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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의 관점으로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3.25|조회수6 목록 댓글 0

“나무를 옮겨 심어도 적응하는데 3년은 걸립니다. 작년에 저도 산에 나무를 심을 때 거름이 되라고 구덩이에 낙엽을 많이 집어넣고 심었어요. 그런데 대다수가 죽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무를 심을 때는 뿌리가 흙과 접촉이 되어야 수분이 공급될 수 있거든요. 뿌리를 내린 다음에 거름을 줘야 하는데, 그냥 구덩이를 파고 주위에 낙엽이 많다고 해서 집어넣었더니 안에 공기가 차서 뿌리와 흙이 접촉이 잘 안 되었어요. 비라도 많이 왔으면 괜찮았을 텐데 작년 봄에 많이 가물었기 때문에 대다수가 죽게 된 거예요.

인연을 따라 시의적절하게

이처럼 열심히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이치에 맞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올해는 거름을 메고 산에 올라갔는데도, 먼저 땅을 파고 물을 부은 다음 뿌리와 흙이 밀착되게 하고 공기가 차지 않도록 잘 다진 후 거름을 안 넣었습니다. 뿌리가 내리면 그다음에 거름을 주기로 했습니다. 늘 과수를 심는 사람에게는 이런 방식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처음 해보는 사람들은 그저 거름을 주기만 하면 좋은 줄로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 누가 이렇게 하면 좋다고 말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게 아니에요. 그 행위가 필요한 시점에 딱 맞을 때 그 행위를 해야 좋은 일이지, 거름이나 물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항상 인연을 따라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인 중도(中道)입니다. ‘적절하다’,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다’ 하는 것이 중도입니다. 여러분들이 불교대학을 진행할 때 과잉친절을 해도 학생들이 부담을 느끼고, 그렇다고 친절하지 않게 해도 수업 분위기가 냉랭해집니다. 연락을 너무 많이 하면 간섭으로 느끼고, 그렇다고 너무 안 하면 외면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이냐’ 이러는데, 중도라는 것은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해보면서 거기에 맞추는 것입니다. 적절함을 찾는 과정에는 늘 시행착오가 생깁니다. 함부로 했기 때문에 시행착오가 생긴 게 아니라 아무리 계획을 세우고 잘 맞춰서 해도 딱 맞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약간 밀었다가, 약간 당겼다가 이렇게 적절하게 조절하면서 상대의 근기, 상황, 조건을 맞춰 가는 거예요. 그러면 100퍼센트 정확하게 할 수는 없지만 비교적 100퍼센트에 가깝도록 근접해 나갈 수는 있습니다.

연습을 통해서 조금씩 앞으로

여러분도 새로 맡은 일에 부담을 갖지 말고,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면서 조절해 나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목표를 향해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는 것을 연습이라고 합니다. 수행이란 연습을 통해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일을 하면, 실수를 해도 자책하지 않게 되고, 잘했을 때도 이것이 꼭 내가 잘해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들뜨지도 않게 됩니다. 실수를 해도 자책하지 말고 ‘조금 과했구나’, ‘조금 부족했구나’, ‘이런 것을 고려하지 않았구나’ 하면서 다음에 할 때는 다시 조정을 해나가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욕심을 내기 때문에 조금 잘되면 들뜨게 되고, 조금 안되면 좌절하거나 자책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늘 고락을 오르내리는 윤회(輪廻)를 하게 돼요. 새 봄을 맞이해서 그런 관점을 갖고 수행을 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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