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 선교양종 통합(세종) 흥천사, 흥덕사 위치
선교통합 수찰-흥천사
교정통합 수찰-흥덕사
흥천사-
원래 지금 덕수궁 자리에 태조 이성계가 세운 것이다. 선덕왕후 강씨의 무덤과 함께.
태종 이방원은 큰엄마(선덕왕후 강씨) 묘와 절이 코앞에 있는 것이 싫어서 돈암동 밖으로 내쫒았다. 그것이 정릉이고, 돈암동 흥천사이다.
돈암동 흥천사는 오랫동안 신흥사로 불리웠고, 얼마전 까지도 신흥사라고 했다.
(내 중학교때 이모할머니께서 돈암동 신흥사 밑에 점집 무당집에 많이 다니셨다.
돈암동 신흥사로는 애들이 소풍도 갔다)
그런데 이걸 최근에 고증을 거친답시고 흥천사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흥덕사는
원래 고증에 보면 연희방이라고 해서, 연희동 신촌 근처라고 보는데 정확한 자리는 모른다. 원래 태상왕 태조가 살던 집인데,왕위를 아들 태종에게 물려주면서(태종 1년) 절로 만들었다. 나중에 세종때 그것이 교종 본찰이 된다. 그 후, 연산군이 그것을 아예 없애버렸다고 한다.
기록에는 그렇게 되어있다.
그런데, 이렇게 주장하는 흥덕사 위치가 혜화동 보성고등학교(서울과고) 옆에도 있다.
서울시에서 마련한 팻말도 있다. 그러니, 아직 흥덕사 위치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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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무리>
서동철 기자의 문화유산 이야기] 세조가 세운 ‘깨달음의 사찰’… 연산군 땐 기생 관리 장소로 입력 : 2016-04-22 17:42 ㅣ 수정 : 2016-04-23 00:48폰트 확대 폰트 축소 프린트하기
한양 도성의 마지막 사찰 원각사
한양은 유교를 국시로 내세운 조선의 계획도시였으므로 고려시대 절이 남아 있었다고 해도 훼철됐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1000년이 넘은 불교국가의 전통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 없었고, 불덕(佛德)에 의지하는 분위기는 왕실이 더욱 짙었다. 태조는 도성 안 세 곳에 사찰을 세웠다. 곧 흥천사, 흥덕사, 흥복사다.
태조가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을 덕수궁 터에 만들고, 명복을 비는 원찰로 세운 것이 흥천사다.
그런데 태종이 배다른 어머니의 무덤을 도성 밖 오늘날의 돈암동 고개 너머로 옮겼으니 흥천사도 돈암동에 다시 터를 잡아야 했다.
흥덕사는 ‘태상왕이 새 전각을 희사하여 사찰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에 지은 절이다.
흥복사는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다. 세조는 흥복사를 넓혀 원각사를 건립하고 불경을 간행하는 등 불교의 거점으로 삼았다. 원각사의 흔적은 지금도 국보 제2호 십층석탑과 대원각사비(大圓覺寺碑)로 남아 있다.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라는 탑골공원은 3·1운동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세조는 불교대호왕(佛敎大護王)으로 불릴 만큼 조선왕조에서는 전무후무한 불교 후원자였다. 그가 불교중흥에 힘쓴 것은 흔히 조카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업보(業報)를 씻기 위해서라고 한다. 하지만 어린 단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권을 제약할 만큼 성장한 신흥사대부를 견제하겠다는 목적이었다는 시각도 없지 않다.
실제로 도성 한복판에, 그것도 주변 어디서나 바라보이는 12m 불탑이 세조 13년(1467년) 완성됐을 때 유신(儒臣)들의 굴욕감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시기, 석탑의 8층 이상이 땅바닥에 끌어내려진 것도 그 불쾌감의 일단을 보여 준다. 십층석탑은 1946년 미군공병대의 크레인을 동원하고서야 제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런 분위기였던 만큼 세조는 원각사를 창건하고자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실록에는 일종의 창건설화마저 등장한다.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베풀자, 여래가 나타나고 신(神)의 음료라고 할 감로(甘露)가 내렸다. 황색 가사를 입은 신승(神僧) 3인이 나타나니 밝은 빛이 일어나고, 채색 안개가 공중에 가득 찼으며, 부처님의 사리가 저절로 늘어나는 분신(分身)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세조는 ‘이처럼 기이하도록 상서로운 일은 좀처럼 만나기 어려우므로 홍복사를 다시 세워 원각사를 삼고자 한다’고 했다. 원각(圓覺)이란 깨달음의 다른 말이다. 회암사에서 원각법회가 계획됐을 때부터 세조는 도성에 새로 지을 거대 사찰의 성격과 구체적인 이름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흥복사는 세종시대까지도 왕실의 불사가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세조는 원각사 조성의 명을 내린 이튿날 흥복사에 거둥했는데 왕세자와 효령대군, 임영대군, 영응대군, 영순군 같은 왕실의 핵심 인사들이 앞장선 가운데 영의정 신숙주와 좌의정 구치관, 병조판서 윤자운을 비롯한 관리들을 대동한다. 못마땅한 신하도 없지 않았겠지만, 불만을 공개적으로 토로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세조는 앞서 회암사의 법회에서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했을 때부터 대사면령을 내리며 민심을 자기편으로 이끌었다. 이후에도 13차례에 걸쳐 상서로운 조화가 있었다며 사면령을 내리거나 관계자를 포상했다. 원각사를 인간의 뜻이 아니라, 신의 뜻에 따라 새로 짓는 것으로 뇌리에 각인시키겠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십층석탑의 몸돌에는 ‘서유기’가 새겨져 있다. 삼장법사가 경전을 구하고자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서울신문 DB 클릭하시면 원본 보기가 가능합니다.
▲ 십층석탑의 몸돌에는 ‘서유기’가 새겨져 있다. 삼장법사가 경전을 구하고자 서역으로 떠나는 장면이다.
서울신문 DB
●사림정치 기반 공고해지면서 사찰 명맥 끊겨
하지만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마저 재위 14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 데 이어 13세에 불과한 성종이 즉위하자 사정은 달라졌다. 사림정치의 기반이 공고해지면서 성종 5년(1474) 원각사의 백옥불상은 회암사로 옮겨지고 승려들도 퇴출된다.
연산군은 즉위 10년(1504) ‘흥덕사를 원각사로 옮기게 하라’고 전교한다. 이듬해 장악원(掌樂院)을 원각사로 옮기도록 했다. 사찰로서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던 흥덕사와 원각사의 기능도 이때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예악(禮樂)을 관장하던 장악원의 기능도 기생과 악사를 관리하는 기관으로 전락했다.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사대부가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국가로 만들겠다며 도학정치를 부르짖던 중종시대 원각사터는 집터로 팔려나갔다. 반정으로 중종이 집권한 직후 원각사 건물은 한동안 한성부 관아로 쓰이기도 했다. 이후 명종시대 잇따라 큰불이 나고,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원각사터는 빈터로 남게 된다. 원각사의 역사를 살펴봤을 때 오늘날까지 십층석탑과 탑비가 남아 있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출처: 서울신문에서 제공하는 기사입니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0423016005#csidx7814589e8dc23218a6b698db523eb7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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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사(興德寺)
불교유적 서울 동쪽 연희방(燕喜坊)에 있었던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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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불교유형유적시대조선성격절, 사찰건립시기1401년(태종 연간)소재지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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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동쪽 연희방(燕喜坊)에 있었던 절.
키워드
태조
태종
교종도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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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자세한 위치는 미상이다. 1401년(태종 1) 여름에 태상왕(太上王) 태조가 예전에 살던 집 동쪽에 터를 정하여 이 절을 창건하게 하였다. 태조는 이 절을 지어 대대로 나라를 복되게 하며, 위로는 선조를 복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이롭게 하여, 종묘사직이 영구히 견고하고 왕실의 계통이 끊이지 않도록 하고자 하였다.
이 절의 정전(正殿)에는 석가모니의 출산(出山)하는 그림을 걸고, 북쪽의 상인방(上引枋) 위에는 시렁을 만들어서 가운데는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1부를 봉안하고 동쪽에는 새로 새긴 대자능엄경(大字楞嚴經)의 판본을 두었으며, 서쪽에는 새로 새긴 『수륙의문(水陸儀文)』 의 판본을 간직하였다. 또, 정전 좌우에 집을 지어 참선과 강론에 편리하게 하였고, 네모진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1424년(세종 6) 나라에서 이전의 7종을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으로 통합시켰을 때 이 절은 교종의 도회소(都會所, 總本寺)가 되었으나 연산군 때 폐사가 되었다.
영역닫기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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