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님의Q&A 게시판

부처님은 무엇을 깨닫고 자유로워졌을까요?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3.06|조회수12 목록 댓글 0

“세상 사람들은 욕망에 끌려가거나, 욕망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저항하거나, 두 가지 길을 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중도를 발견하시고, 욕망에 끌려가지도 않고 저항하지도 않고 욕망을 욕망인 줄 다만 알아차리는 정진을 했습니다. 욕망에 끌려가면 헐떡거려야 되고, 저항을 하면 이를 악 다물고 긴장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욕망을 욕망인 줄 다만 알아차릴 뿐이었습니다. 헐떡거리지도 않고 긴장하지도 않고 편안한 가운데 뚜렷이 깨어 있었습니다. 그러자 마음이 맑아지고 아무런 번뇌가 없어지면서 아주 밝은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깨달음의 눈으로 주위를 보니까 이슬 한 방울, 나뭇잎 하나, 발에 밟히는 모래알 하나까지, 이 세상에는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 고귀함을 마음껏 느꼈습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닫고 자유로워졌을까요?

첫째, 보이지 않던 것이 환히 보였습니다. 이것을 갖고 ‘눈을 떴다’, ‘깨달았다’ 하고 표현합니다. 깨달은 자를 인도 말로는 ‘붓다’라고 불렀습니다. 깨달으면 번뇌가 없어지는데 이것을 ‘해탈’과 ‘열반’이라고 해요.

그동안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독립된 각 개체의 집합으로 이해했습니다. 이것을 ‘삼라만상’이라고 하죠. 그런데 부처님이 깨닫고 보니 이 세상은 개별적 존재의 집합이 아니고 서로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마치 다섯 개의 손가락이 각각 다섯 개가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손바닥에서 서로 연결된 다섯 손가락인 것처럼 모든 존재가 연관되어 있었습니다.

이 세상은 고체로 연관된 것도 있고, 액체나 기체로 연관된 것도 있고, 파동과 빛으로 연관된 것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뭇가지를 베어도 나무가 죽고, 물을 공급하지 않아도 나무가 죽고, 햇볕을 차단해도 나무가 죽고, 공기를 차단해도 나무가 죽습니다. 연관이 끊어지면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개별적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서로 경쟁을 하고, 투쟁을 하고, 이기고 지고, 귀하고 천하고, 이런 것을 따지게 됩니다. 하지만 서로 연관된 존재라는 관점에서는 서로 협력하고 상생을 하게 됩니다. 이기고 지는 게 아니고 조화와 균형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어떤 것이 더 낫고 못한 게 아닙니다. 서로 다를 뿐이지 모두가 소중하고 평등합니다. 깨달음을 얻은 붓다의 길은 불평등한 세상에서 평등의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개체의 집합이라고 하는 세계관을 갖게 되면 양육 강식, 생존 경쟁, 이런 식의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연기적 세계관을 갖게 되면 서로 다른 것은 존중받아야 할 일이 되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상생의 관계를 지향하게 됩니다.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전자는 전쟁을 일으켜야 되거나 이기고 져야 되는 세상이라면, 후자는 화해와 평화가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는 세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는 스스로 편안하고 행복했을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이기고 지는 관계로 보지 않았습니다. 붓다는 ‘싸우고 투쟁하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논쟁도 하지 마라’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거니까 '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구나' 하고 받아들이면 되지 그것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논쟁하지 말라는 겁니다. 계율을 지키는 것은 소중하지만 그 계율을 갖고 분쟁을 한다면 그것은 더 큰 잘못이라고 하셨습니다. 깨달음을 얻고 나서 부처님은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노라' 이렇게 당당하게 일성을 내지르고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간 사람들이 함께 수행했던 다섯 친구들입니다. 그러나 다섯 친구들은 처음에는 부처님을 외면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나와 같이 지낸 지난 6년 동안 내가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한 적이 있습니까?’

다섯 친구들이 생각해 보니 부처님은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신이 얻었다는 그 귀한 법을 우리에게 말해주겠소?’ 이렇게 다섯 친구들이 법을 청하자 부처님은 그들에게 법을 설했습니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고 처음으로 설법한 내용

초저녁에 명상을 하고, 중야에는 명상을 풀고 편안히 앉아 있다가, 후야에 법을 설했습니다. 마음이 들떠있고 혼란된 상태에서 법을 설한 게 아니에요. 아주 고요하고 편안한 상태, 즉 어떤 생각에 사로잡힘이 없는 상태, 그런 상태에 먼저 도달하게 한 후 법을 설했습니다.


가장 먼저 설법한 내용은 중도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행자가 가지 말아야 할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 욕망을 따라가는 쾌락의 길입니다. 둘째, 욕망과 싸우거나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의 길입니다. 두 가지 길을 버리고 다만 알아차릴 뿐인 중도의 길을 가야 한다고 설했습니다.

그리고 ‘고집멸도’라고 하는 사성제를 설했습니다. 먼저 우리의 삶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직시해야 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윤회합니다. 즐거움이 곧 괴로움이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즐거움도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고성제입니다. 그 괴로움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습니다. 그 원인을 규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집성제입니다. 그 원인을 제거하면 괴로움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멸성제입니다. 괴로움이 사라졌다 하더라도 다시 또 괴로움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괴로움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늘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도성제입니다.

마지막으로 괴로움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여덟 가지 길인 팔정도를 설했습니다. 첫째,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보고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정견). 둘째, 바르게 생각해야 합니다(정사). 셋째, 바르게 말해야 합니다(정어). 넷째,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정업). 다섯째, 바르게 생활해야 합니다(정명). 여섯째, 바르게 정진해야 합니다(정정진). 일곱째, 바르게 알아차려야 합니다.(정념). 여덟째, 바르게 집중을 해야 합니다(정정). 그러면 번뇌가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여덟 가지 바른 길인 팔정도라고 합니다. 이렇게 첫 번째 설법에서 중도, 사성제, 팔정도가 설해졌습니다. 중도, 팔정도, 사성제의 근본 원리는 바로 연기법에 있습니다. 붓다는 연기법에 대해 이렇게 설했습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이것이 생겨나므로 저것이 생겨나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이렇게 첫 설법을 듣고 다섯 친구 중에 콘다냐가 가장 먼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때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기뻐했습니다. 나만 되는 게 아니라 누구나 다 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삼일이 지나자 두 명이 깨닫고, 또 삼일이 지나자 또 두 명이 깨닫고, 그래서 일주일 만에 다섯 명의 친구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고 붓다에게 감사를 표했습니다.


인류가 지구상에 출연하고 나서 가장 큰 사건

이렇게 해서 스스로 깨달은 이 붓다, 깨닫지 못한 이를 깨닫게 해주는 붓다의 가르침, 그 가르침을 듣고 깨달은 상가, 세 가지 보배가 구성이 됐습니다. 이것을 불법승 삼보라고 합니다. 불법승 삼보가 구성이 되자 이제 모든 사람들이 희망을 갖게 됐습니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그 가르침을 따라 수행정진하면 누구나 붓다처럼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위에 관계없이, 돈에 관계없이, 신분에 관계없이, 성별에 관계없이, 신체장애 유무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겁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이 지구상에 출연하고 나서 가장 큰 사건입니다.


오늘은 부처님의 깨달음과 전법을 생각하면서 우리도 부처님처럼 스스로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 다른 사람도 행복할 수 있도록 이 좋은 법을 널리 전할 것을 다짐해 보면 좋겠습니다. 이번 봄에는 많은 사람들이 정토불교대학에 입학해서 그들 또한 행복한 인생의 길을 가도록 인도합시다. 2차 만일결사를 시작하는 3월 19일, 더 많은 사람들이 입재해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는 길을 가도록 인연을 맺어줍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