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세 강미자 할머니의 인생
저는 이제 서울의 삭막한 아파트를 떠나, 동해의 작은 도시 속초에서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살고 있는 78살 강미자라고 합니다.
남들은 아들 잘 키워 호강만 남았다고 했지만, 제 삶은 호강이 아닌 지옥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더는 참을 수 없어, 제 인생의 마지막 반란을 시작했습니다.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독한 할머니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에 처음부터 독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남편을 일찍 여의고 시장 한구석에서 반찬가게를 하며 악착같이 아들 하나를 키워냈습니다.
그 아들이 장가를 가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가 태어났을 때, 저는 한 지붕 아래 북적이며 사는 것이, 세상 가장 큰 행복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아니 행복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살았죠.
제 하루는 새벽 5시, 지긋지긋한 이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잠이 부족해, 깨질 듯 한 머리를 부여잡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유기농이 아니면 입에도 대지 않는 까다로운 손녀 세아의 도시락을 싸는 일이었습니다.
현미밥에 어젯밤 미리 재워둔 한우 장조림, 살짝 데친 유기농 브로콜리.
행여나 귀한 손녀가 탈이라도 날까, 제 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수십 배는 더 신경을 썼습니다.
그다음은 아침 식사 준비, 빵을 좋아하는 며느리를 위해 토스트를 굽고, 밥을 고집하는 아들을 위해 국을 데웁니다.
그들이 식탁에 앉을 때쯤이면, 저는 이미 세탁기 2대를 돌리고 난 후였습니다.
색깔 옷과 흰옷은 기본, 며느리는 자신의 실크 블라우스와 남편의 와이셔츠는 반드시 손빨래를 따로 하라고 신신 당부를 했으니까요.
그들의 옷감이 상하는 것은 세상이 무너질 일이고, 제 손목이 너덜너덜해지는 것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모두가 집을 나선 뒤에는 청소가 시작됩니다.
구석구석 먼지를 닦고, 오후 5시까지는 제 유일한 수입원인 단골 주문 반찬을 만들어 배달까지 마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쉴 틈도 없이, 다시 저녁 식사 준비가 저를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루가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터였습니다.
물론 처음 몇 년은 괜찮았습니다.
손녀가 제 품에 와락 안기며, "할머니, 할머니가 해준 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어요.“라고 말해줄 때마다, 고단했던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이 가족에게 꼭 필요한 존재구나, 그런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그 온기는 그리 길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며느리 지연이가 저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월급 주는 사장이 직원을 대하듯 서늘하고 딱딱하게~
"어머니, 청소는 구석구석 다하셨어요? 오늘 제 손님들 오기로 했으니까, 먼지 하나 없게 신경 좀 써주세요."
"어머니, 저녁은 정확히 6시 반에 차려 주셔야 해요.
세아 학원 끝나고 오는 시간이랑 딱 맞춰야 하거든요.
정확히 6시 반입니다.“
그 정확히 라는 단어에는 단 1분이라도 어긋나면 안 된다는 차가운 명령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잠시 낡은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며느리는 보란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침부터 드라마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데요. 볼륨 좀 줄여주세요. 아~ 진짜 머리 아파!"
새벽부터 뼈가 부서져라 일하고, 잠시 갖는 그 짧은 휴식마저, 소음 취급을 당하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 집에서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나는 이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존재하는, 소리 없는 가구 같은 존재구나.”
저는 그 집의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월급 없는 가정부, 아니 그보다 못한 존재였습니다.
그 사실을 뼈저리게 확인하게 된 건, 어느 겨울날이었습니다.
지독한 감기몸살로 온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르던 날이었습니다.
평생을 쪼그려 앉아 일하느라 망가진 무릎까지 욱신거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끙끙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그때 며느리가 방문을 빼 꼼 열고는 말했습니다.
"어머니, 아프신 건 알겠는데, 저녁 준비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세아 먹을 간단한 죽이라도 끓여주실 수 있으시죠?"
체온계는 39도를 가리키고, 숨을 쉴 때마다 폐가 찢어질 듯 아픈데, 며느리가 걱정하는 것은 시어머니 건강이 아니라 오직 저녁밥이었습니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아~, 이 집에서 나는 아파도 되는 사람이 아니구나."
결국 수십 년간 저를 괴롭혀 왔던 무릎이 더는 버티지 못하고 탈이 나고야 말았습니다.
의사는 닳아버린 연골을 인공관절로 교체해야 한다고, 더 미루면 평생 휠체어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들 민혁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민혁아~ 엄마가 무릎 수술을 해야 한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아들의 첫마디는, 제 가슴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흉터로 남았습니다.
"수술이요? 비용은 얼마나 나온대요?
입원은 며칠이나 해야 하고요?"
일주일 정도 입원해야 한다는 제 말에, 아들은 깊은 한숨과 함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아~ 그럼 그동안 집안일은 어떡하죠?
지연이 혼자서는 절대 못 할 텐데...”
쿵 하고 무거운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습니다.
평생 저를 위해 희생한 늙은 어머니가 수술대에 오른다는데, 아들이 가장 먼저 걱정하는 것은 돈과 집안일이었습니다.
제 건강, 제 고통은 이미 그의 걱정 목록에 없었습니다.
수술 당일 저는 결국 혼자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헐렁한 수술복으로 갈아입고, 차가운 수술실 앞에서 순서를 기다리는데, 젊은 간호사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물었습니다.
"할머니, 보호자 분은 아직 안 오셨어요?"
"아~ 다들 바빠서 못 왔어요. 괜찮아.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도 뜨거운 눈물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78 평생, 가장 두렵고 무서운 순간을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서러웠습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도, 텅 빈 병실에 혼자였습니다.
찢어질 듯한 통증보다, 물 한 모금 달라고 말할 사람 하나 없다는 외로움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퇴원하던 날, 아직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에서 저를 맞이한 며느리가 던진 첫마디를, 저는 평생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 수술은 잘되셨어요?
저희가 너무 바빠서 가보지도 못했네요.
그런데 내일부터 집안일은 가능하신 거죠?”
그 순간, 제 안에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지연아, 의사가 한 달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네? 한 달 동안이요?
그럼, 저희는 어떻게 해요?
가사 도우미라도 불러야 하나?
안 그래도 돈 들어갈 곳도 많은데"
시어머니의 수술비보다, 한 달짜리 파출부 비용이 더 아깝다는 그 말을 들으며 ”아~ 나는 정말, 이 집에서 돈 한 푼 받지 않는 무료 가정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되었습니다.
잠결에 화장실을 가려다 거실에서 들려오는 아들 내외의 소근거림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여보. 솔직히 어머니 때문에 우리 생활이 너무 불편하지 않아? 사는 게 너무 빡빡해" 며느리의 그 한마디에, 제 발은 바닥에 얼어붙은 듯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친구들 한 번 마음 편히 부르지도 못하겠고, 우리끼리 외식 한 번 하려고 해도 눈치 보이고, 이제 무릎도 저러시니, 앞으로 병원비는 또 얼마나 들겠어?
우리 노후 준비도 해야 하는데, 요즘 시설 좋은 요양원도 많다던데, 실버타운 같은 곳 한 번 진지하게 알아볼까?”
‘요양원’ 그 세 글자가 제 심장에 비수처럼 날아와 박혔습니다.
아프기 시작하자,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으니, 내다 버릴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이 가족을 위해 제 청춘과 건강, 모든 것을 바쳤는데, 저는 그들의 자유를 방해하는, 치워버려야 할 짐이었던 겁니다.
바로 그다음 주였습니다.
아들이 유난히 밝은 표정으로 제게 말했습니다.
"엄마, 저희 이번 주말에 일본으로 온천 여행 가려고요. 3박 4일 정도로요."
저는 마지막 남은 희망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같이 가는 거니?"
"에이, 엄마는 수술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집에서 편히 쉬고 계세요.
저희끼리 다녀오는 '가족 여행'이에요.”
'가족 여행' 그 두 단어가 제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