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왕(桀王) - 하왕조 최후의 왕
중국 고대 하왕조(夏王朝) 최후의 왕. 포악하고 사치한 임금으로 알려져 있다. 《사기(史記)》에는 그가 "부도덕하고 은(상(商))나라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하다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 사. 이름 이계(履癸). 제발(帝發)의 아들로, 상(商) 왕조 최후의 왕인 주(紂)와 함께 포악한 임금의 상징으로 거론된다. 걸주(桀紂)라고도 하며, 흔히 이상적 천자로 추앙받는 요순(堯舜)과 대비된다. 웅장한 궁전을 건조하여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어 배를 띄워 즐겼고, 장야궁(長夜宮)을 짓고 거기서 남녀 합환의 유흥에 빠졌다고 전한다.
《사기(史記)》에는, “걸왕 때 하(夏)나라의 국세는 이미 쇠약하여 많은 제후(諸侯)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백성을 억압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은나라(상나라)의 탕왕(湯王)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하였다. 그가 탕왕의 토벌을 받고 도망가다가 죽음으로써 하나라는 멸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탕왕 - 상나라를 창건한 왕
이름 이(履) 또는 천을(天乙) ·태을(太乙). 탕은 자이며, 성탕(成湯)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에 의하면 시조 설(契)의 14세에 해당한다. 당시 하(夏)왕조의 걸왕(桀王)이 학정을 하였으므로, 제후들의 대부분이 유덕(有德)한 성탕에게 복종하게 되었다. 걸왕은 성탕을 하대(夏臺)에 유폐하여 죽이려 하였으나, 재화와 교환하여 용서하였다.
탕왕은 현상(賢相) 이윤(伊尹) 등의 도움을 받아 곧 걸왕을 명조(鳴條)에서 격파하여 패사시켰다. 그리고 박(亳)에 도읍하여 국호를 상(商)이라 정하여, 제도와 전례를 정비하고 13년간 재위하였다. 그가 걸왕을 멸한 행위는 유교에서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한 일과 함께, 올바른 ‘혁명’의 군사행동이라 불리고 있다. 《서경(書經)》의 탕서편(湯誓篇)은 그때의 군령(軍令)이라 전해진다.
상(商)(기원전 1600년경 - 기원전 1046년)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전설상의 신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국민을 잔혹하게 다룬 31대 주왕(紂王)이며, 주나라 시조인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취급되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인정되었다.
주왕(紂王) - 은나라의 최후의 왕
중국 상(商)나라 마지막 왕.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첩 달기(妲己)와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아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이름은 제신(帝辛), 제신수(帝辛受)이다. 아버지 제을(帝乙)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상(商)나라의 왕이 되었다. 신체가 장대하고 외모가 준수하며, 총명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그러나 애첩 달기(妲己)와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아 하(夏)나라의 마지막 왕 걸(桀)과 함께 폭군의 전형이 되었다.
술로 가득 채운 연못[酒池] 주변의 나무를 비단으로 휘감은 뒤 고기(인육이라고도 함)를 매달아 놓고[肉林] 달기와 함께 배를 타고 노닐면서 손이 가는 대로 고기를 따서 먹었다고 한다. 주지육림이라는 고사성어는 여기에서 유래한다. 또 학정을 그치도록 간언하는 신하들로 하여금 기름을 발라 숯불 위에 걸쳐 놓은 구리기둥 위를 걷게 하는 포락지형을 내려 미끄러져서 타 죽는 모습을 구경하면서 즐거워하였다.
7년에 걸쳐 높이 180m, 둘레 800m의 호화궁전 녹대(鹿臺)를 짓느라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제후들의 맹주 격인 발(發)이 군사를 일으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周)나라를 세워 무왕이 되었다. 주왕은 녹대에 불을 지르고 그 속에서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한다.
강태공(姜太公)-무왕을 도와 주지육림(酒池肉林)하는 은(殷)나라를 무너뜨림
강상, 곧 태공망 여상은 정확히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동해상(東海上) 사람으로 동이(東夷)의 선비[士]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 동해상은 당시에는 제나라, 오늘날에는 산둥 반도 지역이다.
강상은 위수(渭水)가에서 낚시를 하며 지냈으며, 미늘 있는 낚싯바늘 대신, 미끼를 쓰지 않고 미늘도 없는 바늘을 사용하였고, 그렇게 70세에 주 문왕이 그를 발탁할 때까지 소일하며 지냈다.
주 문왕은 주나라의 기업을 반석에 올려놓을 인물을 찾고 있었다. 어느날 사냥을 가려고 거북점을 쳤는데 희한한 점괘가 나왔다. 잡히는 것이 용도 범도 아니고 그렇다고 곰도 아닌, 패왕(覇王)을 도울 인물이라는 점괘였다. 이러한 점괘를 얻은 뒤 사냥을 나간 주 문왕은 위수 강변에서 어떤 노인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야기를 나눠 보니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주 문왕이 크게 기뻐하여 이렇게 말했다.
“선왕인 태공(太公) 때부터 ‘성인이 나타나 도울 터이니 주나라는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그대야말로 바로 그 성인이십니다.”
그러고는 태공이 바라던 인물이라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불렀다.
주나라의 정치를 맡은 강상은 주 문왕과 그의 아들 주 무왕을 도와 역성혁명에 성공하였고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뒤에 제(齊)나라의 후(侯)로 봉해졌다. 그의 병법서 《육도삼략》은 고대 중국의 7가지 병법서 가운데 하나로 여겨진다.
강태공(姜太公)은 주(周)나라의 문왕(文王. 서백 혹은 창)에 의해 등용되어 주나라의 기틀을 다졌고,
주(周)나라 문왕의 둘째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 B.C1,600~1,046)나라에서 주지육림(酒池肉林)하는 주(紂)왕을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그 공덕으로 제(齊, 지금의 산동성)나라에 봉함을 받아 제(齊)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처음에는 가난한 사람이었으나, 위수(渭水, 황하강의 상부 지류)에서 낚시질을 하다가 문왕을 만나게 되었다. 전국시대 때부터 한(漢)나라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제적 수완과 병법가(兵法家)로서의 그의 재능이 널리 회자되기도 하였다.
문왕의 큰 아들은 은(殷)나라 주(紂)왕에 의해 살해되었다. 은(殷)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紂)왕은 그가 유소(有蘇)를 정복했을 때 항복의 표시로 바쳐진 미녀 달기(妲己)에 빠져 그녀의 환심을 사기위해 호화궁전을 짓고 향락을 일삼았다. 연못같은 욕조에 술을 가득 채우고, 나무마다 고기를 매달아 숲을 만들고, 거기서 벌거벗은 남녀들이 서로 쫓아 다니며 놀게 하여 유희를 즐겼고, 밤낮으로 연회를 열어 사치행각을 벌였다. 주지육림(酒池肉林)이란 말은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또한, 간언하는 신하들을 숯불 위의 구리철판을 맨발로 걷게하여 죽이는 포락지형(炮烙之形)의 방법으로 처형하였다.
한편 서백은 덕을 쌓고 인망을 얻어서 귀순하는 자가 많아져 날로 세력이 강해지자, 은(殷)나라 주(紂)왕은 서백을 유리에 감금시켰다. 그것도 모자라서 서백의 큰 아들을 죽여서 포를 뜬 다음, 국을 끊여서 서백 창에게 갖다 주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 사람들이 서백을 소위 성인(聖人)이라고 하는데, 그가 이 국을 먹으면 제 자식의 살점을 먹는 것이니 성인도 아닐 것이요, 먹지 않으면 성인이므로 죽여 버려라.” 서백은 눈물을 머금고 국을 먹는 시늉을 했다. 이 때, 서백의 심복부하들은 서백을 구해내기 위해 주(紂)왕에게 낙서의 땅과 미녀와 명마 등을 뇌물로 바쳤다. 주왕은 크게 기뻐하며 서백을 석방하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며 천자인 주(紂)왕을 대신하여 서쪽지역의 제후들을 다스리게 했다.
서쪽지역으로 간 서백(문왕)은 강태공을 책사로 기용하여 서쪽에서부터 세력을 확장하여 주(周, B.C1,046~771)나라를 세웠고, 국력배양에 힘썼으나, 대업을 이루지 못하고 강태공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둘째 아들인 무왕(武王)이 왕위를 이어 받았으며, 은(殷)나라 주(紂)왕이 원정을 나간 틈을 노려 공격을 개시하여 향락과 사치를 일삼는 은(殷)나라 주(紂)왕을 무너뜨렸다.
한고조 유방vs항우
진나라의 시황제가 죽고 난 후에 진 말에는 농민 봉기가 빈번하게 일어났는데 그중 진승의 봉기가 꽤 유명 하였다.
진승의 봉기에 호응했던 반란군 가운데 가장 유력한 세력은 유방과 항우 였는데 항우는 전국시대 초의 명문인 항씨 일족으로 조부 항연은 초의 장군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항우 자신도 강담이 굳고 재능을 갖춘 인물로 숙부인 항량을 수령으로 하여 진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고 멸망된 초 왕실의 심(心)이라는 인물을 세워 회왕으로 삼아 초의 부흥을 주창하였다.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항우의 뛰어난 전술을 보고 점차 항우의 휘하로 결집하게 되었고 진의 반란토벌군을 각지에서 패퇴시켜 진의 명장인 장함과 왕리가 도리어 초군에 귀순하게 되었다.
항우라는 인물은 위에서 언급했던바와 같이 초의 명문 귀족 가문 출신 이다. 그의 본명은 적 이고 우는 그의 자 이다.
그는 진시황제가 말년에 회계산을 시찰하고 있을 때 머지않아 내가 저 자리에 오르겠다. 라고 말을 할 정도로 이상이 큰 인물 이었다.
그가 어릴 때 서예를 배웠으나 다 배우지 못하였고 검술을 배웠으나 그마저도 제대로 배우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숙부로부터 한 사람이 만 명을 상대할 수 있는 병법을 배우게 된다.
그는 남자의 학문이라는 것은 자기의 이름만 쓸 줄 알면 된다. 라는 말을 할 정도로 학문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그의 이런 학문을 싫어하는 경향은 결국 그에게 뛰어난 무예를 갖고 있지만 판단력이 부족하여 유방에게 패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을 하였고 결국은 그가 오강에서 자살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또 다른 한사람 항우의 라이벌로 알려진 한고조 유방이 있다.
유방은 항우와는 달리 패의 풍읍에 살던 농민으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가문출신이었다. 방 이라는 이름도 후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어릴 때 유협이 되어 여러 나라를 떠돌아 다녔는데 향리에 돌아와 사수의 정장이 되어 마을의 경찰과 같은 임무를 맡고 있었다.
이세황제 초에 여산릉 조영의 노역에 징발된 죄수들을 이끌고 함양을 향해 출발했는데 도중에 도망자가 많아서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 아예 죄수를 모두 석방하고 자신도 풍읍근처의 소택지에 숨어 군도가 되었다. 죄인의 일부와 패의 청년들 수백명이 그 휘하에 모여들었다고 한다. 후에 진승 오광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의 토벌을 주창하면서 현의 하급관리였던 소하와 조참 개 도살업자인 번쾌 등을 중심으로 3천명의 세력을 결집했으며 점차 병력이 증대되면서 항우와 연합하여 초군의 일익이 되었다.
유방이 함양을 함락시켜서 진이 완전히 멸망을 하였는데 유방은 진의 궁전이나 창고에 봉인을 하여 이를 보전하는데 노력했고 진의 가혹한 법치주의에 시달렸던 사람들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통치의 세 가지 원칙만을 제시하였다.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 사람을 상해입힌 자와 도둑질 한 자는 각각 정도에 따라 처벌한다는 원칙 이었는데 그는 또한 다른 진대의 법률을 폐지하겠다고 관중 사람들에게 약속을 하였다. 이 때 유방을 따르던 소하가 진의 궁정에 있던 정치적으로 중요한 법률과 호적 지적의 문서를 가지고 나왔는데 이것은 후일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한 왕조를 세울 때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 문서를 통해서 전토의 정확한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항우와 달리 귀족 출신은 아니었지만 항우가 해내지 못한 한 제국을 이루는데 성공을 하였다. 항우가 민심을 잃어간 반면 유방은 청탁(淸濁)을 모두 포용하는 넓은 도량을 갖추고 있었고 함양을 함락 시켰을 때 법률적용을 관대히 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방의 주위에는 점차 여러 장수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항우에게는 귀족 출신 이라는 장점이 있었지만 그의 무예만 좋아하고 학문을 멀리하는 성정은 그의 주변 사람들을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고 귀족출신이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을 포용할 줄 알며 인심을 얻었던 유방은 항우를 이기고 한 제국을 세워 한 고조가 된다.
자신의 신분에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포용하고 이겨낸다면 한 고조 유방처럼 큰 일을 해낼수 있지 않을까?
혼란했던 전국시대를 통일하고 강력한 황제지배체제를 이룩하였던 진시황이 죽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진시황이 자손만대까지 번창하기를 바랬던 진나라는 멸망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진승․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하여 진이 분열하기 시작한다. 시황제에 의해서 멸망했던 6국의 구 귀족들의 세력과 새롭게 나타난 신흥세력들이 각지에 일어나게 되는데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유방과 항우이다.
구 귀족을 대표하는 세력 중에 가장 막강한 세력을 지녔던 인물이 항우이고 신흥세력을 대표하는 세력이 유방이라 할 수 있다. 항우와 유방 개인을 비교한다면 유방은 항우에 비해서 출신 가문이나 능력이 훨씬 떨어지는 인물이었는데 유방은 어떻게 하여서 항우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었을까?
유방이 항우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신분의 귀천을 떠나서 능력만 있다면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해서 활용하였기에 가능하였다. 유방의 대표적인 수하인 장량, 소하, 한신, 번쾌, 진평 등이 있는데 장량을 제외하고는 신분적으로 미천하였다. 하지만 유방은 그들의 재능을 아꼈고 사소한 부정쯤은 용서해 주었다.
이에 반해서 항우는 당시 구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해 주지 못하였고 또 그에게 범증과 같은 뛰어난 모사가 있었지만 그의 방책을 항우는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방의 수하 중에서 유명한 한신의 경우도 항우의 부하였으나 항우는 볼품없는 그의 모습을 보고 중용하지 않았다. 유방에 비해서 능력과 힘이 있었던 항우가 유방에게 몰락하게 된 이유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고, 인재를 잘 활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중국을 다시 통일하게 된다. 그가 통일을 이룩하고 제일 먼저 하였던 일은 장차 한나라의 큰 위험물이 될 수 있는 공신들의 제거였다. 대표적인 인물로 한신을 들 수 있다. 언젠가 유방이 군사에 대해서 물어 보았는데 유방은 한신에게 자기 자신은 얼마의 군을 통솔할 수 있겠느냐가 물어 보았다. 이에 한신은 10만 정도를 거느릴 수 있다고 하였다. 이에 유방이 한신에게 물어본 즉 한신은 다다익선이라고 하였다. 이후 유방은 이를 빌미로 한신을 제거한다.
유방은 진나라가 몰락하는 것을 직접 보고 체험한 사람이었다. 한신을 비롯한 많은 공신들이 자신과 함께하며 한 왕조를 세우는데 일조하였지만 그는 냉정했다. 진나라의 전철을 그대로 밟을 수 없었다. 유방은 가족과 같은 공신들을 제거하면서 까지 그의 왕조를 지키려 했던 것이다.
자신과 생사고락을 함께하여 왔던 수하들을 제거하였던 유방. 어떻게 보면 간사하기가 이를 때 없지만, 그로 인해 지금의 중국이 있는 것이 아닐까? 유방에 대해 조사하다 보면 유방은 한 시골의 백수건달에 불과하다. 능력도 신분도 어느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유방, 그는 볼품없는 시골의 백수건달이 아니다. 그의 가장 큰 능력은 그의 신분을 바탕으로 당시 사회의 바램을 당시 지배계층의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다음으로 인재를 적재적소에 잘 배치하여 그들을 활용할 줄 알고,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잘 받아들일 줄 알며, 공을 위해서 사를 버릴 줄 아는 냉정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