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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Q&A 게시판

창의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무아)

작성자자연|작성시간24.04.04|조회수10 목록 댓글 0

창의성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저는 독립영화 연출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술인들이 그렇듯 예술인들에게는 공통적인 고민이 창의성의 문제입니다. 예술인들에게 창작은 숙명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매번 새로운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운 것을 꺼내야 하는데, 새로운 것을 꺼내는 제일 확실한 방법이 나를 찾는 것이라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그래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합니다. 불가에서는 무아론을 기점으로 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독특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절대적인 자아가 없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예술 작업 자체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합니다.”

“결혼하셨어요?”

“네.”

“그럼 아내가 질문자를 부를 때 뭐라고 불러요?”

“남편이라고 부릅니다.”

“그럼 아이는 질문자를 부를 때 뭐라고 불러요?”

“아빠라고 부릅니다.”


“질문자가 직장에 가면 직장에서 역할에 따라 감독이면 감독이라고 불리겠죠. 가게에 가면 손님이라고 불리죠. 만약에 교회나 절에 가면 신자라고 불리겠죠.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데 질문자가 학교에 가면 학부형이라고 불리겠죠. 그렇다면 자기라는 존재는 무엇일까요? 질문자는 아빠입니까, 남편입니까, 손님입니까, 학부형입니까?

그럴 때 질문자는 그 무엇도 아니에요. 그렇기 때문에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그 무엇이든 될 수가 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이라고 표현합니다. 불수자성(不守自性)은 스스로의 성품을 지키지 아니한다는 뜻입니다. 즉 ‘이것이다’ 하고 정해진 것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수연성(隨緣成)은 다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질 뿐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인연 맺으면 아빠, 이렇게 인연 맺으면 남편, 이렇게 인연 맺으면 학부형, 이렇게 인연 맺으면 손님이 될 뿐입니다. 여기 가면 감독, 저기 가면 신자, 이렇게 인연을 따라 이루어집니다. 내가 청소를 하면 청소부, 농사를 지으면 농사꾼, 감독을 하면 감독, 배우를 하면 배우가 되는 거예요. 나는 본래부터 배우가 아니에요. 이런 인연에서 배우라고 불리는 거죠. 나는 학부형이라고 정해진 것이 아니라 아이가 학교에 다니면 내가 학교에 갔을 때만 학부형이라고 불리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나는 배우다’ 하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생각이에요. 그 역할을 할 때에만 배우입니다. ‘스님이 농사를 짓는다’ 이 말도 정확하게는 맞지가 않습니다. 스님이라는 고정된 실체는 없습니다. 주로 스님이라는 역할을 많이 하면 ‘저 사람은 스님이다’ 하고 마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본인도 ‘내가 스님이다’ 하고 생각하게 되고요.


그런데 제가 아버지를 만나면 아버지한테는 제가 아들입니까, 스님입니까? 아들입니다. 이것을 헷갈려하면 충돌이 일어나는 거예요. 내가 스님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아버지라 하더라도 신자니까 누가 누구한테 절을 해야 돼요? 신자가 스님에게 절을 해야 합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신자가 스님한테 절을 하잖아요. 그런데 내가 아들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는 누가 누구한테 절을 해야 돼요? 내가 아버지한테 절을 해야 합니다. 제가 집에 가면 그 환경에서 아들 역할을 해야지 스님 역할을 하면 안 돼요. 아버지가 절에 오면 신자 역할을 해야지 아버지 역할을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처럼 아무리 질문자가 감독이라 하더라도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갔을 때는 그냥 학부형입니다. 거기서 감독 역할을 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것을 분간하지 못해서 충돌이 일어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즉 ‘무아’입니다. 그 무엇도 아니기에 인연을 따라서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도리를 알면 여러분들은 명배우가 될 수 있어요. 명배우가 되려면 ‘나’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기 때문에 깡패 역할을 맡으면 그냥 깡패가 될 수 있는 겁니다. 창녀 역할을 맡았다면 그냥 창녀가 되는 거예요. 농부 역할을 맡았다면 그냥 농부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농부 역할을 시키면 어색해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에요. ‘나’를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인연을 따라 몸을 못 나투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많은 경험을 할수록 훌륭한 연기자가 될 수 있습니다. 위대한 연기자가 되려면 무아의 상태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어진 대로 그 역할을 다 해낼 수가 있는 거예요. 물은 모양이 없지만 병에 넣으면 병 모양, 컵에 넣으면 컵 모양, 이렇게 유연하잖아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내부에 뭔가를 ‘이것이다’ 하고 움켜쥐고 있습니다. ‘나는 스님이다!’ 하면서 농사를 짓고, ‘나는 스님이다!’ 하면서 청소를 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든 청소를 하든 뭔가 어색한 거예요. 청소를 할 때는 그냥 청소부가 되고, 농사를 지을 때는 그냥 농사꾼이 되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습니다. ‘나는 무엇이다’ 하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우리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제가 어제 부탄을 나오면서 부탄 정부 관계자에게 ‘스님이라고 해서 특별한 대우를 하지 말아 달라’ 하고 요청을 했습니다. 외국에서 손님이 왔다고 하면 공항에서 빨리 통과를 시켜주는 경우가 많잖아요. 물론 제가 일행이 많아서 여럿이 갈 때는 제 역할이 스님이고 또 부탄 정부 입장에서는 손님에 해당하기 때문에 그때는 통과할 때 도움을 주어도 괜찮아요. 그런데 이번에 부탄을 나올 때는 제가 혼자서 나왔습니다. 혼자 다니는데 대우를 받을 필요가 하나도 없잖아요. 그냥 줄을 서야 하면 줄을 서면 되니까요. 일찍 통과시켜 주어서 탑승구 앞에 앉아 있으나, 줄을 서서 통과한 다음 탑승구 앞에 가나 결과는 똑같지 않나요? (웃음)


여러분들도 지방에 촬영하는 일이 있어서 방송국 차를 타고 빨리 이동하는 건 괜찮은데, 놀러 가면서 방송국 차를 타고 빨리 이동할 필요는 없잖아요. 놀러 갈 때는 기차를 타고 천천히 가면서 놀면 되잖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나는 무엇이다’ 하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대개 한번 유명해지고 나면 인생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내가 어떤 드라마에 출연해서 유명해진 것은 어제의 일입니다. 오늘의 일이 아니에요. 어제는 학교에 갔으니까 학부형이었지만, 오늘은 가게에 갔으니까 학부형이 아니고 손님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학부형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이런 어리석음을 반복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힘든 겁니다.

젊을 때 너무 일찍 유명해지거나 성공하면 인생이 불행해지는 이유가 늘 과거의 기억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에요. 어릴 때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잊지 못하고 늘 과거 속에 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젊을 때 일찍 유명해진 사람이 죽을 때까지 유명세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늘 과거를 그리워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과거를 그리워하며 사는 사람이 술 먹으면 하는 말이 ‘내가 왕년에는 말이야’입니다. 우리는 현재에 살지 못하고 과거에 살 때가 많습니다. 권위주의적인 행동도 다 꿈속에 살기 때문에 나오는 겁니다.


과거의 꿈속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바로 붓다가 말한 ‘무아’입니다. 고정된 실체는 없어요. 약이라는 실체도 없고, 독이라는 실체도 없습니다. 먹고 나으면 약이라고 하고, 먹고 죽으면 독이라고 하는 겁니다. 본래부터 이것은 약이고, 이것은 독이라고 고정된 실체는 없는데, 우리는 이것은 약이라고 하고, 이것은 독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독이라는 것도 조금만 먹으면 약이 되는 경우가 있고, 약이라는 것도 많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경우가 있는 거예요.

선악도 마찬가지입니다. 길 가는 사람을 때리면 폭행이 되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하는 사람이 일본 사람을 때리면 독립운동이 되는 겁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한 것도 한국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독립운동이지만, 일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자기 나라의 국무총리를 죽인 테러 행위입니다. 이렇게 정해진 게 없다는 무아의 본질을 꿰뚫어 알 때 우리는 훨씬 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창의적이라는 것도 결과주의적인 관점입니다. 창의적이라고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창의적인 것도 결국 모방을 바탕으로 해서 나옵니다. 그림을 그리거나 집을 지을 때 남의 것을 똑같이 모방을 하면 전통을 지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모방을 하다가 실수를 해서 조금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대에는 틀린 것이 됩니다. 하지만 천년쯤 지나면 창의적인 작품이 됩니다. 똑같은 작품도 기준을 전통에 두고 모방을 하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틀린 것이 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창의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모든 창의성은 틀린 데서 나옵니다. 실패했을 때 창의성이 나옵니다. 그러니 틀리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 실패를 해야 창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요즘 창조적인 사람들을 보면 약간 특이한 기질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일부러 모자라는 행동을 하지는 마세요. (웃음)

우등생은 모방의 가치에서 나온 겁니다. 창조적 관점에서는 어떤 것도 우열을 정할 수가 없어요. 오늘날 한국의 학교 교육은 모방 교육입니다. 오늘날 세계인들이 좋아하는 K팝이라고 하는 것도 서양의 클래식 음악을 기준으로 하면 저급한 음악입니다. 한국의 전통 음악을 기준으로 봐도 잘못된 음악입니다. 그러나 서양의 클래식 음악과 한국의 전통 음악이 믹스가 된 것이 많은 대중들의 호응을 받으니까 창조적이 된 겁니다.

창조적이 되기 위해서는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자기가 좋은 대로 하면 돼요. 자기가 좋은 대로 했는데 대중이 호응을 하면 창조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도 대중이 호응하지 않으면 창조적이라고 인정받지 못하는 거예요.

지금 평가가 좋은 것도 천년이 지나면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여러분이 추구하는 것은 돈벌이가 되느냐 아닙니까. 돈벌이가 되면 창조적인 것이 되는 것이고, 돈벌이가 안 되면 실패가 되는 거잖아요.


지금 제가 부탄에서 하는 사업은 지금을 기준으로 하면 아무도 호응을 안 하니까 실패로 평가가 되겠죠. 그러나 100년 후에 기후 위기 시대가 와서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게 되면 ‘스님은 100년을 내다보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이렇게 재평가가 될 겁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들이 조금 더 미래를 내다보며 살았으면 좋겠어요.

‘요즘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00년 정도 지나야 사람들이 내 작품을 이해할 것이다.’

이렇게 자신감을 갖고 살면 안 됩니까? 고흐의 그림도 100년이 지나서 사람들이 이해를 했잖아요.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미술가들도 당시에는 밥조차 제대로 못 먹었어요. 그런데 여러분은 너무 욕심이 많아요. 작품을 만들어서 지금 당장 유명해지고 싶어 해요. 그러려면 모방을 해야 합니다. 창조적이 되려면 10년이든 20년이든 대중의 인기에 연연하지 말아야 해요. 대중이 호응을 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 하더라도 ‘이건 우연이다’, ‘대중이 뭘 몰랐나 보다’, ‘재수가 좋았나 보다’ 이렇게 받아들여야 마음이 들뜨지 않습니다. 그래야 자신의 삶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 대중의 반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가 됩니다. 반응이 나쁘면 괴로워서 술 마시고, 반응이 좋으면 신이 나서 술 마시고, 이렇게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삶이 노예의 삶이지 어떻게 주인의 삶입니까. 저는 즉문즉설을 내 마음대로 하잖아요. 주위의 평가에 별로 연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을 조금 길게 보고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특히 예술을 하는 사람이 너무 당대에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려면 의사가 되거나 변호사가 되거나 사업가가 되어야죠. 예술을 하면서 자꾸 당대의 평가를 받겠다고 하는 것은 조금 안 맞지 않을까요? 그리고 대중이 원하는 것들이 워낙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평가를 받아봐야 그날뿐이고 자고 일어나면 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그런 평가는 일회성이지 진지하게 예술을 생각해서 나온 평가는 아니거든요.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 환경에서 자라서 불교에 대해 잘 모릅니다. 하지만 스님 말씀 중에 나라는 것이 없어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내용이 정말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연결해서 ‘그럼 내 영혼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나라고 하는 게 본래 없으니까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신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나라고 하는 게 본래 있다면 예수는 목수의 아들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신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나라고 하는 게 없기 때문에 고타마 싯다르타도 부처가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은 ‘한 끼 굶고 부처가 될래? 그냥 오늘 실컷 먹을래?’ 하고 물었을 때 대부분 실컷 먹고 자는 것을 선택합니다. 그래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 겁니다. 그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살라고 정해진 것은 없어요. 순간순간 본인이 선택한 결과로 지금의 모습이 된 겁니다.

화가 벌컥 날 때 ‘지금 화를 안 내면 부처가 될 수 있다’ 하고 알려줘도 화내는 걸 멈출 수 있을까요? 대부분이 ‘에이, 부처도 싫다. 그냥 성질대로 하겠다’ 이렇게 선택한 것이 쌓여서 이 자리에 온 겁니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순간순간 더 낫다고 판단해서 선택한 결과가 지금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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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과거에 너무 연연하지 마세요. 내가 산 정상에 오를 때 가파른 길을 올라왔든, 바위를 타고 올라왔든, 개울을 건너왔든, 뙤약볕을 지나왔든, 숲 속을 지나왔든, 올라갈 때는 다 힘들지만 정상에 올라서서 보면 평평한 길을 왔느냐, 가파른 길을 왔느냐 하는 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습니다. 10년 전 4월 2일 저녁에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가 지금 중요할까요? 지금 돌아보면 그날 아무것도 안 먹어도 괜찮고, 라면을 먹어도 괜찮고, 국수를 먹어도 괜찮고, 불고기를 먹어도 괜찮잖아요. 그때만 문제가 됩니다. 그때는 입맛의 차이가 있었지만 지나 놓고 되돌아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그 순간순간에 늘 빠져서 힘들어하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인생을 늘 웃고 사는 방법

제가 어제 트럭 뒤에 타고 두 시간을 갔는데, 덜컹거리는 트럭 뒤에 타고 가든, 편안한 앞자리에 타고 가든, 지금 돌아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어요. 오히려 트럭 뒤에 타고 가면 경치가 끝내줍니다. 앞자리에 타고 가면 시야가 가려서 창문으로 보이는 경치만 보이는데, 트럭 뒤에 타고 가면 전체 경치가 다 보입니다. 그러니 트럭 뒤에 타고 간다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게 아닙니다. 앞자리에 타면 자리가 조금 편할지 모르지만 경치를 마음껏 보지 못해요. 그리고 만약 차를 못 탔다면 무거운 짐을 들고 몇 십리를 걸어가야 하는데, 트럭 뒤에라도 태워주면 기분이 좋지 않을까요? 걸어가고 있다가 트럭에 타보면 엄청나게 기분이 좋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어릴 때는 동네에 트럭이 한 번 지나가면 꽁무니에 붙어 타고 가는 재미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때 운전기사가 위험하다고 차를 세우면 도망갔다가 트럭이 출발하면 또 쫓아가요. 왜냐하면 길 없는 길을 트럭이 다니니까 트럭이 가는 속도가 아이들이 뛰는 속도보다 느리기 때문입니다. 지금 저에게는 그런 경험이 외국 유학을 다녀온 것보다 더 유용합니다. 오지에 가면 다들 힘들어하기가 쉬운데 저는 어릴 적 경험 덕분에 아무 문제가 없어요. 어렸을 때 늘 걸어 다녔던 경험을 생각하면 트럭 뒤에라도 타고 가는 것이 얼마나 좋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침낭 속에서 잤는데, 호텔에서 자든, 침낭 속에서 자든, 지나 놓고 돌아보면 어느 것이 더 기억에 남을까요? 침낭 속에서 잔 것이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너무 한국에서만 계속 살게 되면 지옥처럼 느껴질 수가 있어요. 스님이 웃고 사는 이유는 이런 오지 여행 덕분입니다. 왜 미국이나 유럽으로 여행을 가려고 해요? 이런 오지에 가서 살아보면 그 당시에는 좀 힘들지만 그런 경험 덕분에 삶에 생기가 돕니다. 배우는 게 훨씬 많아지고, 생각할 것도 많아집니다.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는 인생

여러분은 일정이 바쁘고 할 일이 많아서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데, 저는 부탄 답사 일정을 끝내고 비행기 타고 돌아오는 길에도 ‘주민들의 집을 어떻게 고치지?’, ‘밭에 울타리를 어떻게 만들지?’ 하고 연구합니다. 현장에서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 지나 놓고 나면 갑자기 해결책이 떠오를 때가 있거든요. 저는 어릴 때 수학 문제를 풀다가 안 풀릴 때 화장실에 갔다가 갑자기 해결책이 생각나면 볼 일을 멈추고 나와서 문제를 풀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곰곰이 생각해 보다가 ‘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 하면 똥 누다가 나와서 다시 문제를 풀어보고 그랬어요.


인생을 자꾸 성과 위주로 생각하지 말고, 현재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내일 죽어도 후회가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억지로 힘들어하며 살다가 갑자기 내일 죽게 되면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경쟁에만 매몰되면 인생이 불행해집니다. 특히 방송, 문화, 예술, 연극과 관계된 직종에 종사하면 그렇게 되기가 쉬워요. 한두 명의 성공을 위해서 여러분 모두가 희생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 삶을 살지 말고 자기 인생을 소중하게 여기는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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