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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품처럼 넉넉한 산 밑 초가집을 향해 지팡이 짚고 다가가는 사내는 화가 자신이 아니었을까. 변시지 화백의 1992년 작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72.7×90.9㎝). |
'폭풍의 화가' 우성 변시지 화백 별세
그 황톳빛 화면엔 우주적 연민이
고향 제주의 소용돌이 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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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성(宇城) 변시지(邊時志,1926~2013) |
| 그는 제주의 화가, 아니 고향의 화가였다.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이 8일 영영 고향 으로 돌아갔다. 87세. 거친 붓질로 세상과 마주하는 인간의 본질을 드러낸 그의 황톳빛 화면은 우주적 연민을 불러 일으킨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26년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태어난 고인은 다섯 살 때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 갔다. 오사카미술학교 서양화과 졸업 후인 47년 ‘광풍회전(光風會展)’과 일본 문부성 주최 일전에 입선하며 이름을 알렸고, 이듬해엔 광풍회전에서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했다. 57년 귀국 후 서라벌예술대학, 한양대 등지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75년 제주대 교수가 되어 고향에 정착했다. 이후 제주의 풍토에서 영감을 얻은 황갈색 작업을 시작했다. 변시지만의 독창적 ‘제주화’의 탄생이다.
제주에서 오사카로, 서울서 다시 제주로. 유랑 끝에 찾아낸, 고향 땅에 가장 가까운 자기만의 화풍이다. 변 화백은 황톳빛 화면 속에 간결한 필치로 자신을 닮은 지팡이 짚은 사내를 즐겨 그려 넣었다. 고인은 일본서 초등학교 2학년 때 교내 씨름대회서 대퇴부를 다친 뒤 평생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 그가 지내온 삶의 파도를 암시하듯 격랑으로 가득한 섬, 바람많은 제주의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를 즐겨 그렸다. ‘폭풍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다. 91년 국민훈장을 받았고, 2007년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 작품 두 점이 소장됐다.
폭풍 속에 초가집을 지키는 외로운 사내, 친구라곤 까마귀, 조랑말뿐인 화면 속 사내는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오광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변시지가 제주도가 되고 제주도가 변시지가 되는 세계, 여기에 그의 예술의 독특한 구조가 있다” 며 “모든 게 생략돼 버린, 골격만 남는 풍경, 아무 것도 남아나지 않는, 오로지 남아있을 것만 있는 풍경”이라 평했다.
1926년 제주출생, 1947 일본 광풍회 입선, 1948 제34회 일본 광풍회전 최고상 수상, 1949 일본 긴자 시세이도화랑에서 제1회 개인전, 1957 한국으로 영구 귀국, 서라벌 예대 미술학과장 역임, 제주대학 미술교육과 교수, 변시지 제주 풍화 출간 국민훈장 수상, 서귀포 시민상, 서귀포 기당미술관 특별전시관 개관전 등 개인전 오십 여회, 2013년 6월 8일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이 87세로 영면하엿다.
유족은 부인 이학숙씨와 아들 정훈(기능성다당연구소 대표)씨, 딸 정은(미술교사)· 정선씨 등. 발인은 10일 오전 11시. 제주 서귀포 하원동의 가족묘지에 안장된다. - 중앙일보 권근영 기자 2013-06-08 |
우성(宇城) 변시지 화백, 그의 화폭에는 늘 제주의 바람이 분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폭풍이 몰아친다. 그래서 그는 ‘폭풍의 화가’로 불린다. 미국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는 생존한 아시아 작가로는 최초로 변 화백의 그림 「난무」와 「이대로 가는 길」 두 점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1997년에는 한국 화가로는 유일하게 검색 포털 야후에 의해 고흐나 피카소와 함께 세계 100대 화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제주에 살며 오로지 제주만을 그려온 변 화백의 그림은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다. 한국 화단의 중심부가 그를 제주의 향토화가 정도로 애써 무시하는 데 급급할 때 세계적인 박물관 책임자는 그의 진가를 알아봤고 그는 변방의 화가에서 일약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다. 결국 동시대의 화가들이 다들 유럽으로 떠날 무렵 홀로 고향으로 돌아온 그의 선택이 옳았음이 입증된 것이다.
유레카! 제주의 색을 발견하다
변 화백은 서귀포 서홍동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을 보냈다. 유년기 잠깐이지만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하기도 했다. 서종택 교수는 그것이 후일 “서양화를 전공한 변 화백의 수묵화적 기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그의 저서 『변시지』에서 평가한 바 있다. 소년 변시지는 여섯 살 때 가족들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에 정착했다. 큰형은 고무 공장을 차려 가족들을 부양했다. 그는 소학교 2학년 때 씨름대회에 나가 2, 3학년 선수들을 차례로 물리쳤고 마침내 그보다 몸집이 두 배나 큰 4학년 선수와 맞붙었다. 오기로 버티다 결국 모래판에 처박혀 관절이 망가졌다. 한순간의 오기 때문에 평생 다리를 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 사건은 소년 변시지가 그림에 몰두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1948년, 변시지는 일전(日展)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 공모전인 광풍회전(光風會展)에 출품해 스물세 살 나이로 최연소 최고상을 수상하며 일본 화단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일전(日展)의 심사 위원이던 사이토 요리가 “변시지의 그림을 인정하면 대가들의 그림이 위험하다”라고 했을 정도로 그는 일찍부터 재능과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변시지는 일본에서의 성공을 뒤로하고 1957년 11월 15일 서울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영구 귀국했다. 그러나 학연과 지연, 인맥으로 얽힌 한국 화단의 반목과 질시를 견디지 못해 방황했고 마침내 고향 제주로 낙향을 결심했다. 서울에서는 갑자기 일본에서 귀국한 그를 의심하여 감시하는 기관원들의 눈초리를 견디기도 힘들었다. 두 번이나 국전 개혁운동을 주도하다 좌절하기도 했었다. 그는 제주대학교 교수로 자리를 옮겼지만 그의 삶은 안정을 찾지 못했다. 새로운 화법을 발견하기 위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매일 술을 마시고 대취했다. 심지어 일주일 내내 곡기 한번 입에 대지 않고 술만 마시기도 했다. 그가 술에 취해 쓰러지면 동료와 제자들은 그를 화실로 옮겨다 주고 그가 그린 그림들을 훔쳐갔다.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그림도 있었다. 그런 치사한 우정의 나날들이 갔다. 끝내 견딜 수 없을 때면 바닷가 자살바위 근처를 배회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술에 취한 몸으로 깨어났는데 간밤에 마주 보았던 자신의 캔버스가 온통 황갈색 톤으로 보였다. 서종택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그는 마침내 ‘유레카!’ 한 것이다. 유레카! 나는 알아냈다! 드디어 ‘제주의 색’을 발견한 것이다. 하늘도 바다도 땅도 온통 황갈색. 그것은 제주 원형의 색이었다. 그날 이후 변 화백의 그림은 하늘도 바다도 푸른색이 아니다. 온통 황갈색이다.
미술관에 부는 폭풍
기당미술관은 그의 그림을 아끼는 제주 출신의 재일 기업인 기당(奇堂) 강구범 선생이 지어서 그에게 헌정한 미술관이다. 변 화백은 미술관을 개인 소유로 하지 않고 서귀포시에 기증했다. 미술관 특별전시실에는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폭풍에 휩싸인 것처럼 강렬한 에너지에 압도당한다. 그의 작품 「태풍」 앞에서 나는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다. 하늘도 바다도 온통 누런 빛, 그의 그림은 현실이 아니다. 현실의 바다와 하늘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바다와 하늘은 현실을 떠나 있지 않다. 나는 어느새 그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구부정한 사내로 서 있다.
「해촌」의 돌담에 둘러싸인 초가는 평화롭다. 오늘은 바람이 없어 그림 속의 사내는 모처럼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하지만 낚싯대에는 줄이 없다. 줄이 없으니 바늘도 없다. 사내는 무엇을 낚으려는 의지가 없다. 그가 낚으려는 것은 바닷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낚시는 생의 저 깊은 심연에 거처하는 존재의 본질을 낚아 올리려는 것이다. 대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더불어」의 작은 초가 속에는 사내와 말이 들어가 있다. 사내는 화폭에 말을 담으려 하지만 말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저 또한 그림을 그리자는 행위가 아니다. 말에게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느냐. 자신도 모르는 답을 말에게 묻지만 말이라고 답이 있겠는가. 변시지 화백의 그림들은 대부분 강렬한 폭풍 속에 내던져진 존재의 고독을 그린다. 하지만 나는 폭풍의 풍경보다 정적인 풍경에서 더 깊은 존재의 외로움을 본다. 거대한 폭풍 앞에서는 존재가 의문을 품을 틈이 없다. 실존이 더 화급하다. 바람에 날리거나 파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말과 사내와 나무는 서로 기대어 섰다. 그것이 전부다. 초가 또한 날려가지 않으려는 몸부림으로 돌담 아래 고개를 처박고 있지 않은가.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한라산」, 한라산 아래 초가. 사내는 오늘 또 부질없는 짓을 벌이고 있다. 까마귀에게도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느냐? 까마귀는 뭐라 지껄이는 듯하지만 아마도 저건 딴청이다. 영리한 까마귀는 알 수 없는 질문을 못 알아들은 척 시치미를 떼고 있다. 자신은 제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영과 속을 넘나드는 영매가 아니라고 그저 배고픈 날짐승일 뿐이라고. 그러니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다고. 한낮의 태양은 한라산 마루에 걸려 이글거린다. 태양 아래 세계의 본질은 다 드러나고 비밀 따위는 없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장 그르니에, 『섬』)
까마귀도 그걸 이야기하려는 걸까. 멍청아, 보이는 게 다야, 존재의 비밀 따위는 없어. “짙어가는 어둠이 그대의 목을 조이려 할 때, 한밤중에 잠깨어 나는 과연 무슨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를 가늠해 볼 때,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생각이 미칠 때, 잠이 그대를 돌처럼 굳어지게 할 때, 대낮은 그대를 속여 위로한다. 그러나 밤은 무대장치조차 없다.”( 장 그르니에, 『섬』)
그런데 정말 그럴까. 생사의 비밀은 없는 걸까. 존재의 실상은 끝끝내 찾을 수 없는 것일까. 한라산을 내려와 나는 다시 「태풍」 앞에 선다. 그림 속의 바람이 화폭을 벗어나 나에게 몰아친다. 사내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온 바람이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간다. ‘폭풍의 화가’ 변시지의 바람은 정물이 아니다. 활물이다. 그의 바람은 풍경이 아니라 실재다. 그는 바람을 그리되 화폭에 담지 않는다. 가두지 않는 것이다. 바람은 멈추는 순간 더 이상 바람이 아님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는 단지 화폭에 바람이 지나갈 통로를 만들어 준다. 그의 그림은 바람의 통로다. 그의 화폭이 늘 일렁이고, 바람 소리가 들리고, 소나무가 흔들리고, 초가집 추녀가 들썩이고, 파도가 솟구치는 것은 바람의 통로를 따라 세상의 모든 바람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 필자 시인 강제윤 1988년 '문학과 비평' 으로 등단. - 출처 북매거진 http://www.nabeeya.net/nabee/index.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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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K아트 협찬 〈변시지 - 육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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