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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붓다가 새로 발견한 제3의 길

작성자자연|작성시간24.03.21|조회수3 목록 댓글 0

“어제 부처님의 출가일을 맞아서 출가의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출가란 집을 떠나는 것입니다. 집이라는 것은 안온함, 즉 보호처를 뜻합니다. 안온함과 보호처라는 말은 단순히 주거지를 뜻하는 집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가족, 이웃, 고향, 사회, 조국, 이런 의미들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집은 나를 보호해 주고 나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들을 통칭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집을 떠난다는 것은 안온함과 보호처를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광야에 홀로 나간 나그네와 같은 것입니다. 왜 안온함을 버려야 할까요? 그 안온함이 속박이 되고 굴레가 되고 고통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얻기까지 부처님의 수행 과정

부처님은 나와 남이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찾기 위해 단호하게 안온한 집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 길을 찾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다시는 성으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막연함에서 오는 불안감이 그를 엄습했습니다.


출가만 하면 새로운 길이 단박에 얻어질 것 같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긴 시간이 흘러도 새로운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수행에 전념했기 때문에 옷은 낡아 없어져서 알몸이 드러나고, 음식을 먹지 않아서 몸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지듯이 야위어 갔습니다. 그는 추위도 피하지 않고, 더위도 피하지 않고, 벌레도 피하지 않고, 야수의 울음소리에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직 선정에 집중을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수행 모습은 친구들 다섯 명도 감동하여 존경심이 우러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길은 잡힐 듯 잡힐 듯하지만 잡히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열반의 길을 무모하게 찾는 것은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었습니다. 경전에는 이러한 고타마의 회의를 마왕의 유혹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유혹의 표현이 경전에는 ‘열반이란 없소. 다만 열반이라는 말이 존재할 뿐이오’ 하고 나와 있습니다. 이 말은 수행자에게 엄청나게 절망감을 주는 말입니다. 내가 찾고자 하는 길이 실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니까요. 이런 번뇌가 끊임없이 일어났지만 그는 번뇌에 사로잡히지 않고 그 번뇌를 벗어나서 정진에 대한 본래 관점으로 돌아옵니다.


붓다가 새로 발견한 제3의 길

욕망을 따르는 것과 욕망을 억제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로 보면 서로 다른 정반대의 길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뿌리는 같다는 사실을 그는 발견했습니다. 욕망을 따르는 것만 욕망에 설복당하는 것이 아니고, 욕망을 억제하는 것도 욕망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둘 다 그 뿌리는 욕망입니다. 누군가 내 팔을 잡아당길 때 끌려가는 것과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것은 둘 다 잡아당기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이 달랐을 뿐이지 반응을 한다는 면에서는 똑같은 반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욕망을 따르는 쾌락과 욕망을 억제하는 고행이 해탈의 길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욕망을 따라가지도 않고, 욕망을 거부하지도 않고, 다만 욕망을 욕망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즉,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욕망을 따르게 되면 마음이 들뜨게 되고, 욕망을 억제하게 되면 마음이 긴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욕망을 따르지 않기에 들뜨지 않았고, 욕망을 억제하지 않기에 긴장하지도 않았습니다. 편안한 가운데 욕망이 욕망인 줄 알아차렸습니다. 즉 욕망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를 보면 욕망을 억제하는 것과 똑같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욕망을 따르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내적으로 살펴보면 욕망을 억제할 때는 긴장하고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그는 욕망을 억제한 게 아니기 때문에 긴장하지도 않고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습니다.


6년 간의 고행을 마치고 그는 유미죽을 얻어먹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6년간 수행하던 처소로 돌아가서 마지막 정진을 할지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가의 보리수 아래에서 정진하기로 했습니다. 마침 풀을 베고 있던 목동에게 풀 한 아름을 얻어서 보리수 아래에 깔고 동편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정진에 들어갔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한 수행의 자세

이것이 출가 후 고타마 싯다르타가 한 수행의 과정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첫째, 나태하게 욕망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출가할 때 이미 이것을 극복했습니다. 그러나 수행이란 각오하고 결심하고 긴장하고 애쓴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둘째, 긴장을 풀고 편안한 가운데 그러나 꾸준히 정진을 해나가야 합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고행의 극한까지 갔다가 고행이 깨달음을 얻는 방법이 아님을 알고 강도를 낮추어서 마침내 중도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은 고행의 근처에도 안 가보고 조금만 힘들면 ‘이건 고행이다. 부처님이 고행을 버리라고 하셨다’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합니다. 이렇게 안온함을 추구하는 것을 중도라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안일함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약간 고행처럼 느껴질 정도로 안온함을 벗어던지는 단호한 수행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안온함의 떼를 벗어던지는 과정에서 너무 긴장하거나 고행에 치우칠 때는 ‘긴장을 좀 풀어’ 하는 가르침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에 물들어 있으면서 조금만 힘들어도 ‘이건 고행이다. 부처님은 중도를 가르쳤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중도를 가장하여 나태해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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