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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뇌가 많은 제 자신을 어떻게 자비롭게 볼 수 있을까요?

작성자자연|작성시간24.01.16|조회수8 목록 댓글 0

번뇌가 많은 제 자신을 어떻게 자비롭게 볼 수 있을까요?

“육조단경에서 본래의 자성을 보면 불성과 다르지 않다고 배웠습니다. 저는 제 본성이 선하다고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질투, 미움, 자기비판, 수치스러웠던 제 모습을 보면 본성이 선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번뇌를 갖고 있는 제 자신을 자비롭게 볼 수 있는 길이 궁금합니다.”

“우선 여기에 등장하는 용어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선(禪)이 나오기 전인 대승불교에서는 우리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걸 불성(佛性)이라고 했습니다. 흔히 부처라고 하면 어마어마한 능력과 지혜를 갖춘 존재를 떠올리고, 부처가 우리의 마음 밖에 있는 줄 압니다. 이렇게 밖을 향해 있는 눈을 마음 안으로 돌리기 위해 나온 가르침이 바로 ‘불성이 곧 내 마음속에 있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불성이라는 게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내 본성이 곧 불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는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인도나 중국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부처라고 하면 뭔가 대단한 존재를 떠올리는데, 부처가 어디에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나의 성품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이니 정말 파격적인 가르침이죠.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내 마음이 부처라고 하는데, 실제 내 마음은 질투도 하고, 욕심도 내고 하니까 ‘이런 마음이 어떻게 부처일 수 있느냐’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아주 질문을 잘하셨어요.

우리의 마음은 좋은 마음을 낼 때는 부처 같이 내고, 나쁜 마음을 낼 때는 악마 같이 냅니다. 아이를 막 낳아서 키울 때는 입 안에 음식도 먹여주고, 아이를 위해서는 내가 죽어도 좋다는 심정으로 정말 부처님이나 낼 수 있는 마음을 내며 보살핍니다. 잠깐이긴 하지만 아이를 낳은 사람은 실제로 대부분 이런 마음을 냅니다. 반면, 누군가를 미워하기 시작해서 극에 달하면 칼로 찔러 죽이고, 손가락이 총이면 쏴 죽이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세상을 확 불질러 버리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이럴 때의 마음은 완전 악마와 다름없습니다. 옛날부터 사람에게는 이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 봤습니다. 둘 중 어떤 마음을 본성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성선설과 성악설로 나뉘었습니다. 원래는 선한 마음이었는데 세상에 물들어서 악성이 생겨난 것이니 원래 자기의 선한 마음으로 돌아가면 된다는 주장이 성선설입니다. 반면, 인간의 마음은 본래 짐승 같고 악하지만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훈련을 하면 선하게 된다는 주장이 성악설입니다. 성악설을 꼭 나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악설은 사람을 악하게 본다기보다는 후천적인 교육을 강조하는 관점입니다. 사람에게는 그러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더 교육받고 수행하고 닦아야 한다는 데 방점을 두고 있습니다. 성선설은 세상에 물든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관점이죠.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 둘 다 있다고 보는 관점도 있습니다. 이걸 표현한 소설 작품이 낮에는 선한 마음이 나타나고 밤에는 악한 마음이 나타나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입니다.


불교는 성선설도 아니고, 성악설도 아니고, 양면설도 아닙니다. 육조단경을 보면 육조대사가 스승으로부터 법을 전수받는 과정이 나옵니다. 법을 받은 징표가 발우입니다. 임금으로 치면 옥새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죠. 역사를 보면 옥새를 뺏으려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는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것처럼 당시 중국에서는 스승의 가사와 발우를 전수받은 사람이 다음 스승이 되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원래 가사와 발우를 전해주는 의미는 부처님의 삶을 받들어 수행자답게 검소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가사와 발우 그 자체는 따지고 보면 그냥 밥그릇이고 천 조각에 불과한데 거기에 무슨 법이 있겠어요? 부처님의 발우와 가사를 물려받는 데에는 부처님처럼 검소하고 겸손하게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화가 권위주의로 흘러가게 되면 그 정신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겉으로 드러나는 징표만 가지면 스승이 되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육조대사가 스승으로부터 발우를 전수받은 걸 알게 된 다른 제자들이 그 징표를 빼앗기 위해 육조대사를 뒤쫓아 갔습니다. 군인 출신의 힘이 센 스님이 쫓아오니까 힘으로는 당해낼 수가 없죠. 그래서 발우를 바위 위에 두고 몸은 얼른 바위 뒤로 숨겼습니다. 발우를 빼앗으러 온 사람은 저 발우만 가지면 내가 스승이 된다는 생각에 웬 떡인가 싶었겠죠. 그래서 발우를 집어드는데 이상하게 발우가 바위에 붙어서 안 떨어졌어요. 육조대사를 쫓던 사람도 원래는 나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방앗간에서 방아를 찍던 사람이 발우를 훔쳐서 달아났다고 소문이 나서 자기가 발우를 되찾아야겠다며 뒤쫓아온 것이었습니다.

막상 발우가 바위에서 떨어지지 않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행자여, 제가 법을 빼앗으러 온 게 아니라 법을 얻으러 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혜능대사가 출가한 스님이 아니었으니까 행자라고 불렀던 거죠. 그러자 혜능대사가 이 사람이 해칠 마음이 없다는 걸 알고 바위 뒤에서 나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조금 전 마음은 무엇이고, 조금 후의 마음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너의 본래 마음인가?’

발우에 손을 댈 때의 마음은 악심이었고, 발우에 손을 땐 후의 마음은 법을 구하는 선한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니 ‘전심은 무엇이고, 후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악심은 무엇이고, 선심은 무엇인가? 어떤 것이 너의 본심인가?’하는 뜻이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는 선심도 일어나고 악심도 일어납니다.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이 사랑스러워서 셔츠를 빨아주려고 셔츠의 호주머니를 뒤졌는데 극장표가 나오니 그 순간 눈이 뒤집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때는 전심이 선심이고 후심이 악심입니다. 이런 상황에 직면했을 때 ‘어떤 것이 너의 본래 마음인가’ 하고 생각하는 것이 화두를 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순식간에 다른 마음이 일어나는 걸 보면 ‘본래 마음이 선심이다’, ‘본래 마음이 악심이다’ 하고 하나로 정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음이 다르게 일어나는 걸 보면서 본래 마음이 무엇인지 탐구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을 스스로 탐구해야 해요. 선심도 일어나고 악심도 일어나는 가운데 ‘선심과 악심 이전에 나의 본심은 무엇인가’ 하고 탐구를 하는 것이 선(禪)입니다.

선(禪)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이렇게 정하지 않고 탐구하는 것입니다. 단정하는 건 지식입니다. 선(禪)의 핵심은 탐구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하고 탐구하는 것을 선(禪)에서는 화두라고 합니다.

지금 질문자는 마음속에 악심이 많이 일어난다고 느끼는데, 꼭 그렇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선심도 많이 일어납니다. 마음을 한 번 관찰해 보세요. 마음은 정해진 모양이 없이 이렇게도 일어나고 저렇게도 일어납니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에요. 이렇게 마음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아, 이런 거구나!’ 하고 자각을 하게 됩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는 게 번뇌가 아니라, 그런 감정이 일어났다고 해서 괴로워했던 것이 번뇌였던 것 같습니다. 제 마음을 잘 탐구해 보고 수행 정진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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