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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도둑이라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6.24|조회수17 목록 댓글 0


“저는 얼마 전 도둑이라고 누명을 쓰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황당한 일도 다 있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다음날 억울한 마음이 많이 올라왔고 일상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다음날에는 증거도 없이 소리만 지르던 상대가 환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이해하는 마음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음날에는 내가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 건지 억울한 마음이 예전보다 더 세게 올라왔습니다. ‘억울함을 당하는 것으로 수행하는 문으로 삼아라’ 하는 보왕삼매론의 의미를 잘 알아서 불편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으로 질문을 드립니다.”

“질문자는 지금 수행자의 관점을 놓치고 복을 구하는 기복 불교의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억울한 일은 더 이상 안 당했으면 좋겠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사고가 안 났으면 좋겠다.’ 이런 이야기는 세상 모든 사람이 바라는 것이 아닌가요?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부처님께 빌고, 하느님께 빌고, 굿도 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믿는 종교잖아요.


지금 누가 잘못을 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질문자가 지금 억울한 마음이 드는 이유는 ‘내 마음을 돌이켜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하는 수행의 관점을 놓치고 있기 때문이에요. 매일 아침마다 모든 괴로움은 나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빚어진다는 수행문을 읽으면서도 입으로만 외우고 관점을 놓치니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바로 기복적인 마음입니다. 누구나 다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세상을 살다 보면 가끔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부처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났고, 법륜 스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질문자라고 안 일어나겠어요? 수행은 그런 일이 일어나더라도 거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안 일어나게 하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억울한 일이 안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종교예요. 종교를 믿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도와 달라고 간절히 빌어야 하지만 수행자는 누군가에게 빌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오해해서 그런 일이 생겼을 수도 있고, 나를 모함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그런 일들이 가끔 생깁니다. 북한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을 때 저는 인도적 지원을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정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 북한을 돕느냐? 너는 빨갱이냐? 차라리 북한에 가서 살아라.’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해서 돕는 것인데 그런 비난을 들으면 억울하죠.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어떻게 합니까? 유튜브에 들어가 보면 ‘법륜 스님은 빨갱이다.’ 하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행위가 법을 어겼다면 법으로 처리하면 되겠죠. 그러나 그냥 자기 생각을 이야기한 것이라면 그런 사람도 세상에는 있을 수 있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물건이 없어졌고 그곳에 질문자만 있었으니까 ‘저 사람이 가져갔나?’ 하고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나는 안 그랬다.’ 하고 당당하게 말하면 될 일입니다. 오해가 지나쳐서 도둑으로 형사고발을 하면 법정에서 해명 하면 됩니다. 살다 보면 날씨가 추워서 덜덜 떨어야 할 때가 있고, 날씨가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릴 때가 있듯이, 조금은 불편을 겪어야 합니다. 이런 일은 누구나 종종 겪을 수 있는 일이에요. 도둑의 누명을 쓰는 일뿐 아니라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욕을 얻어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대응 하면 됩니다.

누구나 부당한 처우를 당했다면 내가 취할 수 있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됩니다. 상대가 고소를 했는데 재판 결과가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항소하면 됩니다. 재판이 대법원까지 가게 되더라도 그에 맞게 법적인 조치를 취하면 되지 억울한 마음을 가질 필요는 없다는 거예요. 수행자는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나 나에게 주어진 권리를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법적인 시스템이 나에게 불리하게 되어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내가 왕조시대에 태어났다면, 왕권에 저항하다 죽든지, 왕권을 받아들이고 살든지, 둘 중에 한 가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어요. 만약 내가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독재에 항거하다 죽든지, 독재를 받아들이고 당분간 그렇게 살든지, 둘 중에 한 가지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이 없을뿐더러 그걸 억울해한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에요.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 하는 말의 뜻은 자신이 가진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는데도 안 되는 것을 자꾸 생각하면 자신만 괴롭다는 의미입니다. 핵심은 원망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어떤 행위를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떤 상황에서도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는 거예요. 해탈과 열반이 수행의 목표입니다.

무엇을 해라, 무엇을 하지 마라, 이런 것이 핵심은 아니에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결혼을 해야 한다.’, ‘결혼하면 안 된다’, ‘이혼을 하면 안 된다.’, ‘결혼을 여러 번 하면 안 된다.’ 하는 정해진 법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 이런 윤리와 도덕을 내세우는 것이지 불교는 어떤 선택을 하든 괴롭지 않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혼자 살아도 괴롭지 않아야 하고, 결혼해서 살아도 괴롭지 않아야 합니다. 독재 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하면 감옥에 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잖아요. 그러니 만약 독재 시대에 민주화운동을 하다 감옥에 가게 되면 감옥에서 편안하게 있어야 합니다. 그걸 억울해한다면 이치를 모르는 겁니다.

상대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면 질문자가 사실을 밝히면 되는 거예요. 사실을 밝힐 수가 없고 다른 방도가 없다면 욕 좀 얻어먹고 배상을 좀 해주면 됩니다. 날씨가 춥든 덥든 비난을 받든 오해를 받든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집착이고 어리석음입니다.

‘앞으로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은 수행적 관점이 아니라 기복적 관점입니다. 수행이란 이번에는 내가 막 휘둘려서 괴로워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별일 아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다음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도 빙긋이 웃으면서 대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첫 번째 화살을 맞을지언정 두 번째 화살을 맞지 않는 것이 수행자입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잖아요. 한마디로 수행적 관점을 놓치고 있는 겁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하고 싶다면 정토회로 오지 말고 다른 종교를 찾아가서 기도 하세요.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잠깐 수행적 관점을 놓쳐서 화나고 짜증 나고 괴로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행은 금방 돌이켜서 평정심을 유지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평정심을 유지한 상태로 해야지 원망과 분노를 갖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독재 정권에 항거해서 민주화운동을 해도 괜찮고,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환경운동을 해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 분노를 갖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 자신이 괴롭습니다. 둘째, 폭력적으로 대응하기가 쉽습니다. 폭력은 또 다른 고통을 만듭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거예요. 붓다의 가르침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필요하면 그 일을 하되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정토회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합니까?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서 적게 소비하고 검소하게 살기 위한 다양한 환경 실천을 많이 하고 있잖아요.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도 많은 활동들을 합니다. 가난한 나라에 살고 있는 어려운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수많은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덧없다는 부처님의 말씀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세상을 외면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분노하거나, 큰일을 하지 못했다고 나를 학대하고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는 수행자가 아닙니다. 좋은 일도 욕심을 내면 괴로워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일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를 중심에 두고 생각하지만, 수행자는 ‘내가 괴로운가, 괴롭지 않은가?’ 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선택을 하든 내가 결정하고, 그 결정에 대해 괴로움이 없어야 합니다. 괴로운 이유는 내가 선택할 결정에 대해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인이 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아들었습니다.”

“정토회에 나오지 말고 다른 절에 가지 그래요? 왜냐하면 정토회는 질문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질문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저에게 그런 능력이 있으면 모든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죠. 전쟁도 일어나지 않게 하고, 가뭄이나 홍수, 산불도 일어나지 않게 하겠죠. 그런 능력이 있다면 더 큰 일을 하지 무엇 때문에 질문자가 욕을 얻어먹지 않도록 하는 그런 작은 일에 힘을 쓰겠어요?

수행자는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죠. 늘 상황에 휘둘리지만, 곧바로 알아차리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마다 수행문을 읽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입으로만 읽고 현실에서는 적용하지 않고 있는 거예요.”

“네, 제2의 화살을 다시는 맞지 않도록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 스님의 말씀이 화살이 되어 제 마음에 꽂혔습니다. 감사합니다.”

“수행이란 자기를 돌이켜 깨우쳐서 괴로움에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문자는 한순간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괴로움에 빠진 겁니다. 화가 날 수도 있고, 그래서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거나 욕심을 낼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돌이켜야 합니다. ‘아, 내가 놓쳤구나’, ‘그래서 내가 괴롭구나!’ 하고 수행자의 자세로 돌아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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