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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별로 잘하는 게 없어서 고민입니다

작성자자연|작성시간23.12.19|조회수13 목록 댓글 0

별로 잘하는 게 없어서 고민입니다

“뭔가 변화하고 성장하기를 기대하고 필리핀에 왔는데, 8개월이 지난 지금 제가 별로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에 행사를 준비하면서도 별로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고, 도반들과도 그냥저냥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향훈 법사님이 저에게 잘하고 있다고 늘 말씀을 해주십니다. 처음에 올 때는 밑바닥부터 업무를 배워서 성장하는 내가 되길 기대하는 마음이 있었고, 영어도 잘하는 걸 기대했고, 도반들과도 잘 어울려서 지내는 내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이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환경을 바꾸었는데도 예전과 똑같이 살고 있습니다. 그저 즉흥적으로 주어지는 일에 맞춰서 사는 모습에 실망감도 느낍니다. 시간이 지나도 영어 실력이 늘지 않고, 제가 아는 몇 단어로 그냥 얼렁뚱땅 하고 있어서 제 모습이 못마땅합니다. 영어 공부할 시간이 주어져도 피곤하면 그냥 자버리고, 개인 수행도 열심히 할 것이라고 다짐했는데 거의 안 하고 있습니다. 시간만 때우고 사는 것 같아서 자괴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이렇게 사는 게 편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떡하면 좋을까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 공부를 1등 해야겠다, 이렇게 겉으로 욕심을 내는 것처럼 질문자는 자신에 대해 지나친 기대와 욕심을 가지고 있어요.

외국에 나가서 10년을 살아도 그 나라 언어가 유창하지 않은 게 대부분입니다. 생각하지 않고도 말이 저절로 나오는 모국어가 아닌 이상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현지 언어를 유창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을 먼저 하고 말을 하는 단계에서는 아무래도 현지인과 차이가 납니다. 8개월 만에 언어를 잘하겠다는 생각은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예요. 다른 사람에 비해 언어능력이 특출나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그런 것도 아닌데 8개월 안에 유창하게 영어를 잘하고자 하는 건 얼토당토않은 목표입니다. 여기에 온 지 8개월 밖에 안 되는 질문자가 제대로 하는 게 없는 건 정상입니다.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니고 경험이 많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8개월 만에 잘하겠어요. 지금 질문자는 태어난 지 8개월 밖에 안 된 아기가 ‘저는 아직 뛰지도 못합니다’ 하고 말하는 것과 같아요. ‘걷지도 못하면서 날려고 한다’는 옛말이 있듯이 지금 질문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 지나친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부족해 보이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괜찮아, 잘하고 있어’ 하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크게 기대를 안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질문자가 평소에 아이디어가 아주 많다거나, 백일 출가를 할 때 아주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었나요?”

“아니요.”


“저도 굉장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필리핀에 왔다는 보고를 받은 적이 없어요. 만약 그런 평가를 받았다면 앞으로 필리핀 사업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이 기대도 하고 그에 따른 피드백을 주거나 했을 텐데, 그런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지금 질문자가 이렇게 와서 활동하고 부족한 일손을 보태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대가 크면 그만큼의 성과가 없을 때 실망도 큽니다. 그러나 특별한 기대가 없는 경우에는 이렇게 생활하고 활동해주고 있는 것만 해도 잘한다고 느껴집니다.

예전에 인도에 봉사를 하러 간 사람이 현지에 도착한 후 일주일 만에 집에 가겠다고 해서 결국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질문자는 8개월이 되었는데 그런 난동을 피우는 것도 아니니까 법사님이 보기에는 잘하고 있다고 평가하는 겁니다.

결혼을 할 때도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크면 결혼생활이 오래가기가 어렵고, 길 가다가 만난 사람들은 백년해로를 한다’ 하고 제가 자주 법문을 했잖아요. 이 말은 기대가 크면 그만큼 실망이 크고, 상대방에 대한 기대가 없으면 옆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절에서도 어떤 스님이 유명하면 뭔가 특별한 게 있다고 생각해서 기대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막상 시봉살이를 시작하고 나면 3년 정도 살다가 짐을 싸서 떠나는 경우가 많아요. 왜냐하면 옆에서 지내보니 자기 공부에 크게 진척이 되는 것도 없고, 큰스님이라고 하지만 같이 살아보면 큰스님도 밥 먹고 똥 누면서 지내니까 실망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는 스승한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너무 큰 기대를 가지고 왔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질문자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여기 와서 활동하는 것만 해도 고맙게 느껴지는 겁니다. 아침 예불에 나오는 것만 해도 잘하고 있는 것이고, 당번을 정하면 돌아가면서 일하는 것만 해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여기에 온 지 8개월 밖에 안 되기 때문에 누구도 ‘운전을 잘해라’, ‘영어를 유창하게 해라’, ‘새로운 걸 개척해라’ 이런 것을 기대하지 않아요. 그러니 부담 갖지 않아도 됩니다.

대신 시간이 지나면 기대치가 올라가는 부분은 있습니다. 여기 온 지 3년이 지나면 ‘온 지 3년이나 됐는데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하냐’, ‘온 지 3년이나 됐는데 아직 소통이 서투르냐’ 이런 잔소리가 조금씩 나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사람들이 기대를 하지 않을 때 오히려 살기가 좋은 거예요. 그러니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사람들이 ‘지금 잘하고 있다’라고 하는 말도 꼭 일을 잘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평범한 한 사람으로서 제 값을 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향훈 법사님도 질문자가 말썽을 피운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렇다고 질문자 때문에 고민이니까 다시 데려가라는 말도 없는 걸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님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하는 거예요. 지금 고민은 질문자가 스스로를 과대평가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스님이 보기에는 질문자가 여기에 와서 이렇게 살아가는 것만 해도 용합니다.” (웃음)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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