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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아무리 치료를 해도 술을 못 끊는 환자를 보면 회의감이 들어요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7.27|조회수10 목록 댓글 0


“환자들 중에 술을 마시는 환자들에 대한 고민이 많습니다. 음주를 많이 해서 피를 토하며 병원을 찾아오면 밤늦게라도 잘 치료해서 퇴원을 시킵니다. 치료하는 동안 병동에 있는 간호사들 역시 열심히 간호를 하는데 거기까지는 굉장히 보람 있고 좋아요. 환자들이 그렇게 한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면 의사의 말을 잘 들었으면 좋겠는데, 퇴원하고 나면 또 술을 마시고 피를 토하면서 다시 병원을 찾아옵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 제가 열심히 치료하는 일이 오히려 술을 마시게 도와주는 것이 아닌지 회의가 듭니다. 환자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제가 어떤 마음으로 환자를 돌봐야 할까요?”


“정말 어려운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성인의 지위에 올라야 합니다. (웃음)

이런 질문에 대해서 예수께서도 길을 열어주셨고, 불교에서도 ‘지장보살의 원’이라고 하는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처럼 되기 어렵고, 우리가 지장보살처럼 되기가 어렵죠. 그래서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장보살은 자기가 부처 되는 것도 포기하고 지옥에 가서 고통 받는 중생을 건져냅니다. 우리는 지옥에 갈 짓을 하고도 천당을 가고 싶어 하는데, 지장보살은 천당을 갈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지옥에 가서 온갖 고통을 겪으며 지옥 중생을 구제합니다. 그런데 구제한 중생이 조금 있다가 또다시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건져 놓으면 조금 있다가 또 떨어지는 일이 반복됩니다. 그런 일을 우리는 세 번 이상을 못 합니다. ‘에잇, 고통 좀 겪어라’ 하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그의 사정이고, 지옥 중생을 구제하는 것은 나의 일입니다. 이런 관점을 갖는 것이 지장보살의 원이에요. 그것처럼 환자가 술을 먹든 무엇을 하든 그것은 의사가 어떻게 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는 의료인으로서 그가 환자라면 치료를 해줘야 합니다. 물론 그가 병을 완치한 후 다시 술을 먹지 않으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 술을 먹고 병을 얻어 병원을 찾아 오더라도 ‘술을 먹지 말라고 몇 번이나 얘기했어요?’, ‘한 번만 더 오면 치료를 안 해줄 겁니다’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환자를 차별하는 행위입니다. ‘너는 얼굴이 검으니까 안 돼’, ‘너는 여자니까 안 돼’ 하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의료인은 그가 환자인지 아닌지 여부만 봐야지 그가 몇 번째 병원을 찾아왔느냐 하는 것은 논하지 않아야 해요. 스님도 즉문즉설을 하면 사람들이 묻기만 묻지, 실제로는 제 말대로 안 합니다. 열에 아홉은 안 해요. 질문하는 사람들이 내가 말한 대로 할 것이라고 기대하면 즉문즉설을 못 합니다. 몇 번 하다가 ‘어차피 이야기해줘 봐야 안 할 텐데 나도 안 해!’ 이렇게 되기가 쉬워요.

그래서 내가 말한 대로 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사정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가 답답해서 물으면 내 역할은 대답을 해주는 것입니다. 말해준 대로 실천하느냐는 다시 그 사람의 몫이 되고, 그가 괴로워서 다시 찾아왔을 때 대답해주는 것은 다시 내 몫이 됩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좋을 것 같아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시면서 자신을 죽인 자들에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셨어요. 자기를 죽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이 성경 구절을 읽고 대부분의 사람이 성인만이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다음 성경 구절을 보면 ’저들은 자신이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스스로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한 겁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형집행인, 즉 교도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밥만 먹고 하는 일이 판사가 사형을 판결하면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었습니다. 이틀이나 삼일이 지나면 죽은 사람을 내리고, 또 다음 사람을 십자가에 매답니다. 너무 오래 살아있으면 다음 사람을 매달 수 없으니까 빨리 죽으라고 창으로 찔러서 죽었나 안 죽었나 살펴보는 거죠. 그들은 자신의 직업이 그런 일을 하는 것이었던 겁니다. 내 생각만 하면 나를 죽인 사람이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그들은 그냥 사형집행인이에요. 그러니 본인이 잘못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일상의 업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예수님의 위대함은 그들의 입장과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기 지은 죄를 모르옵니다’라고 하신 거예요. 우리가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은 이런 마음을 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전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였습니까? 나쁜 일을 하면 벌을 주는 하느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이후의 하느님은 사랑의 하느님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고자 한다면 무차별적인 사랑의 자세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환자도 술을 안 먹으면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어요. 그러나 그 환자는 마음이 답답해서 술을 먹는 것이기 때문에 술을 먹는 것이 그 환자가 사는 길이에요. 술을 먹어서 건강이 나빠졌다는 관점으로만 볼 수 없습니다. 만약 술을 안 먹었으면 속이 터져 벌써 죽었을 것이라고 봐야 해요. 마음이 답답하니까 술을 먹는 길을 선택한 겁니다. 그 환자는 물리적 치료만이 아니라 정신과 치료도 받아야 합니다. 노숙자의 대부분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해서 답답한 마음을 풀어줘야 술을 안 먹게 되지, 답답한 마음이 있는 한은 술을 안 먹을 수가 없어요. 몸이 많이 아프면 ‘술을 안 먹어야지’ 하고 결심하는데, 막상 스트레스를 받으면 또 술을 먹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병원을 다시 찾아오면 ‘또 스트레스를 받았구나’ 하고 치료를 해주세요.


관점을 이렇게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 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런 환자를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내가 왜 이런 일을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을 자꾸 하게 되는데, 그러면 내가 힘들어져요. 그의 인생에는 간섭하지 마세요. 내가 할 일은 내가 가진 의술로 그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만큼 치료하는 거예요.

그 환자가 설령 죽게 된다고 할지라도 불쌍하게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환자가 죽었다고 너무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다 죽게 되어 있어요. 최선을 다해서 치료할 뿐이지, 죽으면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습니다. 아파서 오면 또 치료해주고, 나아서 잘 살면 다행이고, 술 먹고 또 오면 치료해주는 것 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법문 듣고 좋아졌다고 하면 다행이고, 제 말을 안 듣고 또 와서 물으면 또 대답해 주는 겁니다. 제 말을 안 듣고 괴로운 것도 그의 인생이지, 내가 일일이 따라다니며 그를 고쳐줄 수는 없어요.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서 할 뿐이라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네, 잘 알았습니다. 마음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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