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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분별심과 시비심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08.15|조회수18 목록 댓글 0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요?

“저는 평소에 시시비비를 잘 따지는 성격입니다. 경전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많이 들었는데 분별심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 상태를 말하는지요? 저는 직장에서 행정업무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 민원이 많은 부서입니다. 매일 자기가 옳다고 하고 불평불만이 많은 사람들을 상대해야 돼서 분별력이 있어야 업무를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분별심과 분별력의 차이는 무엇인지, 그리고 분별심을 버리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지 궁금합니다.”

“질문자는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줄 알아요? 기본적으로 남자와 여자는 구분을 할 줄 아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구분할 줄 모르는 게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일반적으로는 구분을 할 수 있어야 지혜로운 사람인 것 같습니다.”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지혜로운 사람이에요? 지혜롭지 못한 사람이에요?”

“지혜롭지 못한 사람입니다.”

“남녀를 두고 이 사람은 남자이고 저 사람은 여자라고 구분할 줄 아는 것은 분별력입니다. 그러나 남자는 우월하고 여자는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시비심입니다. 전자는 차이를 아는 것이고, 후자는 차별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믿는 종교가 있고, 뱀을 믿는 종교가 있다고 합시다. ‘두 종교는 서로 믿음의 대상이 다르다’ 이렇게 구분할 줄 모르면 분별력이 없는 거예요. ‘두 종교는 서로 다르다’ 하고 구분할 줄 아는 것이 분별력입니다.

시비심이란 ‘하느님을 믿는 종교는 훌륭하고, 뱀을 믿는 종교는 열등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을 갖고 시비를 하면 갈등이 생깁니다. 서로 다름을 아는 분별력이 시비심으로 이어지는 거죠. 그래서 두 가지를 합해서 ‘시비분별’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시비하지 않는 분별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시비하는 분별은 버려야 합니다. 질문자가 어떤 일을 두고 ‘이건 옳고 저건 그르다’ 하고 바라본다면 그것은 시비하는 마음이에요. ‘이것과 저것이 서로 다르다’ 하고 보는 것은 분별하는 마음이에요.

질문자처럼 민원실에서 행정 업무를 보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 법률에 기준할 때 이것은 허용이 되고, 저것은 허용이 안 된다’ 하고 말해야 되는 겁니다. 법률에서 허용이 안 된다고 해서 상대의 요구가 틀린 것은 아니에요. 현실에서는 이렇게 하자고 법률로 정해놓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요구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법률에서 허용이 안 됩니다’ 이렇게 얘기해 주면 되는 거예요. 법률적으로 허용이 되는 것은 옳고, 허용이 안 되는 것은 그르다고 표현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법률에서 허용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정말 그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부가 정한 법에 의해 그르다고 규정된 것이 오늘날 대한민국 법에 의하면 옳을 수가 있고, 북한 법에 그르다고 규정된 것이 남한 법에서는 옳을 수도 있습니다. 무슬림 법에 아주 나쁜 행위라고 규정된 것이 한국 법에서는 정당한 권리에 해당될 수도 있습니다.

무슬림에서는 여자가 결혼하기 전에 연애를 하면 죽을죄를 지은 것에 해당되죠. 남편이 있는 여자가 연애를 하면 사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여성이 누구하고 만나든 본인에게 결정권이 있다고 보잖아요. 설령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결혼한 상대편 당사자에게 심리적으로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재산상 변상은 해야 하지만 국가 권력이 그것을 처벌할 수는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내가 누구를 만나든 그건 내 권리에 해당하기 때문에 공권력이 개입할 수가 없다는 것이 현재 우리나라 형법입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을 욕했다거나 부처님을 욕했다고 해도 아주 심할 경우에만 모독죄가 적용되지 일반적으로는 처벌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슬림 국가에서는 알라신을 욕했을 경우 사형에 준하는 처벌을 받게 됩니다.

서양에서는 서양의 문화와 가치관을 기준으로 마호메트와 알라신을 비판하는 행위를 하는데, 무슬림에서는 그런 행위를 신성 모독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에 반발하여 테러를 하기까지 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갈등이 벌어지는 겁니다. 어떤 주장이 더 옳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서로 다를 뿐입니다. ‘서로 다르구나’ 하는 것이 분별이고, ‘옳고 그르다’ 하는 것이 시비입니다.”

“저는 늘 민원을 상대하다 보니까 요구하시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제가 옳다는 생각으로 ‘됩니다’, ‘안 됩니다’ 하고 말했던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까 법률을 기준으로 ‘여기까지는 허용이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허용이 안 됩니다’ 하고 말씀드리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당신 생각에는 허용이 안 될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허용해 주면 되겠구먼’ 이렇게 다시 요구할 것 같습니다.”


“상대가 그렇게 말할 때 ‘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고 일단 수용을 해야 돼요. 그런 다음에 ‘제가 속해 있는 관청에서는 이것은 허용이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당신이 원하면 결정권을 가진 분에게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하고 말한 후 ‘당신이 요청해서 한 번 더 확인했는데 허용이 안 된다고 합니다’ 하고 최종적으로 알려주면 됩니다.”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분별심을 버릴 수 있을까요?”

“분별심을 버리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정확하게 표현하면 ‘시비분별심을 버려라’ 하고 말하는 게 맞습니다. 분별이란 서로 다름을 구분할 줄 알고, 서로 다른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시비심이란 옳고 그름, 높고 낮음, 우열을 논하는 것입니다. 일상적으로 용어를 쓸 때는 ‘분별심을 버려라’ 하고 쓰지만 정확하게는 ‘시비분별심을 버려라’ 하고 말하는 게 보다 더 정확합니다. 어떤 사람이 민원을 넣을 때는 자기 나름대로는 옳다고 생각하고 넣습니다.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민원을 넣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의 입장을 일단 수용해줘야 해요.

‘네,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런데 법규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질문자가 옳으니 그르니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 싸우게 됩니다. 질문자는 그 사람과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잖아요. 그 사람의 요구와 법규가 충돌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질문자는 그 법규에 대해서만 얘기해 주면 됩니다.

‘법규가 이래서 당신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습니다.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주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드리겠지만, 저는 지금 공무원으로서 법규를 바탕으로 일하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그것은 해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해도 ‘그래도 해줄 수 있잖아’ 하고 요구할 수가 있어요. 그럴 때는 ‘알겠습니다. 제가 위에 한 번 더 물어보겠습니다. 다음에 오십시오’ 이렇게 대답하면 됩니다.

내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법규가 엄격하게 해석되기도 하고, 민원인이 노인이거나 약자라면 법규가 약간 더 부드럽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정도는 해주면 되겠구먼’ 하는 민원인의 말도 맞는 거예요. 그의 입장에서는 법규의 해석이 너무 경직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질문자도 어디 가서 요구를 한 번 해보세요. 상대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할 때 ‘알겠습니다’ 하고 수긍이 잘 안 됩니다. ‘그래도 방법이 없겠어요?’ 하고 한 번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사람의 심리입니다. 이런 심리를 이해하면 민원인이 큰 소리를 쳐도 내가 별로 영향을 안 받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저기 요청해 봐도 안 되니까 화가 났구나’ 하고 그냥 바라보면 돼요. 그리고 웃으면서 ‘안타깝네요. 그런데 규정상 안 됩니다. 규정은 중앙에서 바꿔야지 제가 바꿀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됩니다.


하루 이틀만 일할 것도 아니고 몇 년을 해야 하는 일인데 민원인과 싸우면 피곤해서 어떻게 살려고 그래요? 그러면 명대로 못 삽니다. 불평불만이 심하면 질문자는 대화에서 쏙 빠지는 게 좋아요. 민원인이 그래도 계속 우기면 ‘알았습니다. 한 번 더 체크해 보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해야 하루 종일 편안하게 일할 수가 있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어떤 민원을 넣고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어떤 식으로 주장하는지를 주제로 연구 논문을 한편 쓴다고 생각해 보세요. 연구 과제로 삼고 임하면 민원인들의 반응이 다양할수록 정말 재미있습니다. ‘이런 내용을 이렇게도 주장하네’, ‘이런 식으로 고집을 하네’ 하면서 그 사례를 하나씩 수집해 보는 겁니다. 연구 논문을 쓰려면 사례가 많을수록 좋잖아요. 욕을 하는 사람, 말을 부드럽게 하는 사람, 애원하는 사람, 여러 가지 사례가 나올 겁니다. 종류별 사례, 행위별 사례를 수집해서 논문을 한 편 쓰겠다는 마음으로 임하면 민원인을 만날 때마다 정말 재미있게 도울 수 있습니다. ‘와, 이 사람은 새로운 사례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한번 해봐요. ‘시비심을 버리겠다’ 하는 식으로 너무 어렵게 접근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가 있나’ 하고 받아들이면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이야, 저런 사람도 있네.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르다더니 진짜 다르긴 다르네. 같은 걸 두고도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이렇게 사례를 하나씩 수집한다는 관점을 가져 보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겁니다.”

“재미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매일매일이 너무 다이내믹해서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재미있도록 한번 해보세요. 민원을 해결해 준다면 민원인이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좋아합니다.”

“너무 법률을 내세워서 안 된다는 방향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가능하면 해결해 주려는 자세를 가져 보세요. 범법 행위를 하게 되는 것을 빼고는 다 해결해 주겠다는 관점을 가지면 스트레스를 덜 받게 됩니다. 스님도 어디 민원을 넣으러 가면 해결을 하고 싶겠어요? 해결을 안 하고 싶겠어요?”

“네, 해결하시려고 민원을 넣으실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질문자가 민원을 해결해 주면 스님이 질문자를 좋아할까요, 안 좋아할까요?”

“민원이 해결되고 나면 저를 좋아하시는 분은 없고 다시는 저를 보러 오지 않습니다.” (웃음)

“질문자를 다시 안 보러 오는 게 좋은 일이 아닐까요?”

“네, 맞습니다.”

“질문자가 민원부서에서 일한다는 것은 복을 지을 수 있는 큰 기회예요. 그러니 어지간하면 해결해 주세요. 오죽 답답하면 민원을 넣겠어요. 물론 가끔은 억지를 부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지간하면 해결해 준다는 관점에 서면 힘들지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해결해주고 싶은데 이것은 법적으로 도저히 허용이 안 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질문자가 덜 피곤하지 않을까 싶네요.”

“네, 감사합니다. 앞으로 분별은 하되 시비심은 내려놓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지혜는 통찰지와 분별지, 두 가지입니다. 사물을 볼 때 저 우주에서 내려다보듯이 앞도 보고 뒤도 보고 위도 보고 아래도 보고 왼쪽도 보고 오른쪽도 봐서 전체를 꿰뚫어 보는 것이 통찰지입니다. 통찰지가 있으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분별지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 하나하나까지 아주 세밀하게 다 아는 것이 분별지입니다. 분별지가 있어야 교화를 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상황마다 그에 맞는 조언을 해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통찰지만 있고 분별지가 없으면 자신은 괴롭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가 어렵습니다. 이때의 분별지는 하나하나의 차이를 아는 걸 말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를 옳다 그르다 맞다 틀리다 잘했다 잘못했다는 차별로 받아들이면 시비심이 생깁니다. 시비심은 분쟁을 가져오고, 분쟁은 다시 미움과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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