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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남편과 의견이 맞는 부분이 하나도 없습니다, 어떡하죠?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4.01|조회수22 목록 댓글 0


“한반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나의 평화가 우선 되어야 한다는 스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나의 평화는 가정의 평화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내 인생의 로또 복권입니다. 하나도 의견이 맞는 부분이 없습니다. 생각이 다르면 각자의 생각을 인정하든지, 차라리 무관심하면 겉으로라도 평화롭겠지요. 그런데 남편은 자기랑 의견이 다른 일은 아예 못하게 합니다. 저는 가정의 평화를 위해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선거 때가 되면 우리 집은 그야말로 양극화의 절정입니다. 선거가 끝나도 마찬가지이고요. 통일의병이라고 이름만 받았지 활동은 거의 못했습니다. 이렇게 위장된 평화가 불편합니다. 즐겁게 평화운동을 하고 싶어요. 사회적 평화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 싶고, 남편과의 위장 평화에서 벗어나 진짜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저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해야 할까요?”

“마음속에 불만이 많으면 나중에 감정이 폭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 많이 쌓인 사람이 순간적으로 폭언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기가 쉽습니다. 옛날에는 가장 힘이 약한 사람이 여성과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이런 말도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화를 참고 참으면 엄청난 폭발력을 갖게 되어 나중에는 눈에 뵈는 게 없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민중들은 늘 참았기 때문에 어떤 사건을 통해서 폭발을 했는데, 그것이 폭동입니다. 그런데 그런 폭발은 민중의 한을 분출하는 것은 되었지만 새로운 나라를 만들거나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폭발은 지배자가 폭력적으로 민중을 탄압하는 행위를 합리화시켜주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반면에 3.1운동을 일으킨 우리 선조들은 총칼을 든 일본군에게 평화적으로 항거를 했고, 인도에서는 간디가 비폭력 평화운동을 일으켜서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간디의 비폭력 평화운동은 적군인 영국 사람들까지도 감동하게 해서 20세기의 비폭력 혁명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화가 나야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죽든지 살든지 분노하고 싸워야 사회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데, 항상 거기에는 폭력이 수반되고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동반됩니다. 그 결과 우리 사회 안에는 ‘내 편이 아니면 상대는 다 틀렸다’ 하고 생각하는 양극단이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태극기 부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상대가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말하면 무조건 빨갱이라고 치부하고, 북한과 대화만 해도 나라를 팔아먹는 사람 취급을 하죠. 반대로 진보 진영의 극단주의자들 역시 자신의 생각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하면 자기들끼리도 인정사정없이 서로를 공격합니다. 이런 현상은 모두 분노가 잠재되어 있어서 생기는 문제들입니다.이런 분노를 가지고 운동을 하면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힘이 나오는데 지속성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약간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서 다수의 지지를 받기가 어려워집니다. 하지만 대중성은 떨어지는 반면 이런 사람들은 어떤 난관을 극복한 데는 굉장히 큰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탄압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이런 폭발적인 힘이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는 그런 혁명을 해야 할 때가 아니라 혁신을 해야 할 때입니다. 원자폭탄은 엄청난 폭발성을 갖고 있어서 대량살상무기이지만 그 양을 조절해서 조금씩 반응이 일어나도록 하는 원자력 발전은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고 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내면의 평화를 유지하면서 운동을 해야 꾸준히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수 있어요. 확 한 번 일어났다 조금 있으면 푹 죽어 있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꾸준히 이 운동을 해나가려면 내면의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운동을 해야 합니다. 내면의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현 정부에 대해서도 이렇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저런 방식은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람 중에는 저런 방식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방식에 동의할 수 없으므로 반대 의사를 표현하겠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분노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보통은 마음의 평화가 유지되면 ‘나만 좋으면 됐지, 상관없다’ 하고 세상일에 관여를 안 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아닙니다. 주인된 삶의 자세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나의 주관은 있는 것을 뜻합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면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 돈을 내고 시간을 내고 글을 쓰고 온갖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이 감정이 폭발할 정도로 증오심이 생기면 돈도 내고 행동도 하고 악을 쓰고 활동을 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힘들어 하지요. 금방 해결이 안 되면 중간에 그만두거나 절망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에 마음의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고 하면 이번에는 아예 행동 자체를 할 동력을 잃어버리는 쪽으로 갑니다.


이런 양극단을 중도적으로 통합을 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되 세상의 평화, 평등, 정의를 위해서는 분노를 가진 사람보다 더 큰 힘으로 꾸준히 일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분노를 가진 사람은 토끼와 같아요. 급하게 뛰어올랐다가 자지러졌다 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하지만 중도적인 관점을 갖고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는 사람은 거북이처럼 꾸준히 해 나가서 자신과 세상을 평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세상도 변화시킵니다.

3.1 운동은 그 당시 순간만 보면 실패했죠. 총칼 앞에서 민중들의 저항이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3.1운동이 없었다면 우리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어떻게 되었겠어요? 그 당시에는 실패한 운동으로 보였지만 백년이 지난 지금 다시 돌아보면 3.1운동은 성공한 운동입니다. 3.1독립선언서를 읽어보면 일본을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는 내용도 당당하게 적혀 있잖아요. 지금 읽어도 가슴에 다가올 만큼 백년을 내다보고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운동이야말로 역사를 발전시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질문자도 남편에 대해 서로 생각이 다름을 인정해 주어야 해요. ‘저 사람하고는 대화도 안 되니 말 해봐야 소용없다’ 이것은 이미 내가 단정하고 있는 거예요. 먼저 남편의 생각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싸울 필요도 없지만 내 관점을 숨길 필요도 없고 내 관점을 버릴 필요도 없어요. 나는 나대로 주관을 갖고 살면 됩니다. 그에 대해 남편이 비난을 하면 그냥 웃고 넘기면 되는 거예요. 설령 남편이 화가 나서 내 뺨을 한 대 때린다 하더라도 웃으면서 ‘저는 이렇게 가겠습니다’ 하고 내 갈 길을 가면 됩니다. 내가 남편의 노예가 아니잖아요, 내 인생의 주인은 바로 나입니다. 내가 상대를 부정하면서 나만 옳다고 했을 때 문제가 되지 상대를 존중하면서 나의 길을 가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어요. 만약 가정의 평화라는 미명하에 참고 산다면 그것은 스스로 노예의 생활을 자처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출가를 했는데 부모님이 저를 찾아와서 ‘절에서 안 나오면 나는 약 먹고 죽겠다’ 하고 협박을 한다고 합시다. 이때 만약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제가 절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자신의 선택을 포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부모님의 재산을 빼앗거나 생명을 해치고자 출가를 결심한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무 살이 넘은 성인이 자기 갈 길을 가는데, 부모님이 그 모습이 마음에 안 들어서 죽는다면 저는 그걸 수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내가 부모를 해친 게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거죠. 이 정도로 관점이 분명해야 통일의병으로서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소비를 줄이는 운동을 한다고 합시다. 그런데 같이 사는 사람이 그걸 가지고 시비를 한다면 그냥 웃어넘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고기를 안 먹으니까 상대방도 먹지 말라고 하는 건 문제가 있지만, 상대방이 고기를 먹는 것은 문제 삼지 않고 나는 안 먹겠다는 것은 그 누구도 막을 명분이 없습니다. 물론 같이 사는데 불편하겠지만, 개개인 마다 생각이나 신념, 가치관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자유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를 때 각자의 생각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편의 마음도 인정해 줄 수 있어야 진정으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상대방의 관점을 인정하되 나는 내 길을 가겠다고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이혼을 하자고 하면 이혼을 할 수도 있죠. 그렇게까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에 걸림이 있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경제적인 손실이라든지 이혼을 해서 생길 수 있는 손해를 생각하면 이혼을 못 하죠. 두려움이 있으면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죽는 게 두려우면 어떻게 독립운동을 합니까? 이 길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되면 아무리 손실이 크더라도 감수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마음의 평화도 오고 행동의 자유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아무리 바른 길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독선적으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너무 적대적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긴 역사를 보면 지금 나쁜 것이 나중에 좋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재 상황이 좋은지 나쁜지 판단하지 않고 ‘인생지사 새옹지마’ 이런 식으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현재 상황에서 여러분들이 옳다고 판단한 것을 행동하는 실천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니까 나만 옳다고 고집하는 것을 자제할 필요가 있어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도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내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서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사회 분열이 너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좋은 일을 하자고 시작해놓고 결국은 나까지도 사회를 분열시키는데 일조한 셈이 되는 거예요.”

“너무 잘 들었습니다. 계속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었습니다. 방금 마무리로 해주신 말씀이 지금 저의 소감과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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