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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거친 말투로 군림하는 남편이 불편합니다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11.11|조회수26 목록 댓글 0

거친 말투로 군림하는 남편이 불편합니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간호하느라 정말 힘이 들었지만 스님을 만나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먼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남편이 종종 불만을 표현합니다. 남편은 예전과 달리 거친 말투와 군림하는 듯한 행동을 합니다. 새벽마다 정진할 때 읽는 수행문에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보살이 되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상대의 요구를 다 들어주다 보면 상대를 더 나쁘게 하는 것 같다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대화로 갈등을 풀어보려 했지만 오히려 다툼이 잦아져서 100일 동안 남편에게 묵언 수행을 하며 대처했습니다. 이런 저의 대응 방법이 문제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과거에도 남편이 하는 사업이 부도가 나서 매우 힘들었을 때 금강경 수지 독송을 권유받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정토회를 만나고 나서는 일상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하던 금강경 독송은 중단해야 할까요?”

“힘들 때 금강경 독송을 해서 좋아졌든, 스님 법문을 들어서 좋아졌든, 불법을 만나서 옛날보다 많이 좋아졌다는 것은 뿌듯하게 여겨도 될 만한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보다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질문하는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니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져 보입니다.


남편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뭔가 자기 입장에서는 못마땅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말은 상대가 불만을 토로하면 무엇이 불만인지를 자세히 살펴서 상대의 불편함을 최소화한다는 뜻입니다. 만약 남편이 내가 늦게 들어오는 것이 불만이라면 조금 일찍 들어오거나 사전에 늦을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미리 알려줘야 합니다. 또 남편이 내가 잔소리하는 것을 싫어한다면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밥을 주고 싶은데 상대는 지금은 밥 말고 물을 달라고 한다고 합시다. 그럴 때 ‘그래도 밥을 먹어야지!’ 하는 것은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는 것이지 상대의 요구에 수순하는 것이 아닙니다. 밥을 아무리 새로 잘 지어 놓았더라도 ‘알았습니다’ 하고 물을 드리는 것이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내가 한 시간 전부터 당신 주려고 밥을 해놨는데 밥도 안 먹고...’ 이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요구를 관철하려는 태도입니다.

남편이 죽이 먹고 싶다고 해서 죽을 끓여 놓았는데 갑자기 남편이 밥을 달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럴 때 ‘방금 전에는 죽을 달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밥을 달라고 하면 어떡해요?’ 하고 따지는 것은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어떤 때는 밥을 먹고 싶다가 갑자기 밥이 먹기 싫고 국수가 먹고 싶다든지 라면이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사람의 마음은 늘 바뀔 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이 좋습니다. 죽을 먹는다고 했으면 죽을 먹어야 하고, 밥을 먹는다고 했으면 밥을 먹는 것이 좋죠. 하지만 혼자 있을 때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밥을 해놓고도 국수가 먹고 싶으면 새로 국수를 끓여 먹을 때가 있고, 밥을 해놓고도 밥이 갑자기 먹기 싫어서 라면을 끓여 먹을 때가 있잖아요. 왜냐하면 혼자일 때는 그렇게 하더라도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부처럼 가까운 사이일 때는 자신의 속마음을 편하게 말할 수 있어야 되잖아요. 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가 갑자기 밥이 별로 안 당기고 라면이 먹고 싶다면 ‘여보, 나 지금 라면 먹고 싶은데 라면 끓여 주면 안 될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부부 관계는 어떤 관계보다 친한 사이이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아니 무슨 소리야, 이미 해 놓은 밥은 어떻게 하라고 라면을 먹겠다는 거야!’

이렇게 얘기한다면 부부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남일 때는 그렇게 말해도 돼요. 식당에서 밥을 주문해놓고 라면 달라고 하는 것은 욕을 얻어 먹어야 될 행동이죠. 그러나 부부지간이라면 이런 정도의 요구는 수용할 수 있어야 되지 않을까요?

아이들도 엄마한테는 무슨 말이든 편하게 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엄마한테 만큼은 이렇게 하기로 했다가 저렇게 하겠다고 말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정말 친하기 때문에 이렇게 하기로 했다가 저렇게 바꿀 수가 있는 겁니다.

물론 외부 사람에게는 그렇게 변경을 자주 하면 비난을 받거나 욕을 얻어먹기 때문에 먹기 싫어도 그냥 첫 번째 선택한 걸 먹어야 해요. 그러나 보살이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것은 상대가 밥을 달라고 했다 하더라도 갑자기 죽을 달라고 하면 ‘알았어요’ 하고 죽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상대가 죽을 달라고 했다 하더라도 밥을 달라고 하면 ‘알았어요’ 하고 밥을 줄 수 있어야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의미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고 해놓고는 결국 자기 식대로 행동하고 있는 겁니다. 상대가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전혀 살피지 않고 있어요. 상대의 마음이 편안해지도록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좋을대로 하고 있습니다. 남편에게 자기 의견을 자꾸 관철시키려고 하니까 말다툼이 계속 될 수밖에 없고, 그게 시끄러우니까 아예 말을 안 하는 묵언을 선택한 겁니다.

절에 들어와서 수행을 할 때는 ‘제가 너무 시비분별이 많아서 백 일 간 묵언을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하나의 수행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묵언 수행을 할 때는 내가 묵언하는 것에 대해 가족들이 모두 승낙을 해야 합니다.

‘여보, 내가 잔소리를 안 해야 하는데 항상 당신을 보면 잔소리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잘 고쳐지지 않으니 제가 백 일 동안만 입을 다물어 볼 테니까 당신이 좀 불편하더라도 양해해 주세요.’

이렇게 남편에게 제안을 했을 때 남편도 동의를 한다면 묵언이 수행의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 동의하지 않는데 한집에 살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너하고 말하기 싫으니까 아예 말을 하지 않겠다’ 하는 태도에 불과합니다. 이 세상에서 상대를 가장 무시하는 행동이 말을 안 하는 것입니다. 말대꾸라도 하면 싸울 수가 있거든요.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아무런 대답을 안 하는 것은 ‘너 같은 인간하고는 말하기 싫다’ 하면서 상대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입니다.

한집에 부부가 같이 살면서 말을 안 한다는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좀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질문자는 독한 여자예요. 그걸 불교 수행이라고 표현한다면 남편 입장에서는 불교가 정말 진절머리 날 겁니다. 오히려 ‘어디 가서 불교라는 이상한 걸 배워 와서 행동이 더 나빠졌다’ 하고 평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결과 남편은 불교에 대해 나쁜 인식을 갖게 될 수 있습니다. 내 의견을 고집하면 갈등이 생기니까 ‘부처님’, ‘불교’, ‘법륜스님’이라는 이름을 빌려와서 ‘부처님이 그랬다’, ‘불교 수행은 이런 것이다’, ‘법륜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하면서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행과는 거리가 먼 얼토당토않은 관점입니다.


금강경을 수지독송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상을 짓지 말라는 것이 금강경에 나오는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이라는 구절입니다. 상대에게 베풀 때도 내가 베풀었다는 상을 짓지 말라는 것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고 하는 구절입니다. 금강경을 독송한다는 것은 그런 가르침을 늘 가슴에 새긴다는 의미입니다. 뜻도 모르고 금강경만 독송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얘기는 금강경과 아무 관계 없는 얘기입니다.

법륜 스님의 법문을 듣고 마음을 바꿔서 관점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법륜 스님의 사진을 보고 절만 하면 복을 받는다’, ‘법륜 스님의 옷자락만 잡으면 병이 낫는다’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금강경의 내용을 항상 가슴에 새기며 살라는 것이 금강경을 수지독송하라는 말의 의미예요.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말은 내 의견을 고집하지 않고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그렇게 바뀔 수도 있겠다’ 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중생의 요구에 수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이름을 내걸고는 자기 고집대로 하고, 금강경을 독송한다고 하고는 제 맘대로 하고 있어요. 질문자의 행동은 금강경과도 아무 관계가 없고,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는 수행문과도 아무 관계가 없고, 법륜 스님의 가르침하고도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자기 성질대로 살고 있으면서 ‘법륜 스님 가르침대로 산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산다’, ‘금강경을 독송한다’ 이렇게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착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남편이 잘하고 못하고와 관계없이 한집에 살면서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입을 다문다는 것은 수행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거예요. 이미 결혼을 한 분인데 수행을 한다고 하면서 ‘나는 욕망을 떠나 수행 정진을 하기 위해 1년 동안 부부 관계를 안 하고 정진에만 집중했다’ 이렇게 말하는 분들이 가끔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불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럴 거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죠.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남편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여보, 나는 모든 욕락(欲樂)으로부터 떠나야 해서 당신의 아내 역할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이혼을 하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습니다. 당신도 다른 여자를 만나서 사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남편을 떠나야 합니다. 한집에 사는 남편에게 ‘다른 여자를 일절 만나지 말고, 당신도 금욕을 하시오’ 하고 요구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굉장히 독선적인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행동은 부처님 이름을 내걸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행동에 속합니다. 질문자와 같은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으로부터 불교가 욕을 먹게 되는 거예요. ‘절에 미쳐서 저런다’ 하는 소리를 듣기가 쉽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수행의 관점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부모를 가족 밖으로 생각하는 게 안타깝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중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자식의 도리를 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천일결사 입재자들이 하는 모둠활동의 정확한 취지를 알고 싶습니다. 모둠원들이 관심을 가지는 활동을 통해 참여를 유도하고 싶은데 사무처에서 안 된다고 해서 아쉽습니다.
저는 화가 나면 물건을 집어 던지며 성질을 내곤 합니다.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고, 법륜 스님처럼 저도 환경 운동과 평화 운동을 하며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대화를 마치고 나서 질문자들에게 한 줄 소감을 물어보았습니다. 남편과의 갈등에 대해 질문한 분도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제 고집을 합리화하면서 산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오늘 야단을 좀 쳤는데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스님의 가르침 덕분에 색안경을 끼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질문자를 위해 다시 한번 수행의 관점을 알려주었습니다.


“수행이나 종교를 너무 한쪽으로 치우치게 받아들여서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 오히려 부작용이 더 커집니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을 한번 보세요. 근본 원인을 살펴보면 종교 원리주의자들이 자기 종교만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데에서 비롯된 분쟁입니다. 종교를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오히려 유혈 분쟁이 끊이지 않잖아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사람을 죽이라고 한 적은 없잖아요. 그런데도 자기 나라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보다 10배 100배의 사람들을 죽여도 된다고 합리화하지 않습니까? 가장 무서운 것이 자기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항상 ‘논쟁하지 말라’, ‘옳다 그르다 시비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질문자가 원하는 수준이 안 되는 것은 맞아요. 내가 원하는 수준의 남편이었다면 갈등이 생기지 않았겠죠. 그러나 남편이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의 남편이 아닐 뿐입니다. 남편이 바뀌어서 내가 원하는 만큼 해주면 좋겠지만 그건 남편의 몫이잖아요. 남편을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안 죽고 산 것만 해도 괜찮다’, ‘본인의 손으로 밥 먹고, 본인이 눈 똥은 본인이 치우는 것만 해도 괜찮다’, ‘바람 안 피우는 것만 해도 괜찮다’ 이렇게 내 기대를 조금 낮추면 남편과 같이 사는 데에 큰 지장이 없어요.

그리고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에요. 치매는 병이거든요. 치매에 걸린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정신이 아니니까 욕도 하고, 잘해줘도 몰라보고,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치매에 걸린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모시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치매는 대뇌 신경세포의 손상에 따른 일종의 정신 질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매 환자는 형제라도, 부부라도, 부모라도 간호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힘이 들어도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고마워할 줄은 알기 때문에 간호를 하기가 수월합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린 사람은 고마워할 줄 모르기 때문에 간호하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이런 인연을 만난 것도 인생에서 주어진 하나의 과제이지 않겠어요? 이런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만 해도 질문자는 참 훌륭한 사람이에요. 그러나 금강경 독송을 한다거나 중생의 요구에 수순한다고 하면서 남편에게 100일 동안 묵언을 하는 이런 행동들은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하는 행동들입니다. 앞으로는 너무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유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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