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촛불의 명령, ‘민치제(民治制)’로 대의제의 독점을 해체하라
: '100만 발안' 대신 '5만 청원과 추첨 시민의회'가 만드는 ‘시스템 민주주의’의 설계도
이원영(시민인권위 공동위원장)
촛불의 공전, 그리고 낡은 OS의 한계
한국 현대사는 두 차례의 거대한 촛불혁명을 거치며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 유례없는 이정표를 남겼다. 광장을 가득 메운 시민들의 외침은 단순히 특정 정권의 퇴진을 넘어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선거날에만 주권자로 대접받고 평상시에는 구경꾼으로 전락하는 대의제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물음이다.
우리는 사람을 바꿨고 정권을 바꿨다. 하지만 삶을 바꾸는 정치는 여전히 멀기만 하다. 1987년 체제 이후 40년 가까이 이어진 대의제는 이제 ‘민의의 흡수 장치’가 아닌 ‘민의의 차단벽’으로 전락했다.
21대 국회에서 5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성립된 청원의 처리율이 고작 17%에 불과하고(국회 의안정보시스템 기준), 22대 국회 역시 개원 이후 성립된 60여 건의 청원 중 단 한 건도 제대로 심의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제도의 파산을 선언하는 증거다.
이에 일각에서는 100만이 발안하면 국민투표를 할 수 있게 하자는 운동도 나오고 있다. 이의 취지는 좋지만 방법론에서 다른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제는 ‘사람’이 아닌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 대의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주권자의 실질적 통치권을 회복하는 길, 바로 민치제(民治制)의 도입이다.
아테네의 유산과 현대적 실험의 교훈
민주주의의 고향 아테네에서 ‘선거’는 오히려 귀족적이고 과두적인 제도로 간주되었다. 돈과 조직, 유명세가 있는 자들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는 ‘추첨(Sortition)’이었다. 평범한 신발 수선공이나 농부가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는 구조, “누구나 통치자가 될 수 있고, 동시에 피치자가 될 수 있다”는 이 평등의 원형을 우리는 회복해야 한다.
이미 스위스는 국민발안과 국민투표를 통해 의회가 거부한 사안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는 전통을 150년 넘게 유지해 왔고, 미국의 서부 지역들 역시 부패한 정치 카르텔에 맞서 강력한 주민발안 제도를 구축했다. 최근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 실험은 낮은 문턱에서 민의를 수렴하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만, 대만이나 프랑스의 사례가 주는 교훈은 명확하다. 권고에 그치는 시민의회는 결국 기득권 행정부에 의해 희석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한국형 민치제는 반드시 ‘법적 구속력’을 갖춘 시스템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민치제의 핵심 ㅡ ‘발안-숙의-결정-실행’의 4단계 순환 모델
민치제는 대의제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추첨 시민의회를 통해 국회의 입법 독점권에 구조적 균형을 가하는 ‘혼합 통치 모델’이다. 그 구체적 설계도는 다음과 같다.
1단계 [국민발안]: 현재의 5만 명 성립 요건은 유지하되, 성립된 안건에 대해 국회가 ‘심사 연기’를 할 수 없도록 법적 강제성을 부여한다.
2단계 [추첨제 시민의회]: 국회가 6개월 이내에 상임위에 상정하지 않거나 상정되더라도 시민의회를 거치는게 좋겠다고 판단하는 안건은 독립적인 ‘추첨제 시민의회’로 회부된다. 개헌이나 셀프입법 등에 시민의회가 직접 심의하도록 청원된 사안도 맡는다.
전국 유권자 중 무작위 추첨된 150~200명의 시민의회는 전문가의 지원을 받아 집중 숙의하며, 여기서 가결된 안건은 국회 본회의에 의무 상정된다.
3단계 [국민투표]: 시민의회의 안을 국회가 재차 거부할 경우, 자동으로 전 국민 국민투표에 부쳐 주권자가 최종 심판한다. 현행헌법상 대통령이 부의하는 국민투표권이 발동되도록 한다.
4단계 [실행 및 피드백]: 확정된 안건은 정부가 1년 내 이행 계획을 수립하고, 디지털 대시보드를 통해 이행률을 시민에게 투명하게 공개한다.
특히 국회의원이 선수가 되어 경기 규칙을 정하는 ‘선거법’이나 ‘세비 결정’ 같은 셀프 입법 사안은 처음부터 시민의회가 전담하게 하여 ‘카르텔 민주주의’의 폐단을 끊어내야 한다.
완결성을 위한 안전장치
제도는 이상이 아니라 실천이다. 민치제는 발생 가능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촘촘한 안전판을 마련해야 한다.
첫째, 시민의회가 결론에 이르지 못할 경우 청원인에게 수정 기회를 주되 국회의 방치 면죄부가 되지 않도록 표결 의무를 부과한다.
둘째, 다수의 독재를 막기 위해 시민의회 결정이 헌법적 가치와 충돌할 경우 헌법재판소의 사전 규범 통제를 거치게 한다.
셋째, 포퓰리즘적 악용을 막기 위해 동일 주제 재발의 금지 기간을 설정하고, 추첨 과정을 선관위가 엄격히 관리하며 외부 로비를 형사 처벌한다.
헌법적 정당성과 투트랙(Two-Track) 전략
민치제는 현행 헌법 체제 내에서도 충분히 시작 가능하다. 헌법 제1조 2항의 주권 원리와 대의제의 절대성을 부정해온 헌법재판소의 판례는 직접민주주의 요소의 도입을 허용하고 있다. (헌재 2009. 3. 26. 2007헌마843)
따라서 우리는 ‘투트랙 전략’을 제안한다. 단기적으로는 국회법과 청원법 개정을 통해 ‘5만 청원 시 시민의회 자동 소집’이라는 권고적 트랙을 즉시 가동해야 한다.
그리고 중기적으로는 다음 개헌 시 시민의회를 헌법기관화하고 국민투표와 연동하는 명시적 조항을 삽입하도록 한다. 이 두 트랙이 병행될 때 민치제는 비로소 완성된다.
시민이 직접 결정해야 하는 문제, 그리고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직접 결정하는 것이 민치제의 원칙이다.
민주주의 역사를 새로 쓰는 한국의 숙명
사람을 바꾸는 정치는 일시적이지만, 시스템을 바꾸는 정치는 영구적이다. 100만 명을 모으는 거대하고 무거운 동원 민주주의보다, 5만 명의 절박함을 시민의회의 지혜로 숙의하는 '정교한 민치제’가 훨씬 강력하고 민주적이다.
이제 촛불행동을 비롯한 광장의 에너지는 이 민치제 도입을 위한 입법 운동으로 결집해야 한다. 뜻있는 개별 의원들을 압박하여 법안을 발의하게 하고, 주권자가 직접 국가 의사결정의 핸들을 잡는 역사를 시작해야 한다.
대의제는 주권자의 유일한 통로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장치다. 구경꾼의 시대를 끝내고, 시민이 직접 다스리는 나라 ‘민치(民治)를 병행하는 시대'를 열자. 그것이 두 차례의 촛불이 우리에게 부여한 민주주의의 완성이자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두번의 촛불+빛의 혁명은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사진은 2025년 1월의 집회장면 @ 이원영