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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마음의 본질에 대해 (아침에 일어나야지 일어나야지 이야기)

작성자자연|작성시간24.02.05|조회수32 목록 댓글 0

한국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저는 한국불교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한국불교의 현재 상황은 어떻고, 스님께서 보시기에 지금의 한국불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요?”


“한국불교의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제가 잘 몰라서 여쭙습니다.”

“한국불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종교로써의 역할로만 보면 한국불교는 특별히 문제 삼을 게 없습니다. 종교라는 게 원래 복을 비는 사람이 있고, 또 복을 빌어주는 사람이 있는 거잖아요. 백 원어치의 일을 하고 백 원어치의 대가를 받는 것은 정당한 대가입니다. 그러나 복을 빈다는 것은 백 원어치의 일을 하고 천 원어치의 대가를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남을 때리기도 하고, 물건을 훔치기도 하고, 성추행도 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이 죽어서 극락이나 천당에 가고 싶다면 그걸 좋은 심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타인을 해치는 나쁜 인생을 살았더라도 죽어서는 극락이나 천당에 갈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종교가 해 온 일입니다. 불교뿐만 아니라 힌두교도 그랬고, 기독교도 그랬습니다. 종교라는 게 원래 그렇습니다.

백 원을 보시하면 만원을 돌려받게 해 주겠다고 하는 것인데 그게 사실이라면 솔직히 말해서 중간 수수료를 좀 내야 하잖아요. 도박장에서도 수수료를 내는데 복 빌어준 사람에게 수수료를 내는 건 당연한 일 아니겠어요? 그런데 그걸 복 빌어준 사람에게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복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잘못이 없을까요?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왜 빌어준 사람 탓만 합니까?

예전에 어떤 분이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스님, 복전함에 돈을 넣으면 정말 복을 받습니까?’ 하고요. 이 말이 무슨 뜻이겠어요? 지금 복전함에 천 원을 넣으면 이천 원어치 복을 받을 수 있느냐는 얘기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정말 그렇다면 저부터 넣겠어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천 원을 투자해서 이천 원이 되려면 은행 이자로 계산하면 최소 십 년은 걸립니다. 그런데 복전함에 천 원을 넣으면 금방 이천 원으로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니 저부터 그걸 하지 왜 다른 사람에게 권하겠어요? 이런 허황한 얘기는 사람들이 너무 살기 답답하고 힘드니까 통할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허황한 얘기가 좋으시다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저는 그런 분들이 잘못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술에 취하고 도박을 일삼는 사람들도 있는데, 복 좀 비는 사람들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그건 세상의 여러 삶 중에 하나일 뿐이에요.

요즘에는 가상화폐에 투자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게 법에 어긋나면 불법이 되고, 법에 어긋나지 않으면 합법이 되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가상화폐야말로 정말 허황한 얘기라고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그 시스템을 믿고 돈을 계속 넣는다면 그것도 투자가 되는 겁니다. 가상화폐도 종교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믿으면 시장이 생기고, 믿으면 계속 투자금이 들어오니까요. 하지만 이런 사람들을 비판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사람은 하면 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의문이 좀 들어요.

‘저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고 싶을까? 누군가에게 빌어서 대학에 합격하고, 사업이 잘 된다면 공부는 왜 할까? 사업은 왜 열심히 할까? 그냥 빌고 말지. 결혼해서 같이 살 사람을 부처님한테 왜 구해달라고 할까? 자기가 고르지. 자기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고 살아야지 왜 자꾸 그걸 다른 것들에 책임을 미루고 살까?’

지구에 사는 사람이 80억 명 정도 됩니다. 이 중에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 같은 시에 태어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수백에서 수천 명은 되겠죠? 그러면 이분들의 사주를 보면 다 똑같이 나올 텐데 그들의 삶이 모두 같을까요? 옛날에는 남녀나 신분에 대한 차별이 심했습니다. 양반으로 태어나면 평생 편하게 사는데, 여자나 천민으로 태어나면 평생을 노력하더라도 고생스럽게 살았죠. 그래서 ‘나는 왜 이럴까?’ 하고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당신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다’, ‘하느님께 벌을 받아서 그렇다’, ‘사주가 나빠서 그렇다’ 하는 얘기들이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을 보면 저는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종교는 복을 구합니다. 복을 구하는 사람은 백 원을 내고 만 원을 받길 원하는데 만 원을 받도록 빌어준 사람에게 중간에서 좀 가로챘다고 난리 피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백 원 투자하고 만원을 벌었으면 수수료를 9천 원은 내야 하지 않을까요? 백 원을 투자하고 9백 원을 돌려받더라도 아홉 배를 번 것인데 그 정도면 굉장한 것 아닌가요? 사람들이 종교를 자꾸 비판적으로 보는데 그런 얘기는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교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그래서 ‘한국불교는 문제가 있다’ 하는 말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는 어떨까요? 지금 서양에서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도 점점 신뢰를 잃으면서 신자가 줄어들고 있고요. 요즘 젊은이들은 종교를 거의 믿지 않습니다. 불교의 가르침에서 보면 인연을 지어 받은 과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어떤 관광지에 관광객이 줄어들고 있는데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몰려들 때 가격을 높여버리니까 인심을 잃어서 이제는 가격을 낮추어도 가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입니다. 사람은 한번 실망하면 다시 잘 가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연과보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나부터 잘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남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늘 남을 비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남의 눈의 티끌은 보고 내 눈의 대들보는 보지 못한다’라고 하셨잖아요. 우리가 불자이든 불자가 아니든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남편이 술을 마신다, 남편이 바람을 피운다,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런 남편을 내가 어떡할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술은 많이 마시지만 돈을 잘 버니까 데리고 살 것인가, 돈을 아무리 잘 벌어도 나는 술 마시는 사람은 싫으니 헤어질 것인가? 이것은 나의 문제이지 남편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람을 가끔 피우지만, 돈도 잘 벌고 평상시에 나한테 잘한다면 그 복을 왜 발로 찹니까? 좀 수용해 주고 이익은 내가 취하면 되죠. 그러나 천금을 벌어와도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좋다는 남자는 싫다고 한다면 미련을 가질 필요도 없고 화낼 필요도 없고 ‘나 말고 다른 여자가 더 좋아? 그래, 그럼 나는 간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 가버리면 됩니다. 그걸 저한테까지 찾아와서 물을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저한테 묻는 것은 어떤 심보일까요? 돈은 갖고 싶고 바람은 못 피우게 하고 싶으니까 ‘스님, 그런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질문하면 ‘양다리 걸치고 있구나’ 하고 속을 꿰뚫고 봅니다.

마음의 본질을 딱 꿰뚫어 보는 것을 ‘직지인심(直指人心)’이라고 합니다. 어제도 어떤 분이 집에 있으면서 남편을 보면 가슴이 답답한데, 인도성지순례를 와서 다니다 보니 남편이 너무 불쌍해서 보고 싶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집에 돌아가면 어떻게 이 깨달음을 계속 유지할 수가 있냐고 물었어요. 이렇게 볼 때는 좋아 보이고 저렇게 볼 때는 나쁘게 보이는 그 마음은 둘이 아니라 똑같은 마음이에요. 여러분은 누구나 다 어떤 때는 선심(善心)이 일어나고 어떤 때는 악심(惡心)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세속에서는 선심이 일어나면 복을 받고 악심이 일어나면 벌을 받는다고 합니다. 해탈의 길인 수행은 선심이든 악심이든 모두 경계 따라 마음이 이렇게 일어났다 저렇게 일어났다 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것입니다. 선심과 악심을 둘로 보지 않고 경계 따라 일어나는 마음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지금 남편과 떨어져 있어서 선심이 일어났다면 집으로 다시 돌아가면 악심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지금 남편과 떨어져 있어서 선심이 일어날 때 그 본질을 꿰뚫어서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악심이 일어날 때도 그 본질을 꿰뚫어서 구애받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경계에 구애받지 않는 해탈의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늘 선심만 일어나는 것을 일심(一心), 즉 한마음이라고 알고 있다면 불교를 전혀 모르는 겁니다. 마음의 성질 자체가 항상 한결같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은 죽 끓듯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이것을 ‘관심무상(觀心無常)’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하면 무상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일심이 어디 있어요? 그것은 관념일 뿐입니다. 마음이란 늘 경계 따라 이랬다 저랬다 제 멋대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선심이든 악심이든 의미가 없습니다. 마음이 이렇게 일어나든 저렇게 일어나든 의미 부여를 하지 않으면 경계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일심(一心)’이라고 부릅니다.

마음공부를 할 때는 이렇게 본질을 꿰뚫어서 보아야 공부가 쉬운데 늘 눈을 감고 더듬고 있으니까 공부가 어려운 거예요. 인생을 쉽게 살자고 수행을 하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행까지 어렵게 하려고 합니까? 마치 ‘아침 5시에 일어나야지’ 하고 시계를 맞춰 놓고는 아침에 시계가 울리면 이불속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이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노력이라고 생각하세요? ‘일어나야지’ 생각한다는 것은 일어났다는 거예요, 아직 안 일어났다는 거예요?”

“아직 안 일어났다는 겁니다.”

“딱 일어나 버리면 ‘일어나야 한다’ 이런 생각이 필요 없습니다. 일어나 버리면 더 이상 아무런 노력할 것도 없고 각오할 것도 없어요. 여러분들은 늘 ‘가야지’, ‘일어나야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먹기 때문에 나름대로 애쓰지만 몸은 그대로 누워 있는 거예요. 그러면서 ‘일어나고는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이렇게 말해요. 몸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몸이 말을 안 듣는 게 아니고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것은 지금 일어나고 싶다는 거예요, 일어나기 싫다는 거예요?”

“일어나기 싫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여러분들은 그것을 하고 싶어 한다고 착각을 해요. ‘일어나야지’ 하는 노력은 이제 그만두고 그냥 벌떡 일어나 버리세요. 내일 아침부터 해보세요. 왜 매번 인생을 결심하고 살려고 해요? 할 일 있으면 하면 되고, 갈 일 있으면 가면 됩니다. ‘일어나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지금 싫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구나’ 하고 본질을 꿰뚫어 봐야 합니다. 본질을 꿰뚫어야 싫은 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탁 놓아버릴 수 있습니다. 선(禪)에서는 이것을 ‘방하착(放下着)’이라고 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일어나야지’ 하고 생각하는 것을 지금 내가 노력하고 있으니까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매번 헤매게 되는 거예요.

만약 여러분들이 인도인 가정부나 종업원을 고용했는데 골치가 아프다면, 이것은 고용한 그 사람의 문제일까요? 내 문제일까요? 다 내 문제입니다. 돈은 적게 주고 싶고 일은 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에요. 본질을 꿰뚫어서 이 문제가 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걸 딱 볼 수 있어야 그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종업원이 한번 가르쳐서 딱 알아듣는다면 계속 종업원으로 일하지 않습니다. 옆에 자기 가게를 차려버리지요. 한국 사람을 데려다가 종업원으로 삼으면 금방 일을 배워서 옆에 가게를 차려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 번을 가르쳐줘도 종업원이 제대로 못 알아듣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그래야 그가 옆에 가게를 내지 않고, 내가 계속 그 사람에게 사장 노릇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열 번 스무 번을 가르쳐도 일이 늘지 않는다면 그때는 그 사람을 내보내도 되고, 아니면 그 정도 돈을 주고 그에 맞는 성과를 얻으면 됩니다.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이지 그 사람의 문제는 아닙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여러분들이 인도에서도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인도에서 내내 다른 사람 욕을 하면서 지내면 본인만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늘 경계 따라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살펴서 그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에게 진정한 삶의 자유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불교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너무 생각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더 탐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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