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Φ ˚ 호 르 헤 。

강유원 강의 노트 12주차 (7일)

작성자백정|작성시간03.11.23|조회수562 목록 댓글 3
13. 제 7일

1. 파국적 결말

제 7일에 이르러 윌리엄과 아드소는 애타게 찾던 text를 찾게 된다. 그러나 text는 불에 타고 text를 보관하는 장서관도 불에 탄다. <<장미의 이름>> 속에서 장서관이 상징하는 세계 또한 불에 타 멸망에 이른다. 즉 제 7일에 이르러 세계는 catastrophe(대규모의 파국)을 향해 간다. 즉 제 7일은 <<장미의 이름>>의 파국적 완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파국이란 사태를 구성하는 모든 계기Moment 들이 한 구덩이 속으로 몰려 들어간 상태에서 터져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파국적 결말에 이르면 <<장미의 이름>>은 <끝>난다.

<끝>을 의미하는 단어는 end인데 end에는 <목적telos>이라는 의미도 있다(teleology는 목적론이라는 뜻이다). 언뜻 보기에 양자는 그다지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이 두 가지 의미가 한 단어 안에 녹아 들어가 있는 것은 end에 직선적 역사관이라는 형이상학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A를 향해 감’이라고 할 때 A는 우리가 목적지로 삼고 있는 것이다. 목적지에 이르면 여정은 끝이 나고 끝에 도달했을 때 목적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끝>과 <목적>은 같은 함축을 지닌다. 그런데 <끝>과 <목적>이 한 자리에 있기 위해서는 그 여정이 직선으로 되어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즉 서양적인 직선적 역사관이 있기에 가능하다. 원환적circular 사유체계를 지닌 동야에서는 <시작>과 <끝>이 없기 때문에 <끝>과 <목적> 역시 동일시 될 수 없다.

<<장미의 이름>>에서 수도원을 즉 세계를 파국적 결말로 치닫게 만드는 자는 곧 호르헤이다. 파국적 결말은 곧 파시스트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그렇지 않은 자들을 절멸(Vernichtung) 시키는 파시스트의 태도는 윌리엄이 지적하였듯이 ‘영혼의 교만, 미소를 모르는 신앙, 의혹의 여지가 없다고 믿는 진리’(p.873)로부터 나온다. 이처럼 ‘이념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남들도 죽인다.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 중국 문화혁명 시기의 약진운동, 한국 전쟁 등은 진리를 명분으로 내세운 채 개인의 증오를 만족시키고자 한 다른 예들이다. 호르헤와 같은 파시스트적인 작태가 오늘날 까지도 반복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정말로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울 수 없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p.897)이라고 지적하는 윌리엄의 말을 늘 염두해 두고 살아야 할 것이다.

2. Aristoteles의 <<시학>> 제 2권

수 많은 수도사들을 죽이면서까지도 호르헤가 감추려더 했던 책의 비밀이 윌리엄에 의해 드러난다. 호르헤가 이 책을 파기했다면 굳이 수도사들을 죽일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호르헤 역시 서책을 파기할 위인이 못되기 때문에 감추어둘 수밖에 없었다. 그 책은 바로 ‘세상이 소실되었다고 믿거나 아예 씌어지지도 않았다고 믿는 책 …… 어쩌면 이 세상에서 한 권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p.853) 호르헤의 소장품인 Aristoteles의 <<시학>> 제 2권이다. Aristoteles의 <<시학>>은 오늘날로 치면 연극에 관한 책이다. <<시학>>은 2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권은 비극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희극을 다루었다고 하는 2권을 Aristoteles가 썼는 지 쓰지 않았는 지 정확하지 않으나 AD 4세기 까지는 남아 있었다고도 한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1권 비극론 뿐이다.

<<시학>> 제 2권을 손에 넣은 윌리엄은 책에 묻어 있는 독에 중독되지 않기 위해 장갑을 낀 채 책을 읽어 나간다. ‘제 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 이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야기시킴으로써 카타르시스의 창출을 통해 이러한 감정을 씻어 내는 과정을 검토해 보았다. 이제 약속대로 희극을 풍자극, 광대극과 더불어 다루면서 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 보기로 하자’(pp.855-856)로 전개되는 이 대목은 유실된 혹은 아예 쓰여지지 않은 책의 서두를 Eco가 만든 것이다.

비극과 희극은 모두 카타르시스 즉 감정 정화를 불러 일으킨다. 이는 감정이 완전히 내 뿜어져서 개운해지는 상태이다. 여기서 Aristotels가 언급하는 비극이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안티고네> 등과 같은 것들이다. 이는 하나의 text인데 오늘날의 도덕적 판단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오이디푸스>에는 부친 살해와 근친상간 등 상상하기 조차 힘들 정도로 가장 극단적인 상황이 등장한다. <오이디푸스>를 보며 관객은 ‘정말 꼬일대로 꼬였구나, 불쌍하다’하는 생각과 ‘오이디푸스, 정말 나쁜 놈이군’하는 생각을 동시에 하며 갈등하게 된다. 그리고 오이디푸스가 파국적인 결말에 치달았을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이것이 곧 비극이 주는 연민과 공포에 의한 감정 정화이다. Aristoteles의 희극론은 이와 같은 그리스 비극의 감정 정화가 희극에서도 마찬가지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희극의 감정 정화 작용에 대해 서술한 이 책을 호르헤는 왜 그리도 숨기고자 했던 것일까? 이는 이 책의 저자 Aristoteles의 철학이 중세 철학에 있어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세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초월적인 신을 논증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신을 논증할 수 있을 법한 마땅한 이성적 도구가 없었다. 12세기가 되자 아랍 세계에서 보존되었던 Aristoteles의 고전들이 서양에 유입되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굳이 신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Aristoteles의 철학 만으로도 세계를 설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심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즉 Aristoteles는 중세 철학을 유지시켜주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중세 철학 체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역할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호르헤는 중세 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보에티우스가 Aristoteles의 철학을 극찬함으로써 ‘말씀의 신성한 신비는 범주와 삼단논법이라고 하는 인간적 패러디로 변형되었다(책에는 ‘하느님 말씀의 신성은 인간의 희문으로 변질되면서 삼단 논법의 희롱을 받아왔소’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틀린 번역이다)’(p.865)고 평한다. 호르헤는 Aristoteles를 이용해 신의 말씀을 논증하고자 하는 <<신학대전>>의 저자인 Thomas Aquinas와 같은 이의 업적을 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장미의 이름>>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중세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없이 가을로 접어들어가는 시대로서 도시의 발달로 수도원은 고립되어 가고 사상적으로도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기이다.

3. 윌리엄 VS 호르헤, 누가 승자인가?

윌리엄은 가설과 확증의 과정을 통해 확증 되지 않은 가설은 버리고 확증해가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브루넬로 에피소드와 같은 과정이다. <요한의 묵시록>으로 가설을 세웠던 윌리엄은 결국 호르헤가 실로스로 갔던 사실을 알아내고서 살인사건의 본질을 <요한의 묵시록>과 연관 시켰던 가설을 폐기한다. 그리고 살인사건이 <<시학>> 제 2권과 관련되었다는 확증에 이른다. 그리고 이를 호르헤에게 고백하면서 윌리엄과 호르헤 간의 한판 대결이 시작된다.

호르헤가 이겼다. 일단 말 싸움에서는 광분해서 먼저 소리 지르는 사람이 지게 되어 있다. 웃음에 관한 논쟁을 벌이다가 ‘이 영감아, 악마는 바로 당신이야!’(p.872)라며 먼저 소리를 지르는 사람은 결국 윌리엄이다. 윌리엄이 호르헤 보고 악마라고 소리를 질러도 호르헤는 전혀 동요하지 않으며 ‘내가 …… 말인가?’(p.872)라며 자신의 능청스러움을 한껏 뽐낼 뿐이다. <<장미의 이름>> 전체를 호르헤와 윌리엄의 싸움으로 본다면 결국 <<장미의 이름>>의 결론은 호르헤가 이겼다는 것이다. 물론 민중적 역사관을 취하는 이들은 불목하니들이 이겼다고 평할 것이다. 장서관이 불에 타든 옹기종기 모여다니며 눈에 발자국이나 찍는 불목하니들은 세계를 상징하는 장서관이 불에 타 무너진 후에도 여전히 살아 남기 때문이다.

호르헤가 이겼다고 볼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가설과 확증의 과정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끊임없이 자신이 세운 가설을 폐기시켜야 했던 윌리엄과 달리 호르헤가 세워 놓은 파국적 결말을 향한 각본은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그대로 이루어 진다. 윌리엄이 finis africae로 들어올 것 조차도 알고 있었으니 윌리엄과는 질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윌리엄이 얻고자 했던 text까지도 직접 먹어 치움으로써 자신의 승리에 쐐기를 박아 버린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던진다. ‘그대는 영리한 사람이오만, 남들을 앞질러 크게 영리한 것은 아니오’(862)라고.

멸망으로 치닫는 세계를 바라보며 윌리엄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한다. 윌리엄은 우주에 질서가 있음을 전제해야만 세울 수 있는 가설을 가지고 문제에 접근했지만 ‘우주에 질서가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p.899)했기 때문이다. ‘지붕에 올라가면 사다리는 치우는 법’(p.899)인데 말이다.(에크하르트에 의한 이야기이다. 서양과 동양 사상에는 이와 비슷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지붕 즉 진리에 이르기 위해 사다리라는 도구 즉 방법론을 사용하고 지붕에 이르면 방법론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주에 질서가 있음을 전제하고 진리로 올라간 후 진리에 이르기 위해 사용한 전제가 우주 안에는 없음을 확인하고 사다리를 치우라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 이는 참다운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참다운 진리는 어쩌면 방법론 까지도 모두 포함하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즉 윌리엄 수도사 역시 호르헤가 준비해 놓은 파국적 결말에 이른 것이다. 이로서 호르헤는 자신의 승리를 윌리엄으로부터 까지도 인정 받게 된다.

윌리엄은 그저 책 속에 스며 들어 있는 과거의 기억의 집적을 보존하고자 노력하던 탐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호르헤도 금서를 없애지 못할 정도로 책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이이니 결국 윌리엄은 호르헤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둘의 싸움에서 윌리엄이 패배를 인정하고 나서 <<장미의 이름>>의 세 번째 주인공 불목하니들이 나타나 대미를 장식하고 이로써 text와 context 그리고 세계는 모두 멸망하게 된다. 이 모든 것이 호르헤가 준비해 놓은 각본이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유라 | 작성시간 03.11.24 이렇게 보면 강유원박사의 글을 한데 붙여서 보고 싶은 생각도 드네요(후에 자료실에 모아서 게재할지). 장미와 에코에 대한 하나의 해석으로 시간을 두고 열심히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어제 서점에서 강유원이 헤겔의 법철학 서문을 번역한 책(사람생각)을 봤습니다. 임석진의 선행작업이 있다지만 아무튼 부지런하네요.
  • 작성자백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3.11.24 강유원 선생님이 졸업 논문으로 헤겔에 관해 쓰셨다고 했던거 같기도 하네요.
  • 작성자dndr | 작성시간 03.11.27 백정님! 글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이 원래 실려있다는 신기철님의 홈페이지를 일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배경지식 등 기타 내용도 읽고싶군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