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변곡점 피아노 / 김창남 15
1. 오늘 한 수필가가 쓴 ‘변곡점’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장을 덮고 나니 ‘내 삶의 변곡점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내 피아노가 떠올랐다. 퇴근길 대문 앞에 서면 딸아이가 치는 피아노 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음악을 잘 알지 못하는 내게도 그 소리는 참 다정하고 좋았다. 선율에 취해 대문 손잡이를 잡은 채 한참을 서 있기도 했다. 그 소리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2. 딸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가정환경 조사를 하는데, 피아노 항목에 동그라미를 치는 옆자리 친구가 그렇게 부러웠다며 자기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래, 이제 우리 집도 피아노 하나 정도는 들여놓아도 되지 않을까.’ 조금 사치를 부린다면 다른 무엇보다 피아노가 낫겠다 싶기도 했고, 어쩌면 내 음악에 대한 열등감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3. 돌이켜 보면 그때까지 참 힘겹게 살았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우리 가족은 도망치듯 대구로 내려왔다. 갖은 고생 끝에 내가 은행에 취직하고, 형이 제대하면서 겨우 집안 형편이 조금 나아지는 듯했다.
하지만 1976년 내가 군에서 제대하고 결혼했던 그해 겨울에 마흔여섯이던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 아버지 사업은 다시 기울었고, 형은 아버지와 뜻이 맞지 않아 고향으로 귀농해 버렸다. 결국 결혼한 지 겨우 일 년 만에 나는 아버지를 모시게 되었다.
4. 아버지를 모신다는 것은 단순히 한집에 함께 사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집안의 크고 작은 대소사를 모두 책임지는 가장이자 장남의 역할을 맡는다는 뜻이었다. 아버지 회갑연부터 두 여동생의 혼사까지 모든 일이 내 몫으로 남겨졌다. 형 또한 빈손으로 귀농한 처지라 어떤 도움도 기대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갚아야 할 빛이 고스란히 내 몫이 되었다. 어머니는 글을 모르시면서도 사채를 이용해 저축했다. 남에게 돈을 빌려줄 때는 신용만 믿고 차용증서를 받지 않으셨지만, 돈을 빌릴 때는 어김없이 증서에 지장을 찍어주었다. 분명 받을 돈이 훨씬 더 많았을 텐데, 갚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머니의 지장이 찍힌 차용증서는 모두 내가 떠안아야 하는 문서로 남았다. 그 힘든 시절 군소리 한 번 하지 않고 곁을 지켜 준 아내가 지금도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5. 우리는 빚을 갚아 나가며 아이들을 키우고, 아버지를 모시고, 동생들을 챙겨야 했으며, 한편으로는 미래를 위해 저축을 해야만 했다. 고기 한 번 마음 놓고 사 먹으려 해도 손이 선뜻 나가지 않았다. 어쩌다 한번 외식을 하는 날이면 돼지갈비가 최선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아이들과 함께 간 놀이공원에서 음료수 하나 사 주지 않고 물만 먹으라 했다며, 아들은 지금도 그 기억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그 시절 놀이공원에 데리고 간 것만으로도 큰 무리였는데, 아이들이 그때의 사정을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6. 대리로 승진하면서 월급이 꽤 올랐다. 아내는 무서울 만큼 알뜰하게 살림을 꾸렸고, 마침내 모든 빚을 갚았다. 살림 형편은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었다. 재혼하신 아버지에게 자그마한 집도 한 채 마련해 드렸고, 저축도 조금씩 불어났다. 직장에서는 학자금 지원제도가 생겨 아이들 대학 등록금 걱정도 덜었다. 차장 승진을 눈앞에 두었을 때는, 부자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더 이상 궁색하지는 않았다.
7. 이제 정말 피아노 정도는 사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게도 ‘우리 집이 이만큼 달라졌다.’는 증표가 될 것 같기도 했다. 아내에게 피아노 사자고 넌지시 말을 건네니 “그래도 되겠느냐.”며 되묻는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마음 한쪽 구석에는 딸아이에게 아버지가 이 정도는 해 줄 수 있는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었던 치기 어린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악기점에 가니 아이가 선택한 피아노 가격은 내 한 달 월급을 훌쩍 넘었다. 순간 손이 움츠러들었지만, 과감히 지갑을 열었다.
8. 피아노가 거실에 자리를 차지하니, 마치 우리 집도 부잣집 대열에 들어선 듯한 뿌듯함이 밀려왔다. 매달 조율비가 만만치 않았지만, 그걸 기꺼이 부담할 형편이 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이웃집 대학생에게 피아노 개인교습까지 부탁했다. 아이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우리 아이에게도 피아노를 가르친다는 그 자랑스러운 마음을 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9. 돌이켜 생각해 보면 피아노는 단순한 악기가 아니었다. 우리 삶이 바뀌는 경계선이었다. 피아노는, 외식 메뉴가 돼지고기에서 쇠고기로 바꾸어주기도 했고, 해외여행 자유화를 계기로 여행도 다니게 해 주었다. 이듬해에는 자가용도 한 대 장만했다.
10. 고동색 피아노 뚜껑을 열면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이제는 집에 큰돈 들어갈 일이 없겠다는 안도감도 찾아왔다. 남은 건 노후를 위해 부지런히 저축하면 될 일이었다.
11. 세월은 빠르게 흘렀다. 살던 동네가 재개발되어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피아노를 둘 데가 마땅치 않았다. 시집간 딸에게 가져가래도 서울 아파트에는 들어갈 틈이 없었다. 손주들도 피아노에는 통 취미가 없으니 점점 애물단지가 되어갔다.
이사하는 날, 마침내 팔아 버렸다. 아내도 아쉬워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들은 “아버지 많이 서운하시지요.” 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고, 가슴 한쪽이 텅 빈 것처럼 아려왔다. 피아노를 가지러 온다기에 나는 괜스레 산책을 나섰다. 피아노가 떠나는 모습을 차마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참 뒤 돌아와 피아노가 놓여 있던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딸을 시집보내고 텅 빈 방을 들여다보던 그날의 쓸쓸한 마음과 흡사했다.
12. 생각해 보면 내가 떠나보낸 것은 피아노가 아니었다. 가난을 견디며 이를 악물고 버텨온 내 젊은 날의 세월, 그리고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며 품었던 희망의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 집 거실을 오랫동안 지켜 주었던 그 고동색 피아노는 악기를 넘어 우리 가족이 지나온 삶의 아름다운 변곡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