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21 부안군수는 경찰에 의한 문화재파괴를 방관하고 있다![]()
사진1.2/강영웅 자료 부안군수는 경찰에 의한 문화재파괴를 방관하고 있다 정재철/백산고 교사 2003년 10월 6일에 향문대(부안향토문화대학)에서는 70여명의 학생들이 군청 울안에 있는 문화재 위에 전경대가 주둔하여 여기에 새겨진 조선시 대에 쓰여진 글자가 파괴되는 현장을 논의했다. 학생회장 박춘섭과 향문 대 학장 김형주 선생은 이른 9시 30분에 시정을 요구하러 군청을 방문했 다. 부군수 면담을 마치고 군수면담을 하고 시정요구서를 제출했다. 여 기에서 김형주 선생은 올 4월에 군청 직원 400여명에게 강의한 것을 기 억시키며 당시 군청 울안에 있는 문화재 보호를 강조했음을 얘기했다. 문화재를 보호하지 않은 채 경찰차가 그 위에 주둔하여 문화재를 파괴하 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니 시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군수는 경찰부대원의 즉각적인 철수에 대해서 '즉각'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 렵다고 하자, 그러면 문화재가 파괴되는데 서서히 철수해달라고 하겠느 냐고 강력하게 항의하고 돌아옴. 부안군수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 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사항임. 시정요구 사항에 대해서 부안군의 즉각 적인 조치와 보호조치가 없을시 문화재를 고의로 파괴하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항의한 당일 오후에도 이곳에서 전경들이 밥을 나누어 먹는 등 전혀 시 정하려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다. 10월 7일 사진을 찍으러 군청에 방문했 을 때 여전히 경찰차가 문화재 주변에 주차되어 있고 전혀 시정될 기미 가 보이지 않았다. 평화적인 집회에 수많은 경찰차를 보낸 정부의 처사 나 시정 요구를 받고서도 여전히 문화재 파괴를 시정치 않고 보호하지 않는 부안 군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1.봉래동천, 주림옥천의 명문은 부안의 옛 관아주변 문화유적의 유일한 유적이다. 2.1810년경 현감 박시수가 쓴 것으로 부안의 각종 군지류에 기록으로 남 아 있다. 3.봉래동천은 초서로 글자 하나의 크기가 2m에 이르는 초대형 문자임. 주림옥천은 예서로 쓴 미려한 명필이다. (이곳에 쓰여진 글은 서예 연구 의 귀중한 자료이며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4.1998년 군비 400여만원을 들여 흙 속에 묻힌 것을 발굴하여 "서림 공 원 주변 금석문 조사 보고서"를 낸바 있다. 5. 현재 전경차들이 글자가 새겨진 바위위로 지나다니고 주차장, 주둔지 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고 있음 부안 옛 관아앞(돌팍거리) 금석문 훼손 시정 요구서 평생을 우리고장의 문화와 유물, 유적을 사랑하고 아껴온 우리들은 옛 관아 앞(일명 돌팍거리)의 조상이 남긴 귀중한 문화유적인 금석문"봉래 동천(蓬萊洞天), 주림옥천(珠林玉泉)"이 전투경찰들의 주둔과 주차로 인 하여 크게 훼손되고 있음을 그대로 볼 수만 없어 아래 사항을 부안군 당 국에 강력히 요구하니 조속히 시정하여 부안의 문화재를 지켜주시기 바 랍니다. 1."봉래동천(蓬萊洞天), 주림옥천(珠林玉泉)"의 금석문자가 각자되어 있 는 돌팍거리 구역 내에서 모든 경찰부대원들의 즉각적인 철수와 일체의 주차행위를 금지하도록 하여줄 것. 2.위의 금석문자들의 안전한 보호를 위하여 각자된 그 주변에 보호담장 을 설치하여 줄 것. 3.그 현장에 이들 문화유적의 유래와 의미, 문화재적인 가치 등을 설명 하는 안내판을 설치하여 줄 것. 4.문화재적인 유물이나 유적 위에 주차장을 설치하는 부끄러운 일을 두 번 다시 하지 말 것. 서기 2003년 10월 6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 향토문화대학장 부안군 향토문화연구회장 김형주 부안군청 앞 -------------------------------------------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蓬萊洞天 묻혀있는 유물이나 사료들을 발굴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망실 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정 보존되어 있 는 유물이나 유적들의 보존조차도 부실한 곳이 많고 비록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지정문화재 외의 자료들에는 거의 눈 도 돌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부안의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안타깝게 하고 있 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안군청 뒤 옛 관아(官衙:오늘날의 군청 청 사) 앞 진석루(鎭石樓)가 있었던 반석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봉래동천(蓬萊洞天)”이라는 초대형의 초서(草書)와 그 아래 해서(楷 書)로 쓴 “주림(珠林)”, 그리고 예서(隸書)로 쓴 “옥천(玉泉)”의 여 덟 글자다. 서예를 하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물의 운치를 알고 조 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하나같이 천하의 명필이라고 찬탄하여 마지않는 이 글씨는 조선조 순조(純祖)때인 1810년에 부안의 현감(縣監) 오늘날의 군수으로 부임하여 1813년까지 근무했던 박시수(朴蓍壽)라는 분이 쓴 글씨다. 이분은 후에 참판(參判)에까지 오른 분인데 이 글씨에 대한 기록은 1932년에 간행된 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에 자세하게 밝 혀져 있는데 관사공해(館舍公力) 조의 진석루(鎭石樓)에 이르기를 “진 석루는 관아의 외삼문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다락의 아래 반 석위에는 참판(參判) 박시수(朴蓍壽)가 쓴 ‘주림옥천 봉래동천’의 여 덟 글자가 남아 있다(鎭石樓: 卽外三門在官衙前 今廢 樓下盤石上 參判 朴蓍壽書 珠林玉泉 蓬萊洞天 八字)”라 하였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두 자씩의 초서로 “蓬萊洞天”이라 썼는데 두 글자의 연장 길이가 가로 404㎝, 세로 523㎝에 이르고 글자 획의 평균 굵기는 15㎝쯤에 달하는 초 대형의 글씨로 이와 같은 대형의 명필글씨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 렵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씨로부터 남동쪽으로 20여m 쯤에 역시 그가 해서와 예서로 쓴 ‘珠林’과 ‘玉泉’ 네 글자가 조금 사이를 두고 각 자되어 있는데 글자의 크기는 각기 40㎝ 내외다. 아마도 서림(西林)의 샘물이 흘러내려 옥천(玉泉)을 이루니 선인(仙人)들이 사는 봉래동천이 아니겠느냐는 뜻이 아닌가 여겨진다. 봉래(蓬萊)라는 말이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중에서도 으뜸산 인 봉래산을 이름이요 이는 곧 변산을 지칭하는 말일 뿐만이 아니라 부 안의 별칭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천(洞天)이란 말 역시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로 둘러싸인 땅이라는 뜻으로 부안의 아름다움을 신선들의 세계 에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수년 전에 향토사를 연구한다는 어느 실없는 분이 이 글씨들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글씨라고 증언하여 < 서림공원금석문조사(西林公園金石文調査)를 할 때 혼란을 준 일이 있었 고 지금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있어 유감이다. 창암의 유수체 (流水體) 초서 한 폭도 구경조차 하여보지 못한 분의 엉터리 증언이 사 람들을 오도하고 있음이다. 이 보배로운 금석문(金石文)들이 지금 흙 속에 묻혀 있거나 그 글씨 위 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문화유산의 유린과 파괴행위가 이 지경에 이르 고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시급한대로 벽돌로 담장이라도 둘러쳐서 글자가 망가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 은 우리 고장의 정신문화적인 자산이요 자랑이며 관광의 큰 자원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이 글씨를 보기위하여 많은 외지인들이 이곳을 찾아온 다. 그리고는 실망감과 허탈감으로 돌아가면서 심한 경우 욕설까지 퍼붓 고 가는 사람을 뉘라서 탓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와 같은 서글픈 문화 풍토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한스럽고 불쌍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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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2/강영웅 자료
부안군수는 경찰에 의한 문화재파괴를 방관하고 있다
정재철/백산고 교사
2003년 10월 6일에 향문대(부안향토문화대학)에서는 70여명의 학생들이
군청 울안에 있는 문화재 위에 전경대가 주둔하여 여기에 새겨진 조선시
대에 쓰여진 글자가 파괴되는 현장을 논의했다. 학생회장 박춘섭과 향문
대 학장 김형주 선생은 이른 9시 30분에 시정을 요구하러 군청을 방문했
다. 부군수 면담을 마치고 군수면담을 하고 시정요구서를 제출했다. 여
기에서 김형주 선생은 올 4월에 군청 직원 400여명에게 강의한 것을 기
억시키며 당시 군청 울안에 있는 문화재 보호를 강조했음을 얘기했다.
문화재를 보호하지 않은 채 경찰차가 그 위에 주둔하여 문화재를 파괴하
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니 시정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여기에 대해서 군수는
경찰부대원의 즉각적인 철수에 대해서 '즉각'이라는 말을 받아들이기 어
렵다고 하자, 그러면 문화재가 파괴되는데 서서히 철수해달라고 하겠느
냐고 강력하게 항의하고 돌아옴. 부안군수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이 어
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사항임. 시정요구 사항에 대해서 부안군의 즉각
적인 조치와 보호조치가 없을시 문화재를 고의로 파괴하는 책임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항의한 당일 오후에도 이곳에서 전경들이 밥을 나누어 먹는 등 전혀 시
정하려는 자세가 보이지 않았다. 10월 7일 사진을 찍으러 군청에 방문했
을 때 여전히 경찰차가 문화재 주변에 주차되어 있고 전혀 시정될 기미
가 보이지 않았다. 평화적인 집회에 수많은 경찰차를 보낸 정부의 처사
나 시정 요구를 받고서도 여전히 문화재 파괴를 시정치 않고 보호하지
않는 부안 군수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1.봉래동천, 주림옥천의 명문은 부안의 옛 관아주변 문화유적의 유일한
유적이다.
2.1810년경 현감 박시수가 쓴 것으로 부안의 각종 군지류에 기록으로 남
아 있다.
3.봉래동천은 초서로 글자 하나의 크기가 2m에 이르는 초대형 문자임.
주림옥천은 예서로 쓴 미려한 명필이다. (이곳에 쓰여진 글은 서예 연구
의 귀중한 자료이며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다)
4.1998년 군비 400여만원을 들여 흙 속에 묻힌 것을 발굴하여 "서림 공
원 주변 금석문 조사 보고서"를 낸바 있다.
5. 현재 전경차들이 글자가 새겨진 바위위로 지나다니고 주차장, 주둔지
로 사용하면서 크게 훼손되고 있음
부안 옛 관아앞(돌팍거리) 금석문 훼손 시정 요구서
평생을 우리고장의 문화와 유물, 유적을 사랑하고 아껴온 우리들은 옛
관아 앞(일명 돌팍거리)의 조상이 남긴 귀중한 문화유적인 금석문"봉래
동천(蓬萊洞天), 주림옥천(珠林玉泉)"이 전투경찰들의 주둔과 주차로 인
하여 크게 훼손되고 있음을 그대로 볼 수만 없어 아래 사항을 부안군 당
국에 강력히 요구하니 조속히 시정하여 부안의 문화재를 지켜주시기 바
랍니다.
1."봉래동천(蓬萊洞天), 주림옥천(珠林玉泉)"의 금석문자가 각자되어 있
는 돌팍거리 구역 내에서 모든 경찰부대원들의 즉각적인 철수와 일체의
주차행위를 금지하도록 하여줄 것.
2.위의 금석문자들의 안전한 보호를 위하여 각자된 그 주변에 보호담장
을 설치하여 줄 것.
3.그 현장에 이들 문화유적의 유래와 의미, 문화재적인 가치 등을 설명
하는 안내판을 설치하여 줄 것.
4.문화재적인 유물이나 유적 위에 주차장을 설치하는 부끄러운 일을 두
번 다시 하지 말 것.
서기 2003년 10월 6일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부안 향토문화대학장
부안군 향토문화연구회장 김형주
부안군청 앞
-------------------------------------------
김형주의 부안이야기
蓬萊洞天
묻혀있는 유물이나 사료들을 발굴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 사실이다 망실
되기 쉽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지정 보존되어 있
는 유물이나 유적들의 보존조차도 부실한 곳이 많고 비록 지정은 되지
않았지만 문화재적 가치가 충분한 지정문화재 외의 자료들에는 거의 눈
도 돌리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부안의 이러한 몇 가지 사례들 중에서도 우리를 가장 안타깝게 하고 있
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부안군청 뒤 옛 관아(官衙:오늘날의 군청 청
사) 앞 진석루(鎭石樓)가 있었던 반석위에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쓴
“봉래동천(蓬萊洞天)”이라는 초대형의 초서(草書)와 그 아래 해서(楷
書)로 쓴 “주림(珠林)”, 그리고 예서(隸書)로 쓴 “옥천(玉泉)”의 여
덟 글자다. 서예를 하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물의 운치를 알고 조
금이라도 교양이 있는 사람이면 하나같이 천하의 명필이라고 찬탄하여
마지않는 이 글씨는 조선조 순조(純祖)때인 1810년에 부안의 현감(縣監)
오늘날의 군수으로 부임하여 1813년까지 근무했던 박시수(朴蓍壽)라는
분이 쓴 글씨다. 이분은 후에 참판(參判)에까지 오른 분인데 이 글씨에
대한 기록은 1932년에 간행된 군지 <부풍승람(扶風勝覽)>에 자세하게 밝
혀져 있는데 관사공해(館舍公力) 조의 진석루(鎭石樓)에 이르기를 “진
석루는 관아의 외삼문 앞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다락의 아래 반
석위에는 참판(參判) 박시수(朴蓍壽)가 쓴 ‘주림옥천 봉래동천’의 여
덟 글자가 남아 있다(鎭石樓: 卽外三門在官衙前 今廢 樓下盤石上 參判
朴蓍壽書 珠林玉泉 蓬萊洞天 八字)”라 하였다. 우측에서 좌측으로 두
자씩의 초서로 “蓬萊洞天”이라 썼는데 두 글자의 연장 길이가 가로
404㎝, 세로 523㎝에 이르고 글자 획의 평균 굵기는 15㎝쯤에 달하는 초
대형의 글씨로 이와 같은 대형의 명필글씨는 전국적으로도 찾아보기 어
렵다고 한다. 그리고 이 글씨로부터 남동쪽으로 20여m 쯤에 역시 그가
해서와 예서로 쓴 ‘珠林’과 ‘玉泉’ 네 글자가 조금 사이를 두고 각
자되어 있는데 글자의 크기는 각기 40㎝ 내외다. 아마도 서림(西林)의
샘물이 흘러내려 옥천(玉泉)을 이루니 선인(仙人)들이 사는 봉래동천이
아니겠느냐는 뜻이 아닌가 여겨진다.
봉래(蓬萊)라는 말이 신선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 중에서도 으뜸산
인 봉래산을 이름이요 이는 곧 변산을 지칭하는 말일 뿐만이 아니라 부
안의 별칭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천(洞天)이란 말 역시 아름다운 산과
맑은 물로 둘러싸인 땅이라는 뜻으로 부안의 아름다움을 신선들의 세계
에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수년 전에 향토사를 연구한다는 어느 실없는
분이 이 글씨들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이 쓴 글씨라고 증언하여 <
서림공원금석문조사(西林公園金石文調査)를 할 때 혼란을 준 일이 있었
고 지금도 그렇게 잘못 알고 있는 분들이 있어 유감이다. 창암의 유수체
(流水體) 초서 한 폭도 구경조차 하여보지 못한 분의 엉터리 증언이 사
람들을 오도하고 있음이다.
이 보배로운 금석문(金石文)들이 지금 흙 속에 묻혀 있거나 그 글씨 위
가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문화유산의 유린과 파괴행위가 이 지경에 이르
고 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시급한대로 벽돌로 담장이라도
둘러쳐서 글자가 망가지는 것부터 막아야 한다.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
은 우리 고장의 정신문화적인 자산이요 자랑이며 관광의 큰 자원임은 말
할 것도 없다. 이 글씨를 보기위하여 많은 외지인들이 이곳을 찾아온
다. 그리고는 실망감과 허탈감으로 돌아가면서 심한 경우 욕설까지 퍼붓
고 가는 사람을 뉘라서 탓할 수 있겠는가. 다만 이와 같은 서글픈 문화
풍토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한스럽고 불쌍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