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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면 깨달을 수 있나요?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7.29|조회수13 목록 댓글 0


“큰 스님들의 법문을 들어보면 간절하고 사무치게,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삼매에 들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요. 삼매에 든다는 것은 어떤 것이고,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은 어떻게 생겨나나요?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지’ 하는 순간 의도가 들어가서 그런지 명상도 잘 되지 않습니다. 저는 보통 바깥 경계에 부딪히게 되면 간절해지게 되는데요. 저는 근기가 낮아서 그런 걸까요?”

“수행으로서의 불교와 종교로서의 불교가 섞여 있어서 그렇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성취된다’ 하는 말은 종교로서의 불교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깨달음’이란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뜻합니다. 두 가지가 섞여서 ‘간절하게 기도하면 깨닫는다’ 하는 표현이 생긴 겁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면 소원이 실현된다거나 병이 낫는다고 믿는 것처럼 깨달음을 ‘얻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법문이 나오게 된 거예요. 반야심경에서는 깨달음은 얻는 대상이 아니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보리살타(菩提薩埵)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

이 문장은 지혜도 없고 또한 지혜를 얻을 것도 없으며, 얻을 것이 없는 까닭으로 보살은 반야 바라밀다에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돈을 벌고 출세하고 지위를 얻고 병이 낫고 건강해진다는 것처럼 깨달음도 열심히 해서 얻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얻지 못하면 괴로움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돈을 못 번 사람이나 출세하지 못한 사람이 한탄하듯이 수행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한탄을 하게 되는 거죠.

‘내가 30년을 수행했는데 아직도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수행으로서의 불교가 아닌 종교로서의 불교를 믿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깨달음을 얻는 대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못 깨달으면 한탄하는 마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러나 깨달음은 재물이나 자원처럼 얻는 대상이 아닙니다. 모든 욕망을 놓아 버리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모든 욕망을 놓아 버릴 때 괴로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됩니다. 죽기 살기로 노력해서 어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극기 훈련이지 수행이 아닙니다. 힘을 얻기 위해서는 훈련을 많이 해서 힘이 생기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행은 힘이 아닙니다. 수행은 편안함입니다. 수행은 모든 고뇌의 사라짐입니다. 질문자는 깨달음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전혀 다른 의미로 쓰고 있어요.

선불교에서는 세 가지가 합해져야 깨달음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첫째, 의심해야 합니다. ‘이게 뭐지?’, ‘왜 그렇지?’ 하는 의문이 있어야 합니다. 의문이 있으면 의문을 풀기 위해 간절해집니다. ‘왜 그렇지?’ 하고 의문을 품었다가 ‘그냥 그런 것이지’ 하고 마는 게 아니라 간절한 의심을 해야 합니다. ‘이 뭐꼬?’ 하고 골똘히 몰두해야 해요. 부처님은 새가 벌레를 쪼아 먹는 것을 보고 ‘왜 하나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하나가 죽어야 할까? 같이 사는 길은 없을까?’ 하고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누구한테 물어도 대답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서 탐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물어서 답을 얻으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끝나는데, 어떤 사람에게 물어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스스로 탐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럴 때 갖는 의문은 남을 믿지 못해서 생기는 의심이 아닙니다. 간절하게 ‘왜 그렇지?’ 하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대한 분심(憤心)을 가져야 합니다. 몰랐다는 것에 대해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내가 왜 이런 것도 몰랐을까?’ 하는 마음을 내는 것이 분심입니다. 예를 들어 ‘너는 누구냐?’ 하는 물음에 ‘내가 나지, 누구야?’ 이렇게 답하면 더 이상의 진전이 없고 그냥 끝이 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묻는 사람이 없어요. 그런데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계속 물어야 합니다.

‘너는 누구냐?’
‘법륜입니다.’
‘그건 너의 이름이지 않느냐? 너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을 때 대답이 법륜이지,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너는 누구냐?’
‘스님입니다.’
‘스님은 너의 직업이지.’

‘너는 누구냐?’
‘저는 엄마입니다.’
‘그건 가족 관계 속에 너의 위치이지.

이렇게 ‘네가 누구냐’라고 계속 탐구하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모르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정말로 나는 누구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세상의 온갖 것을 다 안다고 하더라도 자기가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우스운 상황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나를 모른다는 것에 대한 분심(憤心)이 일어나야 됩니다. 어떻게 해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살았느냐는 거예요. 화를 내는 분심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바보같이 살았다는 것에 대한 강력한 분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하는 탐구심이 더 간절해집니다.

셋째, 이렇게 정진을 하면 마침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는 믿음, 즉 신심(信心)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있어야 꾸준히 정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신심이 없으면 중간에 그만 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신심(信心), 의심(疑心), 분심(憤心) 이렇게 세 가지가 있어야 깨달음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뭐꼬?’, ‘나는 누구인가?’ 하는 화두에 몰두하려면 세 가지가 있어야 해요. 그런 의미에서 집중을 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은 맞습니다. 뭐든지 집중을 하면 어느 순간에 ‘아, 그거구나!’ 하고 깨달음이 생기면서 관념의 벽을 뚫고 나가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맥락에서 스님들이 간절함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간절하게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말처럼 간절하게 기도하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뜻으로 이해한다면 그건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간절하지 않습니다. 지금 나의 성격은 내가 원해서 이루어진 게 아니고, 어릴 때 자란 환경에 의해 형성된 측면이 큽니다. 여러분은 어릴 때 형성된 그 업식에 따라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습관적으로 되풀이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그 결과 여러분은 외부 자극에 의해 얼마든지 조정이 가능한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저 사람을 화나게 만들려면 어떤 자극을 주면 된다는 것이 정해져 있습니다. 저 사람을 유혹하려면 무엇을 제공하면 된다는 것이 정해져 있어요. 왜냐하면 어렸을 때 형성된 업식을 건드리면 그대로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빅테이터를 이용해서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나 소비 패턴을 분석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치로 사람을 조정하기 위해서입니다.

조정을 안 당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가진 업식 대로 반응하지 않아야 합니다. 밖에서 오는 자극에 대해 감정대로 움직이지 않아야 해요. 그래야 업식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상대가 나에게 욕하면 나도 욕하고, 상대가 나에게 화내면 나도 화내고, 상대가 울면 나도 따라 울고, 이렇게 반응하는 것은 거의 꼭두각시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상대가 나에게 욕을 해도 나는 웃을 수 있다면 나는 상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욕을 하는 것은 상대의 일이고 나는 웃는 거죠. 내가 울더라도 자동으로 우는 게 아니고 우는 게 좋겠다고 선택해서 우는 것은 괜찮아요. 화를 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극이 오면 자동반응을 하게 되거든요. 이것은 업식에 따라 습관적으로 대응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인생을 사는 겁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그런 인생을 살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남편의 자극에 영향을 받아서 꼭두각시처럼 반응을 했는데 이제는 남편이 좀 늦게 들어와도 ‘무슨 이유가 있어서 늦었나 보네’ 하고 넘어가게 됩니다.

예전에는 아이가 공부하지 않고 있으면 자동으로 잔소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을 하면 아이가 공부하지 않고 있더라도 ‘공부하기 싫은가 보구나’ 하고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어 잔소리가 나오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아이를 위해서예요? 나를 위해서예요?”

“나를 위해서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바깥 경계로부터 점점 자유로워집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해탈’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누가 나에게 자극을 줘도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거죠. 그렇다고 일절 반응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에요. 반응을 하더라도 자동으로 반응하지 않고 내가 선택해서 반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수행입니다.

우선 내가 꼭두각시놀음을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입력된 대로 움직이는 인공지능 로봇과 같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사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그대로 반응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남편도 내 안의 뭔가를 딱 하나 건드리면 순식간에 원수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그렇게 밖에 살지 못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분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유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탐구할 수가 있어요.

놓아버리는 것과 간절한 것은 정반대인 것 같은데 결국은 같습니다. 어떤 것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이 놓아버림입니다. 매미소리가 들리든지, 다리에 통증이 오든지, 머리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든지 놓아버리는 겁니다. 나는 오직 화두만 참구 합니다. 그 말은 다른 것에는 일절 반응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든 긴장을 풀고 놓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나 실제로 해보면 잘 안 됩니다. 나도 모르게 자꾸 반응을 하게 되는 거예요.

간절한 것과 놓아버린다는 것은 일맥상통합니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간절해지면 옆에서 누가 뭐라고 하든지 신경 쓰지 않게 됩니다. 오직 그 문제에 몰두해 있기 때문에 다른 것들은 놓아버리게 되는 거죠. 정반대의 방법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같은 효과를 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위파사나에서는 놓아버리는 방법으로 수행하고, 선에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탐구하는 방법으로 수행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상태에 이른다는 목표는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라는 용어는 일반적으로 무언가를 간절히 얻고자 할 때 쓰입니다. 그러나 정토회에서 ‘기도’라는 용어를 쓸 때는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의미로 쓰는 게 아닙니다. 나의 무지를 깨우친다는 의미로 ‘기도’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정토회에서 사용하는 ‘기도’라는 용어는 수행으로서의 불교를 의미한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간절히 기도해서 병이 나았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마음이 간절해지면 정신이 굉장히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분비 기관은 무의식 세계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긴장이 풀어져서 완전히 편안해지거나 아주 집중이 되어 간절해지면 앓고 있던 병마저 치유되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분석해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마음이 간절하면 신체적인 파워가 생기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혼자서 물건을 든다면 40kg 이상을 들지 못하는 사람이 불이 나서 아기가 불에 타게 될 상황이 벌어지면 아기의 앞을 막고 있는 70kg 이상의 장롱을 순식간에 벌떡 들어 올려서 아기를 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도해 보면 장롱을 들 수가 없습니다. 이런 힘이 순간적으로 생겨나는 현상은 현실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네, 깨달음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꼭두각시가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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