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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깨달음

색즉 시공 공즉 시공

작성자순례자|작성시간11.12.09|조회수758 목록 댓글 1

대승불교 경전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어 널리 알려진 말이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생식 역부여시]’ 중 한 경구이다. 한자(漢字) 그대로를 풀이한 뜻은 다음과 같다. 공(空)이 색(色)과 다르지 아니하며 색 또한 공과 다르지 아니하니, 색인 것이 곧 공이요 공인 것이 곧 색인 것이다.

 

[편집] 1.색(色)

형태가 있는 것, 대상(對象)을 형성하는 물질적인 것, 넓게는 대상 전반을 의미한다. ‘나’에서부터 ‘우주 대법계’ 모두를 가리키는 말이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 뒤에 ‘수상행식 역부여시 (受想行識 亦復如是) : 수상행식 또한 이와 같다’ 라는 말이 따라 오기 때문에 여기서의 색(色)은 색․수․상․행․식의 오온을 대표하는 의미의 색(色)이다.


[편집] 2.공(空)


[편집] 1)용어의 유래

대승불교(마하야나) 교리의 최초의 해석가는 불교의 조사(祖師)가온데에서도 가장 심오한 사상가의 한사람은 1C의 아슈바고샤(Ashvaghosha, 馬祖 마조)이다. 그는 《대승기신론》에서 대승불교의 근본 사상, 특히 불가의 ‘타타타(tathata)' 즉, ‘진여(眞如)’의 개념과 관련된 사상을 명확하게 설명했다. 아슈바고샤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은 나가르주나(Nagarjuna, 龍樹, 용수)는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들이 지닌 한계를 보여 주기 위해 대화법을 사용했다. 그는 명석한 논증으로 당시의 형이상학적 명제를 뒤엎고 궁극적으로 실재는 개념이나 관념으로 파악될 수 없음을 널리 보여주었다. 이것을 ‘수냐타(sunyata)’ 즉, ‘공(emptiness,空)’ 이라는 명명하였다.

[편집] 2)불교에서의 공(空)의 의미


[편집] (1)비어있는 것[空性, sūnyata]

공(空)은 불교경전이나 논서에서 여러 가지로 설명되는데 일차적인 뜻은 ‘비었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상대적인 개념이다. 존재에 대해서는 무(無)를 뜻하며 작용(作用)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는 것을 공이라고 한다는 뜻이다.

•아공(我空)과 법공(法空)

불교에서는 만물의 존재 원리는 연기법에 의한다고 본다. 남편과 아내를 정의 할 때, 남편이 무엇인지 말하지 않고서 아내를 정의할 수는 없다. 이와같이 스스로의 성질만으로 자신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을 불교에서는 자성이 없다고 한다[無自性]. 자성이 없다는 것은 실체(實體)가 없다는 뜻이고, 실체가 없다면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이다. [※여기서의 실재는 누가 언제 어떻게 보아도 변함없는 성질을 가지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를 뜻한다.‘나’와 ‘너’의 관계도 인식의 주체인 ‘나’와 인식의 대상인 ‘너’로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다. 인식의 주체 없이 인식의 대상을 생각할 수는 없다. ‘나’와 ‘너’모두 자성이 없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나’에게 고정된 자성이 없으므로 ‘아’가 없다는 뜻에서 無我라고 하며 我空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나’가 없으면 ‘너’라는 것도 없어야 한다. ‘나’아닌 나머지 세계도 인식의 대상이므로 자성이 없고, 그러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불교에서는 제법무아(諸法無我)라고 하며 ‘나’아닌 나머지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법공(法空)’이라고 한다.

[편집] (2)중도(中道) [즉 眞我 : 전체로서의 하나]

힌두교에서는 아트만(Ātman)이라는 상주불멸의 실재(實在)가 있다고 본다. 이것을 상주론(常住論)이라 한다. 물질인 우리 몸이 썩어져 없어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유물론자의 견해를 불교에서는 단멸론이라고 한다. 불교는 상주론과 단멸론을 극단에 치우쳐 진실의 일면만 판단한 것으로 간주하고, 양 극단을 넘어선 중도의 바른 견해가 ‘공’이라고 본다. 이 때의 ‘공’은 비었다는 일차적 뜻이 아니라 ‘바른 견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편집] (3)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眞空妙有]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란 생멸(生滅)하는 현상계를 벗어난 사물의 실상을 나타내는 말로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상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갖다 붙인 이름이다. 불교에서의 ‘아공’이니 ‘법공’이니 라는 표현은 ‘공’은 일차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음을 비었다는 뜻으로 나타낸 것이지 ‘아’와 ‘법’으로 나누기 전의 그 무엇인가를 비었다라고 보는 것은 아니다. 아’와 ‘법’으로 나누기 전의 그 무엇을 ‘전체로서의 하나’로 표현한다면, '전체로서의 하나' 조차도 불교에서는 ‘공’ 이라 부르지만 이때의 '공'은 비었다는 뜻이 아니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묘한 것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 . 실재의 본질적인 성질이 공(空)이라는 것은 허무주의적 진술과는 다르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마음이 낳은 실재에 관한 모든 개념이 공허할 뿐이라는 것이지, 실재, 즉 공(空) 자체는 단순한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근원이요, 모든 형태의 본질이다. 이는 《대승기신론》의 ‘진여(眞如)’에 해당하는 것이다.


[편집] 3)유사개념


[편집] (1)힌두교의 마야(maya)[1]

수세기를 내려오면서 그 의미를 바꾸어 왔다. 애초엔 신성한 행위자의 '권능'이나 '힘'이었던 것이 나중엔 마술이 걸려있는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뜻하게 되었다. 힌두교의 자연관에서 만상(萬相)은 상대적이고 유동하고 영원히 변하는 마야이며, 위대한 마술사(브라만)의 신성한 유희[릴라,lila] 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릴라'는 율동적이고 힘찬 유희이기 때문에 이 마야의 세계는 부단히 변화한다. 마야는 단순히 이 세계가 환상이란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형상들과 구조들, 사물들과 사건들이 우리의 ‘마음이 낳은 개념’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자연의 실재라고 생각한다면, 마야의 주술에 걸려있는 것이 된다. 마야는 이러한 개념을 실재로 간주하는, 지도를 영토로 혼동하는 환상인 것이다. 힌두교에는 마야의 주술에서 해방되어 우리가 우리의 감각으로 인지하는 모든 현상이 다 같은 실재의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체험을 ‘모크샤(moksha)' '해탈’이라 부르며, 이를 추구한다.


[편집] (2)노자의 도(道)[2]

중국철학은 인생과 정치문제에 비교적 관심을 가져왔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토론은 항상 윤리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 졌으며, 사상범위는 일부 격식에 얽매인 한계가 있었다. 노자철학의 특이한 점은 이러한 한계를 확대시켜 사고의 범위를 인생에서 전체 우주로 확장시켰다는 데 있다.

‘도(道)’는 노자 철학에서 핵심이 되는 관념이다. 그의 모든 철학 계통은 그가 미리 만든 ‘도’에서 전개된 것이다. 《노자》에서 사용된 모든 ‘도’는 부호형식은 같지만, 각기 다른 문장의 맥락에서 다른 함의를 가지고 있다. 당군의(唐君毅)는 《중국철학원론》에서 노자의 도(道)를 여섯 가지 의미로 세분화하기도 했다. ①처리의도(處理之道), ②형이상의 도체(形上之道), ③도상의 도(道上之道), ④동덕지도(同德之道), ⑤수덕지도(修德之道), ⑥생활의도(生活之道)로서, 사물과 마음이 인격상태의 도가 되었다. 불교의 ‘공(空)’ 사상과는 ‘형이상의 도체(形上之道)’가 개념적 유사성이 있다. 형이상의 실존적 도라는 뜻으로 ‘도(道)’라는 단어가 쓰인 곳은 1장, 4장, 21장, 25장, 32장, 34장,42장,51장이다.

《노자》1장에 보면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이라 하여, 진정한 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개념을 가지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억지로 ‘도’자로써 그것을 부르는 것은 단지 편의를 위해서였다. 도(道)는 고정된 형체가 없고, 인간의 감각과 지각의 작용을 초월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오히려 형상이 있고[其中有象]․ 그 속에 오히려 실물이 있고[其中有物]․ 그 속에 오히려 믿을 만한 것이 있으니[其中有信](21장) 모두 도(道)가 하나의 실존체가 우주에서 유일한 절대적인 것으로서, 그것의 본질은 영원히 존재하며, 외물의 변화에 의해 변화․소멸될 수 없고, 외재적인 힘에 의해 변화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혼자 오랫동안 존재하며 영원히 다하지 않는다[獨立而不改]’(25장)라고 하였다.


•파리메데스(Parmenides)의 Being과의 차이점

그리스의 철학가 파리메데스의 Being(존유,存有) 역시 유일하며․ 절대적이며․영원한 것을 가리키지만, 불변부동의 것으로 간주한다. 노자의 ‘도(道)’ 는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고, 부단히 운동하고 있는 것이므로 ‘순환운행하며 그치지 않는다[周行而不改]’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편집] 구절풀이

<도표> [3]

반야심경 대상 추구하는바 목표
색불이공[色不異空] 범부 상․낙․아․정 이유상문(離有相門)
공불이색[空不異色] 소승, 성직자 무상․고․무아․부정 이공상문(離空相門)
색즉시공[色卽是空]공즉시색[空卽是色] 대승의 수행자 상․낙․아․정 현중도문(顯中道門)


[편집] 1.색불이공 (色不異空)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는 구절은 범부의 현실에 대한 집착을 놓게 하기 위한 구절이다. 평범한 범부들은 ‘나’의 영원한 것[상,常]․ 즐거운 삶[낙,樂]․자유로운 삶[아,我]․ 번뇌가 없는 맑은 삶[정,淨]을 추구한다.</ref="『생활속의 반야심경』, 김현준, 효림출판사, p.120"/> 그러나 색(색․수․상․행․식 오온을 뜻함)이란 상․낙․아․정한 것이 아니다. 색(色)은 실체가 없어 홀연히 일어났다가 사라지게끔 되어 있는 한조각 뜬구름 같은 것이자, 바다에 이는 파도의 물방울 같은 것이다. 색(色)의 실체는 빈 것이다. 공(空)과 다를 바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우리가 집착하는 색(色)에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착각을 깨뜨리기 위한 가르침의 구절이다.


[편집] 2.공불이색 (空不異色)

‘공이 색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소승(小乘)의 공(空)에 대한 집착을 떠나게 하기 위한 구절이다. 소승(小乘)들은 아공(我空)을 깨달아 무상․고․무아․부정을 긍정하며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들이 깨들은 색불이공의 진리[法]에 대한 집착, 공(空)에 대한 집착은 남아있다. 공(空)의 세계에 대한 집착이 있는 이상 올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게 되므로 공(空)은 또 다른 형태의 색(色)일 뿐이다. 공불이색(空不異色)이므로 공을 관념화 시키고 형태화 시키지 않아야 한다. 해탈에 이르는 참된 수행의 길은 색에 대한 집착을 놓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현재 얻은 바에 대한 집착마저 놓아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진 구절이다.


[편집] 3.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

보살대중 등 마하반야바라밀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는 모든 수행자가 비추어보고 실천해야 할 바를 설한 반야심경의 핵심 구절이다. <금강경>의 “마땅히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구절에 해당하는 법문이다. ‘색즉시공’의 색은 실체가 없는 것이므로, 원래의 모든 것이 ‘공(空)임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대법계와 일체가 된다. 원래부터 내가 일법계(一法界)의 하나임을 체득하는 것이다. 우주 대법계를 설명하는 것이 이후 공즉시색이다. <화엄경>에서는 공즉시색의 ‘공’을 ‘진공(眞空)’이라고 한다. 진공은 비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갖 좋은 것이 그 속에 있고 그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공즉시색의 ‘색’을 ‘묘유(妙有)’ 또는 ‘묘용(妙用)’이라 하였다. 열반의 사덕인 상․낙․아․정의 묘유이다. 색즉시공임을 깨달아 공즉시색으로 사는 것이 불교의 최종 목표인 중도(中道)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편집]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의 고찰

[편집] 1.앵겔스 유물론의 색(色)과 공(空)

엥겔스에게 물질(Materie)은 한편으로는 단지 추상개념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원초적 존재 또는 만물의 “최고의 원칙”을 의미한다. 물질이 “낮은 것으로부터 높은 것에로” 발전하는 운동의 법칙을 엥겔스는 ‘변증법’에서 구했다. 변증법은 여기서 “현실변증법”으로서 존재론적 성격을 갖게 된다. 자연물의 발생의 “내재적 법칙”, 즉 그 본질과 관련해 엥겔스는 그것의 ‘실증적’ 규정을 시도한다.


[편집] 2. 부트스트랩 철학 의 색(色)과 공(空)


[편집] 1)부트스트랩

제프리 추 (Geffrey Chew)에 의해 주창되었다. '자연은 소립자나 근본적인 장(場)과 같은 기본적인 실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출발한 것으로 물질의 궁극적 성분을 기대하는 물질관을 비판한다. 그것은 그 구성 요소들이 상호간에도 그 자체로도 어느 쪽으로나 모순되지 않는 자체 조화를 통해서만 전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편집] 2)현대물리학에서의 부트스트랩 철학

부트스트랩 철학은 현대 물리학에 있어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하여 최종적인 반론을 제기하였다. 뉴턴의 우주는 어떤 근본적인 특성을 지닌 기본적인 실체로부터 구성되었는데 이것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었으므로 그 이상의 분석을 추구할 필요가 없었다. 아무튼 더 이상 분석될 수 없는 실체들의 집합으로서는 이 세계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부트스트랩 가설이 명백히 표명했을 때까지는 이러한 개념은 자연 과학의 모든 이론에 절대적이었다. 새로운 세계관에 있어서 우주는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역동적인 망(網)으로 보이게 되었다. 이망의 어느 부분의 특성도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모든 다른 부분들의 특성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는 것이며, 따라서 그것들 서로의 상호 관계의 전체적 조화가 그 망 전체의 구조를 결정짓는다. 이와 같이 부트스트랩 철학은 양자론에서 하나의 본질적이고 우주적인 상호 연관성을 깨달음으로써 발생하여 상대성 이론에서 그 역동적인 내용을 획득하고, [S행렬] 이론에서 반응 확률에 의하여 형식화된 자연관에 있어서의 최고 정점을 나타낸다. 동시에 이러한 자연관은 일반적인 철학과 물질에 관한 특수한 상(像)의 양면에서 동양의 사상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편집] 3)강입자 부트스트랩

"모든 입자는 다른 모든 입자들로 구성된다"로 표현 될 수 있다. 이는 강한 상호작용의 특성을 잘 나타내었던 쿼크 구조를 반대하는 강입자에 대한 이론이다. 각각의 강입자는 고려중인 강입자를 형성하기 위해 서로 상호작용 할지도 모르는 한 동아리의 입자들의 잠재적 '결속 상태'에 있으므로 S행렬의 동적이고 확률적인 의미에서 강입자는 서로서로를 '수반하는(involve)'것이다. 모든 강입자는 그 구성 요소 역시 강입자인 복합적 구조며, 그것들 중의 어느 것도 결코 다른 것보다 더 근복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각각의 강입자들은 세가의 역할을 하는데 하나의 복합적 구조이고, 그것은 다른 강입자의 구성요소이고, 또한 그것은 구성 요소들 간에 교환되어 하나의 구조를 함께 지탱하고 있는 힘들의 부분을 형성할 것이다.


[편집] 4)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 일맥상통하는 강입자 부트스트랩

강입자 부트스트랩이 대승 불교에서 중시하는 색즉시공공증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과 일맥상통한 것은 모든 입자들의 상호작용 또는 '상호관통'이다. 대승 불교와 부트스트랩 이론의 물질관은 둘 다 대상을 사건으로서 보는 '시공관(space-time view)'이며, 그것들 서로 간의 상호 관통은 공간과 시간 역시 상호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이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편집] 3.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의 색(色)과 공(空)

일반상대성이론에서 중력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등가이론을 거쳐 중력을 힘이 아니라 공간의 속성으로 파악하는 아인슈타인의 획기적 발상에서 그 실마리를 발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발상의 이론적 근거는 리만 기하학에서 제공되는 데 후설은 바로 그의 수리 철학적 논의에서 끊임없이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이론적 토대에 대한 해명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고전 물리학의 토대인 유클리드 기하학에 잠재되어 있던 공리연역적 방법이 집합론으로 완성되어 리만 기하학을 출현시키며 결국 물리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세계의 집합화과정을 보다 격화된 형태로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편집] 4.양자장론에서 본 색(色)과 공(空)

현대물리학의 장 이론은 물질적인 입자와 허공 사이의 고전적인 구별을 버리게 해주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이론과 양자장 이론은 둘 다 소립자들이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혀 주었다. 한편 그것들은 그 공간의 구조를 결정하는 반면에 독립된 실체로 여겨질 수가 없고, 전 공간에 미만해 있는 연속적인 장의 응결로서 이해돼야 한다. 양자장 이론에서 이러한 장은 모든 소립자들과 그것들 서로의 상호 작용의 바탕으로서 이해되고 있다.

W. Thirring “장은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것은 결코 제거될 수가 없다. 그것은 모든 물질적 현상의 수레다. 그것은 양성자가 그것으로부터 파이 중간자들을 생기게 하는 ‘허공’이다. 소립자들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단지 장의 운동 형태에 불과하다”

장이론에 따르면 세 개의 소립자 - 양성자(p), 반양성자(), 파이(π)중간자-가 아무것도 없는 데에서 형성되고는 다시 진공 속으로 사라진다. 어떤 핵자나 다른 강하게 상호 작용하는 소립자가 없더라도 가상적 소립자들이 허공으로부터 스스로 생겨났다가 다시 허공으로 사라지는 것이 명백하게 밝혀졌다. 이로써 결국 물질과 빈공간 사이의 구별을 버려야 했다. 이러한 과정을 도식화 한 것이 ‘진공도식’이다.

장이론에 따르면 진공이란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것은 끝없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무수한 입자들을 함유하고 있다. 

‘물리적 진공’은 단순히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소립자 세계의 모든 형태를 지닐 가능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형태들은 독립된 물리적 실체들이 아니라, 단지 근본적인 허의 일시적 출현이다. 즉, 가상적 소립자들과 진공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동적 관계다.

[편집] 참고문헌

  • 한암대원 선사 강설(2006).『현대불교경전시리즈 01.반야심경』. 현대불교 신문사.
  • 김현준 지음(2006). 『생활속의 반야심경』. 효림출판사.
  • 아르눌프 지텔만(2006).『교양으로 읽는 세계의 종교』.예담출판사.
  • 프리초프 카프라. 김용정․이성범 역(2008).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범양사
  • 김성구․조용길(2006).『현대 물리학으로 풀어본 반야심경』. 불광출판부.
  • 진고응 지음. 최재목․박종연 역(2008). 『진고응이 풀이한 노자』.영남대학교 출판부.
  • G. F. Chew, "Hadron Bootstrap : Triumph or Frustration?" :op. cit.
  • G. F. Chew, "Bootstrap : A Scientific Idea?" :op. cit.
  • Daniel F. Styer, 『이상한 나라의 양자역학』, 북스힐, 2005.
  • 로버트 길모어, 『양자 나라의 엘리스』, 해나무, 2003.
  • 존 그리빈/ 마틴 리즈, 『암흑물질로 푸는 우주진화의 수수께끼』, 푸른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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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jmks | 작성시간 11.12.10 와 방대한 좋은 자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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