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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 문화

중국 수나라 2대 황제 수양제

작성자미스터 광|작성시간10.05.17|조회수486 목록 댓글 0

 

수양제(隋煬帝) 양광(楊光)은 일명 영(英)이라고도 하는데 수나라 2대 황제입니다. 수양제는 수문제(文帝)의 둘째 아들로서 어릴때부터 총명해 10살에 [관고금서전(觀古今書專)]을 줄줄 내리 외울수 있었습니다. 12살에 진왕(晉王)으로 책봉받고 북변의 방비를 맡았으며586년 진(陳)을 토벌하여 이듬해 이를 멸망시켰습니다.

수양제는 부모앞에서 효도하는 가상을 보이면서 자주 부모에게 진언을 하여 신임을 얻었습니다. 그는 형인 양용(楊勇)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고 부모에게 형을 무함했습니다. 황후는 수양제의 말을 곧이듣고 수문제더러 양용을 태자에서 폐적시키고 대신 수양제를 황태자로 봉하게 했습니다. 604년 수문제의 병이 위중해지자 수양제는 제멋대로 날치였습니다. 수양제에게 왕위를 맡길수 없다고 생각한 수문제는 대신들을 곁에 불러 수양제를 황태자에서 폐적시키고 그의 형인 양용을 다시 황태자로 봉하려고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수양제는 황제 성지를 위조해 수문제가 불러들인 대신을 잡아들이고 군사를 이끌고 궁전에 쳐들어가 수문제를 죽인후 왕위에 올랐습니다.

황제로 된 수양제는 전국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강화하고 강남지구의 물자를 보다 순조롭게 북방으로 날라오기 위하여 그리고 개인이 향락을 부릴 욕심으로 두가지 일을 벌였는데 한가지 일은 낙양에 동도(東都)라 부르는 새 수도를 건설한 것이고 다른 한가지 일은 남북을 관통하는 대운하를 판것입니다.

수양제는 605년에 100만 명을 동원하여 황하와 회수를 연결하는 통제거(通濟渠) 를 608년에는 황하와 탁군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또 610년에는 강남하(江南河)를 개통했습니다.이 운하들은 원래 춘추 시대로부터 한대를 거쳐 반 자연, 반 인공적으로 된 수로였는데 수양제가 즉위한후 운하를 보수 확장했습니다.

6년내에 길이가 4800여키로메터에 달하는 대운하가 개통되였습니다. 대운하를 개통하는 기간 부역에 동원된 인원수는 수백만에 달했습니다. 대운하의 개통은 강남의 경제 지대를 정치적·경제적으로 수도 대흥(大興)에 연결시켜 남북을 일관하는 대동맥을 완성시켰다는데 큰 의의가 있습니다.대운하는 중국 역사에서 위대한 공사의 하나로서 중국의 경제, 문화 발전과 통일 위업에 적극적인 역할을 놓았습니다.

대운하의 개통은 세계적으로 보기드믄 장거였지만 이 부역에 동원된 노동인민들은 극심한 생활난을 겪어야 했습니다.번중한 부역은 사회모순의 격화를 초래했습니다.

612년 수양제는 대신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군사113만명을 일으켜 고려에 대한 정벌을 시작했습니다. 이 정벌에 동원된 인부만해도 300여만명에 달했지만 후에 량초가 공급이 되지않아

평양성부근까지 쳐들어간 수나라 군대는 부득이 퇴각하게 되였습니다. 퇴각하는 수나라군대에 대해 고려군대는 추격작전을 벌였는데 결과 제일선에 있던 30만명에 달하는 수나라 군대는 거이 전멸되였고 군사를 통솔하던 수나라 장군 신세웅(辛世雄)도 전사했습니다. 고려에 대한 첫 정벌은 수나라 군대의 패배로 막을 내렸습니다.

613년 수양제는 재차 고려에 대한 두번째 정벌을 시작했습니다. 그해 4월 수나라 군대가 요동성을 공격할 때 후방에서 동도의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외정의 실패와 가혹한 수탈은 국내의 모순을 격화시켜 마침내 양현감의 반란을 초래했습니다.양현감의 반란으로 천하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양현감이 반란을 일으키자 수양제는 급히 철군령을 내렸습니다. 이리하여 고려에 대한 두번째 정벌도 실패로 끝났습니다.

614년 2월 수양제는 고려에 대한 세번째 정벌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당시 천하가 혼란해져 군대를 동원하기 힘들었고 동원된 군사들중 도주자들이 많았습니다. 고려에 대한 세번째 정벌도 숱한 사상자를 내고 말았습니다. 고려에 대한 세차례 정벌로 하여 많은 인력이 동원되였기에 땅을 다루는 사람이 없어 땅은 황폐해 졌고 국력은 크게 내려갔습니다.

611년 산동, 하남에서 큰물이 졌는데 그 뒤를 이어 질병이 돌아 수십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어떤 지방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참상이 벌어졌고 도처에서 봉기가 일어났습니다. 611년 왕박(王薄)이 지금의 산동성 장구경내에서 수나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봉기는 파죽지세로 전국에 확산되여 갔습니다 616년 전국적으로 세갈래의 봉기 주력군이 형성되였는데 봉기군앞에서 수나라군대는 패배를 거듭했습니다.

수나라가 곧 멸망할것을 내다본 귀족, 관료, 군벌들은 자기 안속만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일락서산의 궁지에 몰린 수양제는 날마다 향락에 빠져있었지만 불안한 마음을 달랠수 없어 도무지 잠들수 없었습니다. 618년 3월 대장 우문화급 (宇文化及)이 반란을 일으켜 수양제를 사로잡은후 부하들을 시켜 흰수건으로 수양제를 목을 졸라 죽이였습니다.

 

수양제와 그의 정치

괴이한 즉위

총사령관으로서 남조 최후의 진을 토벌하여 멸망시키고, 중국통일에 빛나는 무훈을 세운 수문제의 차남 진왕 광은 그 여세로서 수문제 및 독고황후의 환심을 샀다. 드디어 수문제는 개황20[600]년, 형인 태자 용를 폐적하고 진왕 광을 태자로 삼았다.
수문제는 독고황후가 질투심이 강하였기 때문에 다른 총애하는 비는 거의 없었지만, 진선제[宣帝:진후주 진숙보의 아버지]의 딸인 선화부인[宣華夫人]만큼은 예외였다. 진왕 광은 그것에 주목하여, 선화부인에게 선물을 자주 보내주고 환심을 샀다. 그가 태자가 된 것은 선화부인의 숨은 원조도 있었다고 한다. 602년[인수 2], 독고황후가 죽자, 선화부인은 수문제의 총애를 독점하게 되었다. 604년[인수 4] 7월, 수문제의 병이 심해져서, 선화부인과 태자 광이 함께 수문제를 모시고 있었다. 새벽에 선화부인이 옷을 갈아 입으러 나왔을 때, 태자 광은 이에 덮쳤다. 부인은 간신히 피하여 수문제의 곁으로 돌아왔는데, 수문제는 그 얼굴색이 평상시와는 다른 것을 보고 묻자, 부인은 훌쩍훌쩍 눈물을 흘리며,“태자가 무례하다”라고 엉겹결에 외쳐버렸다. 수문제가 화가 나서 “개새끼, 그 따위 놈이 무슨 큰 일을 맡기는데 충분하겠나. 독고가 나를 엉뚱한데 빠뜨렸다. ”라고 말하고 신하에게 명하였다. “내 아들을 불러라. ” 그래서, 신하가 태자 광을 부르려고 하자, 수문제는 “용”[폐태자]이고 외쳤다. 그때의 신하는, 바로 태자 광을 추대한 장본인이었으므로 당시의 실권자인 좌복야 양소에게 연락하였다. 양소는 이 상황을 태자 광에게 알렸다. 태자 광은 신복을 수문제의 침실에 두고, 선화부인이하의 후궁의 사람 모두를 별실로 물러가게 하였다. 그러한 속에서 수문제는 죽었다. 선화부인과 다른 궁인들은 사태의 급변을 느끼고, 벌벌 떨고 있었다. 그 날 저녁, 태자 광은 선화부인에게 살짝 편지를 건네었다. 선화부인은 수문제가 독살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편지도 물론 열지 않았다. 그러나 사자가 봉투를 열도록 독촉하므로, 그것을 열었는데, 그것은 러브 레터였다. 태자 광은 선화부인과 그날 밤을 함께 보냈다.
이상의 내용은 “수서” 선화부인전에 나타나 있다.
태자 광은 위와 같은 경과를 거쳐서 즉위하여 양제가 되었다. 폐태자 용는 곧 살해당하였다. 양제의 막내 동생으로 관동 52주를 지배하던 한왕 양[漢王 諒]은 양제의 즉위에 분노하여 거병하였으나, 양소가 이끄는 군대에 의해서 토벌되고 말았다.


가혹한 수도 조영

양제의 “양[煬]”은 “예를 버리고 민심을 멀리한다”라든가, “하늘에 거역하고 민을 학대한다”라고 하는 시호로 악역의 군주라는 뜻이다. 『수서』 등에는 그 폭군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적이 많이 실려 있으나, 그 중에서도 병역을 포함한 인민의 과도한 부역이 특히 눈에 띤다. 병역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의 고구려 원정 부분에서 다루게 되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는데, 과도한 부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실례가 있다.
수문제는 북주의 수도인 장안에 대흥성을 세워서 여기를 수도로 하였는데, 양제는 이를 서경으로 하고, 더욱이 하남성의 낙양에 동경[동도]을 조영하고, 양소가 이것을 총감독하였다. 이 동경 조영을 위한 인민의 동원은 매월 2백만명이라고 하는 막대한 인원수에 달하였다. 당시, 수왕조의 지배하에 있었던 인구가 4천 6백만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 과중함이 한층 더 확실해질 것이다. 이 수도 조영공사는 양제 즉위 직후인 605년[대업 원년] 3월에 시작되어, 다음해 정월에 완성되었으므로 합계 2천만명 정도를 각각 1개월마다 동원한 것이 된다.
또 부유한 상인[富商] 수만가를 동경으로 옮겨서 황폐해 있던 이 지역으로 물자의 유통을 꾀하였다. 이 동경 조영공사의 규모의 광대함은 당시의 사람들의 기록수의 두보[杜寶]의 『대업잡기[大業雜記]』
에 의하면, 성벽공사에 70만명, 토공감[土工監]의 상역[常役]에 80여 만명, 그 밖에 목공, 기와공, 금공, 석공 10여 만명이라고 한다. 다소의 과장은 있다고 하더라도 대규모인 것임에는 틀림없다. 또 이 동경 조영을 위한 목재를 멀리 강남으로부터 운반하였는데, 그 운송의 행렬이 천리에 미쳤고, 그 힘든 작업으로 죽은 사람도 반수에 달했다고 한다.
또 양제는 동경 가까이에 현인궁[顯仁宮]이라고 하는 이궁[離宮]을 만들고, 그곳에 천하의 진기한 동물과 나무들[奇獸珍木]을 모은 대동식물원[大動植物園]을 부설하였다. 그 주위둘레는 수백리[1리는 약 0. 4킬로미터]였다. 이 밖에 양제는 각지에 행행용[行幸用]의 많은 이궁을 세워, 가끔 행행하였는데, 이것들도 지방민에게는 큰 부담이 되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대운하 완성의 위업

북쪽은 지금의 북경부근으로부터, 남쪽은 멀리 양자강을 지나 지금의 항주[절강성]에 이르는 광대한 중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대운하는 양제 때 완성되었다. 진의 남천[동진] 이후, 그에 따른 한인의 남쪽으로의 많은 이동은 강남의 경제적 개발을 현저하게 촉진시켰다. 양제는 이 남쪽개발의 성과를 흡수하기 위하여 대운하를 관통한 것이다.
수문제가 대흥성[장안 : 현재의 서안시]을 건설하여 북주의 수도를 계승한 것은 관중의 요해에 의하여 천하통일을 확보할 의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수도의 번영과 함께 인구가 증대하자, 수도부근은 식량이 부족해지고, 관동의 곡물을 관중으로 수송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수문제는 이미 584년[개황 4], 광통거[廣通渠]를 개통하여 황하와 장안을 연결하였다. 또 587년[개황 7], 회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산양독[山陽瀆]을 열어 물자가 풍부한 강남과 뱃길로 연결하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양제는 수문제시대의 이 성과를 바탕으로 그위에, 605년[대업 원년] 회수와 황하를 연결하는 통제거[御河]를 열어, 여기에 양자강에서 장안에 이르는 수로가 관통되었다. 또 수 양제는 양자강의 남안으로부터 여항[余杭 : 杭州]에 이르는 강남하[江南河]를 완성하였다. 이 지대는 양자강 델타로 수로가 사통팔달[四通八達]하고, 강남하의 이용가치는 큰 것이었다. 또 608년[대업 4], 황하와 탁군[𣵠郡:북경부근]을 연결하는 영제거[永濟渠]를 열었다. 이것은 뒤에서 말할 고구려 원정을 위한 것이었다.





14.隋 大運河 地圖







이상과 같은 대운하의 완성으로 인한 인민의 사역은 막대한 것이었고, 일단은 면제되어 있던 부인까지 징발을 하고 있었다. 또 각 강의 높이의 차이 등 기술적으로도 곤란한 수문제를 갑문을 설치하거나, 언[堰]이라고 하는 경사면을 만들어서 새끼줄로 끌어올리거나 미끄러지게 하는 등의 연구도 하였다.
611년[대업 7] 양제는 대운하의 완성을 기념해서, 여기에 용주[龍舟]을 띄워 양주[강소성 강도]에서 수로로 탁군[북경부근]까지 행행하였다. 그 호사한 4층으로 만들어진 배는 그 높이가 45척, 길이가 2백척이고, 2층에는 금옥으로 장식한 120개의 방이 있었다. 황후의 배의 규모는 이것보다는 조금 작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에 크고 작은 수천척의 배가 따랐고, 배를 젓는 인부는 8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종래, 대운하는 양제의 유행을 위한 시설이었다고 소문이 났고, 앞에서 말한 동경 조영 등과 함께 양제를 폭군으로서 비난할 자료가 되고 있는 데, 이 대운하의 완성이야말로 남북통일의 구체적인 성과였고, 해상수송이 불가능하였던 당시로서는 그 편리함은 훌륭한 것이었다.


자멸을 초래한 고구려 원정

양제시대의 최대의 사건은 고구려 원정이다. 당시의 한반도의 상태에 대해서는 다음 항목에서 기술하겠지만, 수는 이미 수문제 때 고구려에게 으름장을 놓아 회유하여 굴복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598년[개황 18], 양제의 동생인 한왕 양에게 명하여 요하[요녕성]의 서쪽 기슭까지 진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원정에서 수군은 전염병에 고생하고, 사망자가 십의 팔구라는 상황이 되어, 간신히 요하까지 진격하였으나, 고구려왕이 사죄사[謝罪使]를 파견해 왔기 때문에 대전쟁으로는 가지 않았다. 이 원인으로는 수측의 침략적 의도 외에 백제가 수를 부추긴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양제가 즉위하자, 또다시 고구려를 원정하자는 의견이 많이 일어났다. 백제가 수의 출병을 요청한 것과, 양제가 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을 방문하였을 때, 거기에 고구려의 사절이 와있었으므로 북쪽의 위협인 돌궐과 고구려와의 연계를 두려워하였던 것이 원인이 되었다.
611년[대업 7] 2월, 양제는 탁군[북경]에 행행하여 고구려 원정을 위한 대군의 준비를 개시하였다. 그것은 당연히 인민에게 있어서 과중한 부담이었으므로 그것을 피하여 도둑떼가 되는 사람도 나타났다. 다음해 정월, 양제는 113만이라고 하는 미증유의 대군을 탁군에 결집하여, 이를 12군으로 나누어 출발하는데 40일이 걸렸다. 또 이 대군을 위한 수송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 수의 배가 필요하였다고 하였으므로, 3백만 이상의 인민이 직접, 간접적으로 대전쟁에 종군하였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대군도 요하를 사이에 둔 전투에서는 고구려군이 격렬히 저항하였기 때문에 대장군이하 다수의 전사자를 내고, 별동대[別働隊]만이 겨우 압록강을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서 70리[32킬로미터]지점까지 진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군은 살수[薩水 : 지금의 청천강]싸움에서 대패하여, 진격군 30만 중 요동성[요녕성 요양]으로 도망한 사람은 겨우 2천 7백만이었다고 한다. 이 때 수군도 산동반도에서 평양부근까지 나아갔지만, 육군과 연락을 취하지 못하여 각기 격파당하고 말았다.
양제는 이 실패에도 주저하지 않고, 다음 해인 613년 정월에 다시 대군을 탁군에 집결하여 스스로 이를 이끌고 제2차 고구려 원정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그 해 6월, 양제 옹립의 최대 공로자인 양소의 아들로, 당시 예부상서[禮部尙書 : 장관]였던 양현감[楊玄感]이 후방의 하남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상세한 것은 후술]. 이로 인해 원정군은 급거 철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또 이 때, 병부시랑[兵部侍郞 : 차관]의 곡사정[斛斯政]이 고구려로 도망가는 대사건도 일어났다. 그러나 양현감의 반란은 고구려 원정군의 귀환에 의해서 약 2개월만에 평정되었다.
614년, 양제는 또 다시 고구려 원정을 나섰다. 그 해 7월, 고구려가 사자를 파견해서 항복하겠다고 하면서, 곡사정을 붙잡아 왔기 때문에 드디어 병을 거두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왕이 스스로 수에게 조공한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 이 양제의 고구려 대원정은, 수를 완전히 지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원정중에 각지에서 일어난 민중은 원정종료 후, 본격적인 반란으로서 봉기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수는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혼란에 빠지고 말았다.


양제는 폭군인가?

양제는 그 만년, 각지의 반란을 제껴두고, 남쪽의 풍광명미[風光明媚]한 양주[揚州 : 江蘇省 江都]로 옮겨 항상 미희 천여명을 따르게 하고 술잔을 입에서 떼지않았으며 자신을 짐[朕]이라고 해야 하는 것을 이 지방의 방언으로 “儂”라고 부르고 스스로 망국의 임금인 진의 후주와 비교하면서 퇴폐한 남조 문화에 심취해서 살았다. 결국 마지막에는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서 살해당하고 말였다. [618].
양제는 대토목공사를 실시하여 인민을 과도하게 징발하게 하였다든가, 무모하게 3차에 걸친 고구려 대원정 등을 행한 것은 완전히 폭군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업을 한 황제가 모두 폭군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다. 후술할 당 태종[太宗 : 李世民]은 역시 고구려 원정에 실패하였고, 또 태종 스스로 형인 태자 건성[太子 建成]을 죽이고, 아버지 고조[이연]를 감금하여 밀쳐 버리고 제위에 올랐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사상 제일의 명군이라고 추앙되고 있다. 양제는 분명히 폭군적인 면이 있다. 그러나 폭군이라고 하는 말로부터 연상되는 멍청하고 우둔한 군주는 아니다.
예를 들면, 수당전기 통치체제의 면에 있어서 양제는 수문제의 개황률령에 꽤 대폭적인 수정을 가하고 있다. 즉 율에 있어서는 가능한한 형을 가볍게 하고, 관대한 정치를 지향하였으며, 율의 내용에 있어서도 개황률의 12편이었는데 비해 18편으로 상세히 하고 있다. 그 조문은 지금 전해지지 않으나, 편목에 있어서 위금[衛禁]을 위궁[衛宮 : 궁정의 경호]과 관시[關市 :關所와 市場]로 나누어 다른 제도를 독립시키고, 호혼[戶婚]을 호와 혼으로 나누고, 적도[賊盜]를 적[强賊]과 도[竊盜]와 싸움[鬪]로 나누는 등, 서로 다른 것이 같은 편목에 있는 것을 나눈 것은 극히 합리적이다.
또 대업 5년에 “大索貌閱”이라고 불리는 인민 한사람 한사람을 직접 만나서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호적조사를 행하였다. 그 결과, 장정 24만, 인구 64만이 증가하였다고 했는데, 이것도 가혹한 정치라고 하기 보다는 정무에 힘쓴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대운하를 관통한 것도 그곳을 유행[遊幸]하여 비난하기보다, 그것이 중국경제에 가져온 수송의 편리함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양제가 폭군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앞에서 약간 언급한 대로 양제의 사적은 주로 『수서』에 나타나 있는 데, 그 『수서』는 당 태종이 그 공신 위징[魏徵]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당 태종 및 위징 등은 양제에 대한 반란 속에서 결기하여 수왕조를 타도한 사람들이고 그들에게 있어서는 양제의 폭군적인 면을 강조하면 할수록 한층 당왕조 창업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양제에게는 폭군이라고 간주되는 면이외의 사적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서”에는 그것은 강조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서, 당 태종은 항상 사관의 기록에 유의하고 있었던 것에 나타나듯이 이미 생전부터 명군으로 기록되도록 조작한 흔적이 있다. 그 때문에 태종에게도 있는 폭군적인 면 및 개인적인 면에서의 결함에 대한 기술은 억제되어 있다. 예를 들면, 고구려 원정의 실패는 양제, 태종 모두에게 있는 데, 그 실패가 전자에게는 치명상이 되고, 후자에게는 그렇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즉 폭군도 명군도 기록되어 사료가 될 때의 사회상황에 좌우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역사를 고찰함에 있어서는 사료에 의거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 사료가 작성된 시기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말하자면 폭군도 명군도 본래부터 그렇다기 보다는 기록된 사료에 의해서 만들어진 면이 있다는 것을 주의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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