩니다. 그렇게 되니까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편안해지려고 애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무런 의도를 하지 않으니까 저절로 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고타마는 고행림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옷을 입어야 했기에 시신을 덮은 천을 하나 걷어서 자기 몸을 가렸습니다. 고행림을 나오니 앞에 강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더운물이나 찬물을 구한 것도 아니고, 향수를 찾은 것도 아니고, 마치 소나 개나 닭이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가듯이 그냥 물에 들어갔을 뿐입니다.

고타마는 너무나 오랫동안 굶었기 때문에 현기증이 나서 쓰러졌습니다. 물결에 떠내려가다가 강기슭에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잡고 강기슭으로 기어올랐습니다. 그때 강가에는 소들이 와서 물을 먹고 있었고, 주변 마을의 한 소녀가 소젖을 짜러 강가에 나왔다가 쓰러진 수행자를 발견했습니다. 소녀는 집에 가서 우유에 쌀을 갈아서 넣고 유미죽을 끓여 와서 쓰러진 수행자에게 주었습니다. 고타마는 이 유미죽을 먹고 차츰 건강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이것을 ‘먹어야 된다’ 하거나 ‘먹지 말아야 된다’ 하지 않았고, 그냥 음식이 주어지니 먹었습니다.

건강을 회복한 고타마는 강 건너편 보리수 아래에 가서 마지막 정진을 했습니다. 그는 편안한 상태에서 선정에 들었습니다. 어떤 긴장이나 각오, 결심도 없이 편안하고 한가한 상태에서 오직 알아차릴 뿐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다만 알아차릴 뿐이었습니다. 일어나면 일어나는 줄 알고, 머무르면 머무르는 줄 알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줄 알 뿐이었습니다. 가려움증이 일어난다고 긁지 않고, 또 가려움증이 사라지면 ‘사라졌구나’ 하고 알 뿐이었습니다. 긁지 않으니까 밖에서 보면 욕망을 참는 것 같았지만, 안으로 보면 아무런 참을 것이 없었습니다. 참을 것이 없으니까 긴장할 것도 없고 애쓸 것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편안한 상태에서 뚜렷한 알아차림이 유지됐습니다. 어떤 긴장도 없으니까 마음 깊이 무의식 세계에 존재하던 모든 욕망이 일어났습니다.

‘아, 과거에 이런 것이 있었구나. 내 속에 이런 것이 있었구나. 이런 마음이 일어나는구나.’

과거로부터 쌓였던 모든 습이 욕망이 되어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걸 부정하거나 긍정하지도 않고, 따라가거나 억압하지도 않고, 그냥 물이 증발하고 연기가 피어오르듯이,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릴 뿐이었습니다. 좋다든지, 싫다든지, 옳다든지, 그르다든지, 멈춰야 되겠다든지, 가야 된다든지, 아무런 의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뚜렷한 가운데 다생의 업장이 녹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습성이 올라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습니다. 점점 마음이 맑아지고 밝아졌습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직전 세 가지 유혹

이런 과정에서 마음속 아주 밑뿌리에 있는 세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고행을 했을 때는 각오와 결심을 통해 모든 욕망을 제어한 것 같았는데, 긴장을 풀어버리니까 아직도 욕망의 뿌리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 세 가지가 경전에는 ‘마왕의 유혹’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마왕의 세 딸이 유혹하는 장면입니다. 세 딸이 부르는 유혹의 노랫소리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좋은 봄날, 꽃이 피고 새가 우니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우리의 몸을 보소서. 얼마나 젊고 아름답습니까? 당신도 젊은데, 수행은 늙어서 하고, 아름다운 이때를 같이 즐기소서. 당신이 이런 젊음을 즐기지 않고 혼자 숲 속에서 수행하다가 죽어버리면, 그게 이 세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마음의 뿌리 속에 있는 욕구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고타마는 그 욕망을 따를 때 일시적인 기쁨이 오지만 그 본질은 곧 괴로움(苦)이라는 사실을 직시했습니다. 락(樂)의 과보는 고(苦)라는 것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욕망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욕망을 따라서 일어나는 즐거움이라는 것이 곧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여기 맛있는 음식이 있는데, 거기에 독이 들어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독이 든 것을 알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걸 먹을 리가 없죠. 그 내용을 경전에서는 ‘부처님께서 아름다운 여인을 손으로 가리키니 노파로 변했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름다운 마왕의 세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 담은 것과 같구나’

채색된 항아리는 락(樂)을 상징합니다. 똥은 고(苦)를 상징됩니다. 이 말은 부처님이 락(樂)이 고(苦) 임을 알고 어떠한 욕망에도 흔들림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욕망을 참는 것이 아니라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

두 번째는 분노를 극복하는 장면입니다. 경전에는 마왕의 군대가 공격을 했다고 나옵니다. 마왕의 자식들이 군대를 끌고 공격했다는 것은 생존의 위협을 뜻합니다.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 우리의 마음에서 분노가 일어나잖아요. 그러나 고타마는 아무런 분노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비심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화살이 붓다의 몸 가까이 오자 꽃으로 변해 떨어졌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분노가 사라졌다는 뜻이죠. 붓다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구나’ 할 뿐이었습니다.

세 번째는 마왕이 부처님에게 ‘네가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이룰 수 있는 자재천왕(自在天王)의 자리를 주겠다’ 하고 제안하는 장면입니다. 마왕은 자재천왕의 자리를 내어주어서라도 이 욕계의 질서를 지키려고 했던 겁니다. 그런데 고타마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바가 없다’

자재천왕의 자리도 필요가 없다는 얘기죠. 그러자 마왕이 말했습니다.

‘너는 열반을 증득하겠다고 하는데, 열반이라는 것은 말만 있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추구하다가 죽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오히려 나에게 의지해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

당시 인도 사회에서 천하를 통일하는 전륜성왕이 된다는 것은 세속에서 최고의 꿈이었습니다. 이 제안은 태자 시절의 싯다르타에게는 하나의 이상이고 꿈일 수 있었겠지만, 수행자가 된 고타마에게는 아무런 의미 부여가 되지 않았습니다. 고마타는 이제 모든 유혹을 뛰어넘고 깨달음의 길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습니다.


고타마는 출가 후 최선을 다해서 정진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다고 결과도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죠.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고타마는 당시 사람들이 가르쳐준 방법으로 최선을 다해서 갔는데도 깨달음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게을러서 못 간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서 갔는데도 목표점에 이르지 못하자, 혹시 길을 잘못 들었는지 점검했습니다. 안 된다고 좌절하거나 회의에 빠진 것이 아니라, 자기를 다시 되돌아봤습니다. 그리고 잘못된 길을 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쾌락의 길도 아니고, 고행의 길도 아니고, 두 길을 떠난 제3의 길인 중도(中道)를 발견했습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새로운 길은 바로 ‘중도’입니다. 고타마는 중도의 길을 따라 깨달음에 이르는 마지막 정진에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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