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신이라면
첫 페이지에 역사와 종교를
다음 페이지에 철학과 과학을 적고
스물네번째 페이지쯤에 음악과 시도 적겠지
그렇다면 나는 눈을 감고 거꾸로 책장을 넘기겠네
독재자의 동상 앞에서
예술가들을 추방한 철학자들과 춤을 추겠네
네가 신이라면 새들에겐 그림자
인간에겐 견딜 만한 추위와 허기를 주고
그들의 기쁨과 슬픔을 공깃돌처럼 가지고 놀겠지
나는 구멍난 공깃돌에서 흐르는
작은 슬픔을 엿보네
네가 신이라면
나는 네 두 눈 속에 오래 서 있는 동상
네 다리를 핥는 회갈색 눈의 개
너는 사랑하는 두 사람과 두 사람을 막아서는 나무들
무성한 나무들의 숲과 그 숲에
울려퍼지는 절규의 화음을 만들지
그것을 사람들은 음악이라 부르네
소년들은 커서 좀도둑이 되고
소녀들은 헐값에 신부가 되고
네가 신이라면 나는
무성한 나무숲을 돌지
포기를 모르는 들개처럼
네가 신이라면
너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하나의 귀
나는 밝은 대저택과 침침한 교회 앞에서
하인처럼 조아리는 두 개의 음악
트리에 온통 반짝이는 것은
심장처럼 매달린 전구들
나는 붉게 빛나는 허름한 구두 한 짝
하늘엔 비행기
땅에는 부드러운 털모자를 쓴 인간들
실밥은 터진 호주머니 사이로 흐르고
가난한 연인들은 사랑을 조각보처럼 기워서 입고 다니지
- 킬트, 그리고 퀼트 / 문학동네시인선 131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